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50)
“흐음, 저 붉은 녀석이 제일 연약해 보여. 그러니 내가 저 녀석을 키우도록 하지.”
연약하기는커녕 가장 팔팔해 보이는 붉은 말을, 아버지는 그렇게 슬쩍 점찍었다.
물론 그걸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내가 저놈을…….”
하지만 그 이후 시그탑이 가장 무난한, 옅은 노란빛의 새끼를 선택하는 순간은 달랐다.
“저놈은 내가. 들어오자마자 나랑 눈이 딱 마주치지 않았지 뭔가.”
브렌드에게 바로 태클이 들어온다.
“자네도 그랬는가? 나도 그랬는데.”
그리고 그런 그의 말을 다시 드리프가 낚아챈다.
“으음, 세 분 모두 다 눈을 마주쳤다 하시니, 안 마주친 제가…….”
거기에 테라까지 참전하니, 금세 공간은 말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숫자는 충분한데, 저리 황색 말을 선택하려는 건 간단하다.
‘정말 무슨 무지개냐고.’
나머지 녀석들의 털 빛깔은 초록, 파란, 자줏빛 등 전혀 평범하지 않은 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튀어도 너무 튀는 녀석들.
아버지가 선택한 녀석이 제일 눈에 띄긴 하지만, 그래도 홍마는 그래도 상식적인 선이고.
여하간 그나마 가장 평범해 보이는 녀석들을 선택하려고 저러는 것이다.
“테라.”
슬쩍 테라를 불렀다.
“네. 주군.”
“저 자줏빛 녀석을 골라.”
“네? 저 녀석은 파란 녀석만큼이나.”
“눈에 뜨인다고?”
“네. 띄어도 너무…….”
“제일 강한 놈이다.”
“…….”
“저놈. 아버님이 선택하신 홍마보다 더 강한 놈이라고. 내가 데리고 있는 검둥이보다 더 강한데?”
테라의 눈빛이 빛난다.
눈에 띄긴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이 시대에서 말. 그것도 명마를 싫어 하는 사내, 무인이 있던가?
재빠르게 다시 돌아가는 테라를 보며 웃으며 생각해야 했다.
‘네가 적응을 빨리해야 검둥이도 맡기지.’
좀 사악한 생각이지만 말이다.
* * *
정신없이 바쁜 하루지만 심적으로는 평온했다.
락은 여전히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고, 사람이 늘어남에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영지 일도 적어지고 있었다.
개천지보와 마법 수련을 병행하는 것도 좋았다.
유역후 시절에는 오로지 강함을 추구하여 기계적으로 수련하는 시간이 길었다면, 이제는 재미가 있어 수련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에르자일과 산맥을 돌아보고 보름 만에 영지로 복귀했을 때였다.
“무슨 일이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에르자일이 입을 열었다.
“어? 저건?”
그리고 몇 대의 마차를 보며 손가락을 올렸다. 시선에 따라가니 마차의 꽂힌 깃발이 먼저 보인다.
‘왜?’
보자마자 드는 생각이 그거였다.
펄럭이는 깃발은 너무나도 유명했다. 심지어는 귀족이 아닌 평민들도 눈에 익은 깃발.
한 마리의 드래곤이 땅을 움켜쥐고 있는 그림.
그건 오베른 제국 황실 문양이었다.
“수도에서 사람이 왔나?”
에르자일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으나, 나는 편하게만 볼 수 없었다.
저 문양의 주인들은 내게 있어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늘 불화를 일으키는 법이니.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소영주님.”
들어가니 드리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초지종을 전했다.
“황제가 직접 말입니까?”
물음에 드리프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겁니다. 주군이 와카디아 지방의 대영주라는 것을 말입니다.”
“…….”
“기쁘지 않으십니까?”
표정이 이상했는지 드리프가 물었고.
“너무 뜬금없지 않나 해서요. 그리고 보통 이런 건 에렌의 공작님께서 임명하지 않으십니까?”
