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49)
“그건 좀 의외이군요.”
중년 사내는 뺨을 타고 내려온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귀 위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큰형님의 기분이 그리 안 좋았던 거군요.”
“대공자께서 큰 타격을 입으셨으니까요. 재물도 재물이거니와 무엇보다 명성에 큰 금이 간 거 아니겠습니까?”
“둘째 형님의 환호성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카르이샤 님. 기회입니다. 흔들리는 대공자파의 세력을 어느 정도 흡수하셔야 합니다.”
라르자 백작의 말에 중년 사내는 씩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에렌의 후계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공자님은 각하께서 인정하신 후계 후보 중 한 분이십니다. 욕심을 내셔야 합니다.”
라르자 백작은 마치 전장에 나가기 직전의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이 라르자! 에렌의 주인으로 카르이샤 님 이상의 인물이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사실 제 말이 크게 틀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공자는 우둔하고, 이공자는 흉포합니다. 사람을 잘 끌어들이시고, 결단이 필요할 땐…….”
“라르자 백작.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큰일 납니다. 게다가 큰아버님이 건재하시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곤란하지요.”
내용은 상냥하나 그 어투는 무거웠다.
라르자는 입을 다물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었다.
세 명의 후계자 중 카르이샤의 세가 제일 약하긴 하지만, 그 당사자의 인품,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세를 불려야 한다!’
카르이샤 공작 측에서는 그나마 자신이 영향력이 있는 귀족이다. 자신이 늘려야 한다.
‘락이라…….’
사교계에 드문드문 나오는 그 이름.
그래 봤자 북부 변방일 뿐이지만, ‘에듀’라는 이름과 그 성장세를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변방 귀족들의 세를 규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라르자는 다시 한 번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 *
이름 따윈 몰랐다.
보통 마물들이 가지고 있는 뿔들이 이마에 있는 것 대신, 코 쪽에 뿔이 두 개나 붙어 있어 그냥 코쟁이라 이름 붙였다.
사실 저놈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마물들의 이름을 몰랐다.
‘고작 이틀 거리일 뿐인데.’
기존 노멀존과 토벌로를 벗어났다고 생전 처음 보는 마물들이 이리 많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래도 저놈은 쉬운 녀석이다.
커다란 소와 같은 체격을 가지고 있으나, 지능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세 번이나 성공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굳이 놈을 테이밍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통 혼자 다니지 않았나?’
하지만 이번 코쟁이는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정확히 다섯 마리.
보통 타깃을 정해서 동시 테이밍을 했지만, 무리를 지어 연습한 적은 없기에 그냥 시도해 보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지이이이잉.”
코쟁이들이 움직이는 쪽으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지이이이이이잉!”
그리고 그 소리는 코쟁이들이 나아가면서 더 심하게 들렸다.
육중한 놈들의 덩치에 가려져 있어 뭐인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다른 마물의 새끼가 지르는 비명일 터.
기왕이면 마물의 숫자라도 줄까 싶어서 잠시 지켜볼까 했지만.
‘마물 따위가 식육하는 걸 기다려 주는 것도 웃기니까.’
“끼이이이이이잉!”
그리고 동시에 마물 새끼의 비명이 귀에 무척이나 거슬렸다.
“내가 해!”
에르자일도 비명이 거슬렸는지 지팡이를 들려는 걸, 손으로 제지하고 커터를 드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이잉!”
크게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비명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들렸던 비명과 같은 소리지만, 이번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절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쿠우우우웅!
검은 덩어리가 맹렬하게 코쟁이 놈 중 제일 큰 놈의 몸통을 박았고.
‘뭐야? 웬 말?’
난 그 정체를 보며 신기해했다.
“지이이이잉!”
“푸르르륵!”
코쟁이들을 상대로 앞발을 들어 올리고, 뒷발을 내지르며, 기회가 있을 때 머리로 놈들의 몸통을 박는 검은 물체는 분명 말인데……가 아니라, 말처럼 생긴 마물이다.
