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46화 (146/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46)

정말 별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 한 명의 마법사와 두 명의 무인에게, 당시의 용병단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그 경험담에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그때 죽어야 했다는 둥, 실력이 없어서라는 식으로 놀리는 순간이었다.

“번천 경!”

콧수염이 자신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번천을 보며 깜짝 놀랐다.

“거기. 거기가 어디였지?”

그리고 번천에게서 전해지는 살기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번천 경!”

그 탓에 당사자인 콧수염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기겁하며 뒤로 몸을 움직였다. 급하여 의자에 앉은 채로 뒤로 넘어간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휴우!”

번천은 길게 숨을 쉼으로 살기를 지웠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흥분해서.”

“그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흥분을 왜…….”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군요.”

번천은 솔직하게 사과하며 말했다.

“그 마법사. 전신에서 불이 나왔다고 하던데…… 혹시 얼굴에 긴 자상이 있지 않았습니까?”

“워낙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는데. 왼쪽 뺨 아래쪽으로 상처가 있는 건 봤습니다.”

콧수염의 대답에 번천은 다시 한 번 몸에 힘을 주었다. 아니, 절로 그리 들어갔다.

‘질라일! 드디어 네 놈의 소식을 듣는구나!’

전신을 마나의 불꽃을 띄우는 마법사는 적다. 그 적은 마법사중 얼굴에 긴 자상까지 입은 이는 몇이나 될까?

마침내 소식을 들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지 못하는 원수.

질라일의 소식을.

번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 *

고민했다.

번천을 보낼지, 아니면 곁에 둘지.

양쪽 다 장단점이 있었다.

어떤 결정이든 번천이라면 두말없이 따랐을 것이다. 그만큼 날 믿었으니까.

그런 번천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보내기로 결정한 건 그의 눈 때문이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저 눈과 절로 풍겨 나오는 그 기세.

안다. 너무 잘 안다.

나도 저랬던 적이 있었으니까.

“소식은 꼭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떠한 상황이라도 생존이 가장 우선이다. 살아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지만,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번천은 작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한 결정 같았다.

속이 이미 시끄러우니, 곁에 뒀어도 긴 시간 마음을 잡지 못했을 테니까.

품에 손을 넣어 최상급 마나석을 잡았다.

근래 새로운 마법을 공부하기 위해 구해 둔 것이다. 그것을 건네며 말했다.

그에게 최상급 마나석 하나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주군.”

사양하는 번천의 품에 억지로 넣었다.

“최악의 경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받아 둬.”

“감사합니다. 주군.”

“너무 헤매지도 마라. 뭔가 혼란스러우면 하나만 생각해라. 넌 락의. 그리고 내 기사다.”

고개 숙인 번천을 보며 다시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난 약속했었다. 네 일이 내 일이고, 네 원수가 내 원수라고. 모험하지 말고 날 이용해라.”

“주군…….”

“새로운 세상에 나가려는 네게 너무 감상적인 이야기를 했구나. 가라. 언제든 돌아오길 기다리겠다.”

“추우우웅!”

번천이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힘겹게 몸을 돌렸다.

그의 등을 보며 바랐다.

그에게 온갖 축복이 있기만을.

* * *

락은 활기찼다.

급격한 개발과 인구 유입을 인해 마을 전체가 중심지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면 영주관에서 마을의 입구까지 이어진 대로.

이 중앙대로가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대로로 몰려들었다. 특별히 상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 길가에서 장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내가 먼저 왔다고!”

“뭔 소리야! 저거 짐 안 보여? 꼭두새벽부터 나와서 잡은 자리란 말이지.”

“그럼 지키고 있어야지. 난 그럼 밤에 신발 한 짝 놓고 가면 되겠네?”

그 탓에 여기저기서 자리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지만,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사람이 지키고 있어야지.”

“얀델. 근래 돈 좀 벌었잖아.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고. 그건 영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원주민을 위해서 고정 자리 몇 개도 주셨는데. 순서 기다려도 되잖아. 너는.”

고성이 일어나는 경우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양쪽의 편을 들어 주며 중재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개소리요!”

물론 가끔 그런 중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100퍼센트 락에 최근 들어오는 사람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났지만 락의 어떤 곳인지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뿐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락의 자경단 선에서 다 정리되었다.

지역에서 난다긴다하는 용병단원들도 락의 자경단만 보면 한 걸음 물러나는 데 힘 좀 쓰는 일반인 정도야.

그래서 다른 곳은 몰라도 진짜 락. 원래 락인 이 지역에서는 흑사회 같은 파락호들은 발도 못 붙였다.

그리고 이런 락을 만드는 데 상당한 지분이 있는 에르자일은 그 날도 아침부터 이 대로변을 걸었다.

‘흐으음!’

하늘 산맥에서 내려오는 기분 좋은 대기에 에르자일은 크게 심호흡하며 미소를 지었다.

좋았다. 모든 게 좋았다.

특히나 후드를 쓰고 다니지 않는 게 제일 좋았다.

바람에 자신의 머리카락과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은 여기 아니면 좀처럼 즐길 수 없었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은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할 수 있었다.

귀족이랍시고,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접근하는 애송이들은 이곳 락에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에르자일. 여기! 여기! 오늘 좋은 물건 들어왔어.”

한 중년 부인이 손짓하며 에르자일을 불렀다.

“이 여편네가 미쳤나! 마법사님의 이름을 그리 함부로 불러서는 어떡해.”

“뭐가 어때! 네 동생같이 예뻐서 그러는데.”

“얼씨구. 처제가 마법사님의 반의반의 반만 됐어도…….”

남편의 묘한 시선에 중년 부인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반만 됐어도! 뭐?”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뭐 모르면 말고.”