“그만큼 폐하께서 주군을 눈여겨보고 계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보통 이런 일은 베스타인 공작님께 위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직접 수도로 초청하셨으니까요.”
“초청이요?”
“네. 지금 그 일로 논의 중이십니다. 수행할 인원도 뽑아야 하고, 진상해야 할 물건도 준비해야 하니까요.”
드리프는 여전히 흥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의 비슷한 감정을 얼굴에 띄우며 말을 이었다.
“감히 주군을 변방의 귀족이라 무시 못 할 진상품을 준비하려 하고 있습니다.”
“으음…… 아버님은 뭐라 하십니까?”
“아직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폐하가 직접 사람을 보내셨으니 참석하셔야 할 겁니다.”
“아버님을 만나 뵈어야겠습니다. 수도에서 온 손님도 함께 계십니까?”
“아닙니다. 남쪽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추워는 하는데 이곳저곳 둘러보고 싶어 하더군요. 사람을 보내 안내시켰습니다.”
“네. 잘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집무실로 갔다.
“아버님, 로라스입니다.”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가니 아버지는 창가에 서 계셨다. 뭔가 깊은 생각을 할 때는 멍하니 밖을 보는 습관이 있으셨는데, 이번에도 그런 듯했다.
“수도에서 사람이 왔다.”
“오면서 드리프 경에게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각했던 걸 대답했다.
“아버님의 결정하실 문제지만. 저는 굳이 수도로 부르는 이유가 의심스럽습니다.”
“…….”
“북부의 일은 대부분 에렌에서 해결되지 않습니까?”
“역시 너도 부정적이구나.”
아버지도 썩 내켜 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폐하의 친서이니 무시하기가 쉽지가 않구나. 게다가 나뿐만 아니라, 네 어머니와 너도 수도로 오라는구나.”
“어머니와 절 말입니까?”
“그래. 특히 너에게는 남작 작위까지 내리려 하신다더군.”
“작위는…….”
“넌 네 아들이니 결국 물려받겠지만, 따로 이렇게 작위를 내리신다는 건, 너를 눈여겨봤다는 뜻이 되겠지.”
‘대체 왜?’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에렌에서도 와카디아 지역의 대영주가 아버지로 바뀌었다는 화제는 금방 사그라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북부의 일에는 관심이 없던 황제가. 그것도 시간이 지난 지금?
무슨 의도가 있다고 봐야 했다.
문제는 황명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에 있다.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하지만 무슨 의도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여기에 도움을 청하면 할아버지는 정치적 부담을 안아야 했다. 뭣보다 황제의 명령은 할아버지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군요.”
“너는 안 가도 된다. 내겐 아들이 너밖에 없으니까.”
애정과 신뢰가 담은 아버지의 눈빛을 보면 그럴 수는 없다.
‘안심이 되질 않아!’
뭔 일이 있을 줄 알고 외지에 아버님과 어머님을 보낸단 말인가.
곁에 계셔야 내가 안심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트집 잡힐 일은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도 궁금은 했습니다. 수도는 어떤 곳인지.”
“그럼 영지가 빈다.”
“적이 없지 않습니까? 또 하늘 산맥은 샤이한 일족이 있으니까요. 더 특별한 일 없이 현재 시스템으로 계속 돌아만 가면 됩니다. 군은 기사들에게 맡기면 되고요.”
어느 정도 안심이 됐지만, 속이 편치는 않으신 것 같다.
“흐음, 괜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일단 가는 준비는 제가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하겠느냐?”
“네. 아버님은 나중에라도 문제 생기지 않게, 큰 사안만 미리 사람들에게 당부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꾸나.”
* * *
준비할 건 많았다.
거기에 결정할 것도 많았다.
우리 일가가 돌아올 때까지는 락의 결정권자가 없다면 큰 문제가 되기에, 각 분야 담당자들에게 권한을 최대한 실어 주는 쪽으로 갔다.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차피 외적은 없고, 내부에는 아버님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곳이니까.
내가 신경 쓸 건 부모님 두 분의 안전 문제였다.