중지만 한 길이의 이빨이 마치 톱날처럼 날카로운 말이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었으니까.
“쿠에에엑!”
게다가 꽤나 단단한 듯 단숨에 코쟁이의 살점을 뜯었다.
두 종족 간의 다툼은 매우 흥미로웠다. 아쉬운 게 있다면.
“지잉! 지잉!”
코쟁이는 다수이고, 말은 검둥이 한 놈뿐이라는 것이었다.
초반에는 기세 좋게 날뛰었던 검둥이의 기세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에 반면 동료를 잃은 네 마리의 코쟁이들은 점점 흥분 상태로 들어갔고 말이다. 그리고 뭔 손을 쓸 새도 없이 뒷다리가 제대로 코쟁이의 뿔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말이잖아. 저런 놈 한 마리 있으면…….”
저런 놈을 부리면 꽤나 모양새가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더 늦기 전에 마법을 사용했다.
투명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질감이 코쟁이들을 향해 내려앉았다.
놈들이 마나의 영향에 행동이 둔해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런.’
피를 잔뜩 흘리던 검둥이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코쟁이들을 공격했다.
마법은 금방 풀리고 다시 공격받기 시작했다.
모성애…… 그건 인간과 동물 그리고 마물들도 가지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마법 연습보다는 순수하게 도와줄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놈들에게 다가갔다.
코쟁이들을 단숨에 베어 낸 후 검둥이를 봤다.
“지이이잉!”
확실히 말의 모습에 저 이빨은 좀 적응이 안 됐다.
경계하는 놈을 보며 말했다.
“안 잡는다.”
그냥 한 말이었지만 의외의 그걸 알아들었나 보다. 이빨을 감추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이놈 보게?’
지능. 그것도 사람의 기세를 읽을 만한 지능이 있다는 거로 봐야 했다.
“지이잉! 지이잉!”
어느새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돌리는 놈. 거기에는…….
‘뭐야? 웬 알이냐?’
마치 새 둥지처럼 꾸며진 공간에 커다란 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 한 개는 이미 부화화여 애처로운 소리를 내는 새끼로 보였다.
검둥이는 그런 새끼를 혀로 핥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안 좋았다.
놈은 이미 옆구리에 내장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곧 죽을 것이다.
멍하니 지켜 보고 있는데 놈이 갑자기 날 봤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리고 울음소리를 내다가, 다시 새끼와 알을 보고, 다시 나를 쳐다보기를 반복한다.
그 움직임, 눈빛,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안 죽여.”
알아듣길 바란다.
“최소한 딴 놈들에게 죽지는 않을 거다.”
“지이이이이잉!”
알아들었다는 듯이 긴 울음소리를 내는 검둥이. 고개까지 위아래로 흔드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놈은 이미 내게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놈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검둥이는 흠칫 몸을 떨었지만,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라. 네 새끼들 걱정은 하지 말고.”
“지이이이이이이잉. 지이이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지이잉.”
울음소리가 점점 짧아지더니 어느새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더 이상 움직임은 없었다.
마물 따위에게 감정을 품을지는 몰랐는데 말이다.
“이놈들 따뜻하게 하면 되려나?”
에르자일은 대답 대신 지팡이를 휘둘렀고, 은은한 열기가 주변을 감쌌다.
테이밍하려고 왔다가…… 뭔가를 키우게 될지는 몰랐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알을 품에 넣고.
“지이이잉!”
새끼를 안고 내려왔다.
* * *
“지이잉!”
“아프다!”
새끼 주제에, 마물이라 그런지 이빨은 나 있었다. 그리고 이놈.
“아프다니까!”
잘 문다.
젖을 찾는 모양인데.
“그러니까 작작 좀 물어뜯어야지.”
이놈 먹이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이빨이 있으니 혹시 해서 고기를 줘 봤지만 먹지를 않는다. 젖을 먹여야 하는데 저놈 이빨이 문제다.
녀석에게 말의 젖을 물렸다가 골로 갈 뻔했다. 젖을 이빨로 무는데 누가 당해 내겠는가.