그렇게 중년 부부의 투덕거리는 걸 보며 에르자일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 중년 부인에게 갔다면 그녀의 가판대에서 파는 사과 하나를 공짜로 받을 수 있었으리라.

사과 하나 대가 없이 받아서 기쁜 게 아니다. 그런 그녀의 호의가 기쁠 뿐이다.

이미 마탑의 시험은 끝났다.

토벌전은 물론이고, 전장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영향력까지 끼쳤다.

경험 부족으로 바보처럼 당할 위험은 없다.

이미 에렌으로 돌아오라는 헤르메스의 호출도 있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며 버티고 있는 건 이런 락이 좋아서였다.

에렌에서는 누군가의 호의는 반드시 경계해야 했지만, 락은 그렇지 않았다. 호의를 호의로. 배려를 배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人間)이라는 본질을 자신도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보면 됐다.

‘그런데도…….’

생각은 한 사내에게 옮겨 갔다.

로라스.

누구는 어떻게든 자신을 보고, 한마디 말이라도 걸기 위해 그렇게 노력을 하는 이 사내는 그런 게 없었다.

―제법 예쁘장한 거지.

자신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그 정도였고.

―사저지.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우는 여자 선배.

관계는 그 정도로 선을 그어 버렸다.

‘제법이라…….’

모른 체했지만 자신도 알 건 안다.

대체 어디가 그리 예쁜 건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남들이 봤을 때 자신은 매우 예쁜 걸 말이다.

그런데 로라스는 소 닭 보듯이…….

‘거기까지는 아니지만.’

여하간 남 대하듯, 아니 가족 대하듯이 대한다.

‘아니지. 가족을 원하는 건 또 맞지. 하지만 가족이 어디 혈육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에르자일은 순간 얼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창피하니 화가 났다.

‘어머니 때문에 그런 거야!’

그리고 정말 엄마 같은 메어리 때문이라며 자기합리화했다.

“뭐 하냐?”

그리고 그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에르자일은 고개를 홱 돌렸다.

“뭐 해?”

거기에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 로라스가 있었다.

* * *

하늘 산맥에 올랐다.

‘대체 어떻게 된 곳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하늘 산맥은 노련한 패스파인더(길잡이)도 길을 잃기 일쑤다. 간신히 돌아오는 것만

‘뭔 지형이 한 달이 멀다고 바뀌니.’

어제 있었던 길이, 오늘 사라지고, 내일 다른 길이 보이는 곳이다.

그뿐인가?

뭔 나무들과 풀들이 그리 잘 자라는지, 올해 토벌전 때 본 수목들은 내년에 보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장작도 팔 수가 있다면 자재 걱정은 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 생각했을 때 뒤에 따라오던 에르자일이 물었다.

“굳이 여기에서 할 이유가 있을까?”

“좋잖아. 토벌도 하고, 돈도 벌고, 연습도 하고. 한 번 움직이면 이리 많은 이득이 있는데.”

“가끔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하나만 집중해도 모자를 판에. 그리 많은 걸 생각하고 연습을 어찌해.”

“가난한 영주집 장자의 비애라고 생각해. 그리고 실전도 경험할 수 있으니 좋잖아.”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실전이라 할 수는 없지. 너나 내 수준에서라면.”

“일단은 노멀존에서 시작하지만, 적응되면 점차 안으로 들어갈 거야.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지. 방심하다가는 너라고 해도 골로 간다.”

“퍽이나.”

에르자일의 대꾸가 요새는 제법 재미있어진다.

예전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였고, 그 덕분인지, 탓인지 호불호가 너무나도 확실했는데, 지금은 제법 보통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에렌에서 마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야.’

좋은 변화라 생각됐다.

보통 사람들은 마탑의 마법사라면 모두 두려워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녀는 사랑받는 존재다.

거리감 없이 다가가는 사람들.

‘하긴. 예쁘게 잘 웃어 주지. 뭐 하나 살 때 에누리 같은 것 없이 돈 펑펑 써 주지.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마법도 써 주지.’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녁에 사람들을 위해서 라이트 마법으로 가게를 밝혀 주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거기다 겨울 초입인 지금은 며칠간 지속되는 마정석을 이용한 화로까지 만들어 주기도 했다.

락의 주민들이 알지 모르겠다.

에렌에서 저런 마법 화로가 얼마나 돈이 되는지. 그리고 그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손이 가는지 말이다.

여하간 그런 이유로 에르자일은 락의 인기인 중 한 명인데.

“뭐냐? 그 눈빛은?”

“뭐가?”

“불만이 가득한 것 같은데?”

“그런 거 없어.”

분명 불만 가득한 눈빛인데 말이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 좀 챙겨 드려.”

“어머니가 왜?”

“요새 네 얼굴 보기가 힘들다 하시던데.”

“이번 거 잘 마무리되면 옆에 있어야지.”

“선후 구분을 잘 해야지.”

그건 에르자일 말이 맞는다. 변명할 수 없는 사실.

‘다 두 분을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선후가 바뀐 것 같다.

주의를 계속했음에도 자꾸 잊는 사실이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이것만 끝나면 여유가 생기니까.”

“과연 그럴까?”

“두고 봐. 사실이니까. 할 거 없다고 널 귀찮게 할지도 모를걸.”

“안 귀찮아.”

얼굴은 왜 붉어지는지 모르겠다.

‘이 녀석 정말…….’

내가 두루두루 폭넓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쪽으로는 전무하다. 그래도 아주 눈치는 없지 않은데 말이다.

‘어머니 때문이 아니었어?’

그녀도 나름대로 목적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이 침묵은 뭐냐?’

갑자기 대화가 끊어지니 더 어색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에르자일!”

“응?”

“숙여!”

그리고 그대로 커터를 휘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