아버님이야 크게 문제가 없어도,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겼을 경우 어머님을 호위하는 건 특히 신경 써야 할 문제.
“제가 같이 가야 합니다.”
“통솔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영지의 치안과 군의 일은 브렌드와 시그탑. 두 기사가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함께 가길 원했다. 그리고 내 선택은 간단했다.
어느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두 분 다 안 됩니다. 치안과 만에 하나 일에 대비하려면 두 분은 반드시 락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급한 일은 락의 최고 관리자로서 결정해야 할 테니까요.”
“어차피 영지 일은 드리프도 있습니다.”
“토니는 군을 통솔하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두 사람이 그리 말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드리프는 확실히 영지 일을 총괄할 수 있고, 토니 역시 군을 통솔할 수 있다. 하지만 시그탑은 최고의 실력을 지녔고, 브렌드는 전략 전술을 짤 수 있는 지휘관이었다.
두 사람이 있어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누굴 데려가려 하십니까?”
“많이 데려가지는 않을 겁니다. 테라와 엔케이의 부대. 그리고 에르자일을 데려갈 겁니다.”
시그탑의 물음에 그리 대답하자, 둘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는 개인 무력은 락에서 열 손에 꼽혔고, 엔케이 부대는 용병단들이라 임기응변에 강하다. 게다가 에르자일은 두말할 것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전력.
‘게다가 테라는 영지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고, 에르자일은 타 영지 간의 전투에 나서기가 까다롭지. 그럴 바에는 함께하면서 혹시 모를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는 게 나을 터.’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어머니와 매우 친숙한 사람들이니, 호위에 문제가 없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사람씩 만나기 시작했다.
일단 토니에게는 무법자 지역의 놈들을 단단히 단속하라 일렀다.
오리시암이 눈치가 빠르고, 제 분수를, 아니 지나친 염려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마적과 산적들이다.
근래 호송사업을 하면서 많이 그 본성들이 죽었다 하나, 경계는 해야 했다.
상업 같은 경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아버지가 계실 때도 렘이 모든 걸 진행해 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고, 마침내 떠나는 날이 되었다.
늘 그렇듯 청명한 아침.
“이것 좀 도와주겠느냐?”
“네.”
겉옷 안쪽에 입는, 얇은 가죽 갑옷 착용을 도왔다.
이 가죽 갑옷은 겉보기와는 달리 나름 방어력이 괜찮다.
콘트라 불리는 마물의 가죽으로, 일반 가죽 갑옷과는 달리 그 무게나 부피가 작았다.
물론 석궁의 볼트를 막을 정도는 아니지만, 심장 부근과 옆구리 쪽으로 서너 장의 가죽을 덧대어 한 번에 죽는 일은 없게 만든 옷이다.
여하간 그런 갑옷이라 혼자도 수월하게 입을 수 있었지만, 굳이 날 이런 일로 부르셨다는 건 따로 할 말이 있으시다는 뜻일 터.
묻지 않았다. 그저 옆구리의 가죽끈을 조이며 기다렸을 뿐.
“저것 좀 가져다주겠느냐.”
겉옷을 입으며 하는 말씀에 시선을 돌리니, 검 한 자루가 놓여 있다.
오델리움으로 만든 검.
할아버지가 나를 통해 아버지에게 전한 검.
오델리움 자체가 마나를 흡수하는 효과가 있어, 마법검이라고 해도 좋을 놈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저 검을 찬 적이 없으시다. 정확히는 어머니에게 보이려 하지 않으셨다.
남들은 복잡한 가족사라 이야기할지 모르나, 이건 굉장히 단순한 문제였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할아버지도.
권력의 정점에 선 할아버지. 그리고 그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아버지.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어머니 때문에 깨진 것이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잘못이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다.
애증(愛憎)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수도로 가려면 에렌을 통과해야 할 텐데……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겠지.”
한없이 무거운 아버지의 목소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두 사람의 관계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닐 터이니.
“가자.”
검을 받은 아버지가 말했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