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51)
제국의 수도 크라운 성을 향하는 행렬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없게 될 행렬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간 곁에 있지 못했던 어머니 옆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확실히 가족사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평상시라면 같이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셨던 분이, 긴장하고 있음이 보였던 것이다.
에렌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버지의 첫사랑이자, 마지막일 어머니. 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귀한 후계자를 뺏어간 여자.
내게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분이지만, 할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니 뭐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가 있을 때 그러셔서는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 곁에 지킬 것이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이 두 분의 아들로 살기로 한 삶이다.
그렇다고 대 놓고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여차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질 확률이 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결정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깨지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에렌에 도착했고, 머물 여관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굳이 같이 올 필요는 없어.”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게 제 도리이니.”
“무리할 필요 없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그리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긴장한 표정 가운데서도 단호함이 있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더 이상 말리지 않으셨다.
“로라스, 네가 수고해 줘야겠다.”
에렌에서는 우리가 여기에 도착했음을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먼저 가서 도착을 알리는 것이 순서.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때였다.
“영주님.”
시종 하나가 급히 다가오며 말했다.
“성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은 서로를 쳐다보셨고.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두 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일 층에는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집사님!”
“오랜만이야.”
페컴이 웃으며 하는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직접?”
“직접 와야지. 초대할 분이 락의 영주이니.”
“초대요?”
“밥이나 한 끼 먹는 게 좋겠군.”
“네?”
“공작님이 이리 말씀하셨어. 그리고 그건 곧 초대한다는 뜻이지.”
“할아버지가 또 뭐라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혹시라도 아버님만. 또는 나만 부른 거라면 정말 입장이 곤란해진다.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그런 내 걱정을 아는 듯, 페컴이 웃으며 말해 줬다.
“애들이 왔다는군. 이게 밥 먹자는 말을 꺼내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니.”
“…….”
“단수가 아니라 복수였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그는 집안의 가족사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런 그가 이 정도로 말하는 거라면 일단 시작은 좋은 편이라 봐야겠지.’
걱정은 했지만 크게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분이지만, 결국엔 사람이다. 그것도 나이가 많은 사람.
유역후의 기억에서도 말년에 사람이, 그것도 정을 주고받는 관계의 사람을 늘 곁에 두고 싶었지 않았는가 말이다.
괜히 천륜이란 말이 나온 게 아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직계는 아니지만.’
상세한 건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가장 총애한 핏줄이 아버지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나 역시 못난 손자는 아니니.’
어머니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버지와 날 봐서라도 옛날처럼은 하지 못하실 터.
이게 내가 믿는 구석이었다.
그렇게 초대받았음을 알리니 아버지는 놀란 눈을 하였고, 어머니는 복잡한 표정을 나타냈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하는 기색은 여전했다.
“그냥 밥 먹는 거니 너무 긴장은 하지 마세요. 음식은 괜찮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해 주시는 것보다는 별로지만, 이게 몸에는 좋아요.”
긴장을 덜어드리고자 어머니의 손을 잡아 드렸다.
“그래. 맛있는 거 먹고 오자.”
그제야 긴장이 조금은 풀리시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시는 어머니를 보며, 나 역시 웃었다.
* * *
에렌성의 건축양식은 아기자기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웅장하면서도 실용성을 추구했다.
그곳에 거주하며 일하는 사람만 백여 명이 넘어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수배는 많았지만, 늘 조용하며 엄숙한 느낌이 있었다.
“변한 게 없구나.”
어머니가 들어오면서 하는 말에 아버지도 작게 고갯짓하셨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니 오늘도 페컴이 우리 가족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에듀 남작님. 그리고 남작부인.”
“형님!”
아버지가 반가운 기색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에듀 남작님. 아니 영주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왜 그러십니까? 그냥 옛날처럼 에듀라 불러 주십시오.”
“나중에 그리 하도록 하지요. 오늘은 공작님의 정식으로 초청을 받아 오셨으니. 예의를 다해 모시도록 하지요.”
“여전하시군요.”
페컴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연한 거지요. 공작님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계십니까?”
“이상하게 허기가 지신다면서, 평소와는 다르게 일찍 내려오셨는데. 준비하라 재촉은 하시는데 식사는 하지 않으시는군요.”
농담 같으면서도, 어쩌면 하는 기대감도 생기는 말이었다. 그렇게 식당에 도착했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할아버지가 보였고,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기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에듀. 공작님께 인사 올립니다.”
“메어리. 공작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모님의 인사에 할아버지는 한마디 하셨을 뿐이다.
“앉아라.”
목소리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인지는 말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당신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좋다더구나. 먹어 봐라.”
할아버지의 식탁은 늘 풍요롭다.
미식가?
그런 게 아닌 오로지 영양분을 섭취를 위한 식탁일 뿐.
그런데 말이다.
‘오늘은 좀.’
뭐지?
뭐가 달라진 점이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식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보양, 특히 마나석 가루의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마물로 만든 요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많으면 서너 가지, 적어도 반드시 마물 요리가 하나가 올라오는데 지금 식탁에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합당한 이유는 어머니를 배려했다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식기 전에 먹는 게 좋다.”
작은 접시에 담긴 이름 모를 요리가 나오자, 할아버지는 정확하게 어머니에게 시선 주며 말했다.
어머니를 위한 배려라는 쐐기를 박는 말 한마디.
“감사합니다. 공작님.”
무슨 재료인지 모르겠지만 약간 비릿한 맛이 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는 맛이다. 하지만 그릇을 깨끗이 비워 내시며 입을 여셨다.