결국엔 직접 손바닥을 통해서 젖을 흘려보내다시피 해서 먹이는 중이다.
남을 시킬 수도 없다.
일반인이 그렇게 했다가는 손가락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의문이다.
“너 언제 젖 떼는 거냐? 그걸 알아야 네 동생들 먹일 계획을 세우지.”
이 녀석을 제외하고는 알들은 모두 부화하지 않았다. 에르자일이 마탑에서 관리 중인데 조만간 부화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평생 젖만 먹진 않지?”
그리고 젖을 떼면 뭘 먹는지 모른다.
이빨이 날카롭다 하나, 질긴 풀 같은 걸 먹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고기 먹어도 큰일이지. 네 먹이를 어찌 감당하냐?”
“지이잉.”
“깨물지 말래도.”
뒤통수를 톡 치니 다시 한 번 애처로운 울음을 낸다. 그러면서도 곁에 꼭 붙어 있는데 사람 온기를 좋아한다.
“그래도 막 물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너 여기서 못 키운다.”
먹일 때를 빼고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나름 귀여운 맛도 있어서 자기가 먹여 보겠다고 나서는 지원자들도 있다.
수갑(手甲)을 차고 먹여야 한다는 말에, 모두 물러났지만 말이다.
“너는 어떻게 해도 네 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화하지 않은 알은 총 여섯 개다.
이놈 밥 먹이는 데만 하루 두 시간 이상을 쓰는데, 다른 놈들까지 먹이려면 일과 대부분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분양밖에 답이 없다.’
이놈의 이빨에 겁을 내지 않고, 키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놈을 정말 말처럼 키울 수 있다면.’
잠시 생각해 봤다.
‘아버님과 세 명의 기사들. 그리고 테라. 나머지 하나는 토니에게 주고, 감당 안 되면 에르자일이 있으니까.’
사람도 여섯. 알도 여섯 개. 공교롭게도 딱 맞다.
“검둥이. 넌 내 거고. 밥값은 해야 한다.”
녀석은 제 어미를 닮아 시커먼 색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알에서는 어떤 색을 가지고 나올지 모르겠다.
기왕이면 구분할 수 있는 색이면 좋겠는데 말이다.
“소영주님!”
그때 밖에서 하인의 날 찾았고.
“마탑주께서 찾으십니다. 알이 곧 깨어날 것 같다고.”
“그래?”
기대된다. 이 녀석의 동생은 어떤 놈들일지.
“드리프, 시그탑, 브렌드 경에게 마탑에 오시라 전해.”
하인에게 그리 전하고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처음 검둥이를 봤을 때 관심을 보이셨으니, 흥미를 가지실 거다.
곧 다른 알들이 부활한다는 말에 아버지는 예상대로 관심을 보이셨고, 계획을 말씀드렸다.
“말(馬)처럼 말이냐?”
“네.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새끼이니 굳이 테이밍을 거는 것보다 곁에 두시고 관심을 가지시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봅니다. 검둥이가 인간을 따르기도 하니까요.”
“가자. 보니 제대로 크기만 하면 훌륭한 전마가 될 것 같던데. 정 안 되면 경비견처럼 키워도 나쁘지 않을 것이고.”
흥미를 넘어 이미 내가 생각한 것 그 이상을 생각하셨나 보다. 하긴 말이 안 되면 경비견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 그리고 다른 기사들도 합류하여 마탑으로 향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이하였고, 에르자일의 연구실로 안내했다.
“나온다! 나와!”
들어가자마자 그녀가 흥분에 찬 외침이 들렸고, 우리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시야에 작은 개 크기의 말이 알을 깨고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왜 알록달록이야?’
제 어미도 그렇고, 먼저 깨어난 녀석도 멋진 검은색인데, 놈들은 아니었다.
‘무지개냐?’
알을 깨고 나와 지잉지잉거리는 녀석들 중 같은 색을 지닌 녀석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단 한 놈도 같은 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