“에렌의 음식은 매우 훌륭한 것 같습니다. 공작님.”
“솜씨가 없는 편은 아니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시녀들에게 이야기하거라. 그날 준비될 것이다.”
여전히 조용한 식탁이지만 그 후에는 화기애애함이 흘렀다.
그렇게 상 위가 정리되고, 디저트가 나올 때 할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크라운에 간다고?”
“네. 폐하가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가 바로 대답을 하자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 우둔한 사람이 또 뭔가를 벌이려는 것 같구나.”
“…….”
“안 가는 게 좋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깨지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황명입니다. 공작님.”
“핑계는 만들어 두었다. 너나 네 안사람이 가서 좋을 게 없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아버지가 물었다.
“여쭤도 됩니까?”
“네가 너무 오래 에렌에 없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디저트로 놓인 작은 케이크 조각을 입에 털듯이 넣었다. 그리고는 케이크의 달콤함을 즐기듯 눈을 감았다.
평상시 직설적인 화법을 쓰던 분이다.
가끔 수하들을 압박할 때 저리 뜸을 들여 말씀하시는 걸 본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새로운 황제는 현재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자 한다.”
……!
“그리고 그걸 내가 반대했지.”
“그러면…….”
“날 쳐 내고 싶어 한다.”
순간 잘못 봤나 싶었다. 아버지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나는 걸 말이다.
“그가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묵직하면서도 공격적인 어투.
무엇보다 ‘그’란 황제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할 터.
분명 위화감이 드는 상황이었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걸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거라는 듯이 편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그 자리에 오르면 다 그렇지. 그 자리에 있으면 뭐든 말 한마디로 다 될 거라 생각하니까. 실제로 그리돼 왔고 말이다.”
“북부가 모든 걸 감당하고 있는 사이에 말이지요.”
“다 그런 거라니까. 내가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 같을 시기. 하지만 뽑혀 줄 생각이 없다. 그러기에는 전대 황제와 해 온 일이 너무 많아.”
“…….”
“그리고 난 내 땅이 전란에 휩싸이는 걸 원하지 않는다.”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아버지의 대답이 마음에 들으셨던 걸까?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도 눈에 보일 정도로 말이다.
“쉬어라.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자꾸나.”
“네. 공작님.”
“집에 왔는데 편하게 부르자꾸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지는구나.”
“네. 아버님.”
그렇게 모든 게 끝나자 우리 가족이 자리에 일어섰을 때였다.
“로라스, 네 녀석은 잠시 남아 나랑 이야기도 좀 더 하고.”
“저야 좋지요.”
그렇게 부모님이 나간 후, 할아버지는 두 눈을 살짝 치켜뜨며 꾸중하듯 말했다.
“고약하게 뭔가 일이 있어야만 올라오는구나. 네놈은.”
“사실 진즉 올라오려고 했습니다. 영지의 규모는 커지는데 제가 할 일이 적어져서요.”
“이제야 영지 구실을 하게 되는가 보지?”
“앉아서 구석구석 다 보시는 분이시잖아요. 들으셨을 텐데요. 락은 이제 와카디아의 지배 세력이라는 거.”
할아버지는 피식하며 답하셨다.
“북부에서도 변방 취급받는 와카디아 하나 먹은 거 가지고 지나치게 거들먹거리는 거 아니냐?”
“할아버지 입장에서야 그깟 하나지만, 아버지와 제 입장에서는 아니지요. 락은 고작 백여 가구의 작은 영지. 그것도 마물의 습격에 전전긍긍하는 곳 아니었습니까?”
“말은 여전히 잘하는구나.”
“사실이니까요.”
“그럼 내가 싸가지가 없다는 것도 잘 알겠구나. 빼먹을 게 있을 때만 에렌에 오고 있으니 말이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안겨 드린 것도 제법 많지 않습니까?”
“쥐뿔! 내가 말 몇 마디면 다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이다.”
“원래 그리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종종 결과가 다른 법이지요.”
“허허. 이제 날 가르치려 하는구나.”
잡담.
할아버지와 하는 대화는 늘 즐거웠다.
물론 선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지만, 조손 관계라는 특별한 관계는 그런 애매한 부분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힘이 상당 부분 있으니 말이다.
“네 어미. 몸이 많이 약하다. 알고 있느냐?”
그리고 가끔 이렇게 뜬금없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화법은 늘 경계해야겠지만 말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았다. 후손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쓸모가 없는 법이니까.”
“제가 있지 않습니까?”
“여하간 네 아비의 짝으로는 합격점을 주지 못했다.”
“이해합니다.”
“네 어미의 출신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가 있는데.”
“그래. 네가 있지. 하지만 당시에는 합격점을 줄 수 없었지.”
“그것 역시 이해합니다.”
“이해한다니 뭘 해야 하는 건지도 알겠구나?”
역시인가?
저 시커먼 속내를 단 한 번도 훤히 보여 주질 않으신다.
“그냥 기분 좋게 아버지와 저를 위해 그랬다고 하시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초대한 것만으로도 모두를 배려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한 요구인 게지.”
“제 몸값을 더 올려야겠군요.”
“말이 통하는구나.”
너무 쉽다 했다.
20년이 넘도록 회복하지 못했던 관계 아니던가. 그런 관계가 너무 쉽게 회복될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아니. 오히려 이런 방법이 더 낫지.’
확실하게 그 대가를 줄 것이니.
“이번엔 제게 요구하실 게 뭡니까?”
이제는 익숙한 협상이라는 걸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