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45)
“아! 세상이 돈다.”
미친놈처럼 바닥에 주저앉다 못해, 수영이라도 하는 듯이 전신을 비비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버틴 게 용하다!”
영주관에서 일하던 이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에도, 번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격렬하게 바닥을 비볐다.
오늘 하루쯤은 미친놈으로 오해받아도 좋았다.
정말 미칠 것 같은 그 시간을 잘 버티지 않았느냔 말이다. 스스로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아아!”
번천은 숨을 크게 토하고는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땅 냄새였지.’
원앙을 움직이는 배의 선원들이 땅의 감사함에 의식을 치른다는데, 번천이 딱 그 모양이었다.
“으으으.”
그러다 신음을 내며 몸을 부르르 떠는 번천.
상상해 버렸다.
이 행복한 순간에 바로 어제까지 겪었던 일을 말이다. 그 탓에 급격히 컨디션이 저하됐다.
석 달 동안 폐관수련이나 다름없었던 훈련.
예전 로라스와 지하실에 들어가 폐관을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힘들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로라스에게 가르침을 받고, 또 그것을 익히는 과정. 그야말로 매시간 강해지는 느낌에 자신감도 날로 늘어났다.
건방지게도 어쩌면 주군인 로라스와도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감은 딱 한 달 만에 깨졌다. 그 후 두 달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분명 강해졌는데. 포스라는 것에, 또 마나라는 본질에 접근할수록 두려웠다.
정신적인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육체적으로도 문제가 생겼다.
감각.
분명 마탑의 창에 햇볕의 따스함을 느끼면서도, 몸에서 전해지는 촉각은 또 달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설명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마치 물속에 잠겨 숨을 헐떡였고, 불 속에 들어가 전신이 타는 듯했으며, 또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몸이 허공으로 붕 뜬 기분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마탑에서 나오자마자 주군을 따르지도 않고, 이리 바닥에 뒹굴고 있겠는가?
정말 나왔을 때는 땅을 밟고 있는 이 감각이 기뻐 눈물까지 날 뻔했다.
‘살아 나왔으니 된 거지!’
게다가 악몽 두 달이라는 시간의 대가로 자신은 더 강해졌다.
이건 실험해 보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이다.
번천은 누운 채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나하나 모아!”
그리고 작게 중얼거리며 손목을 흔드는 순간, 그의 손 중심으로 옅은 안개 같은 기운이 모였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조급해할 필요도, 이루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 없었다.
일생의 원수!
반드시 죽여야 할 그놈!
번천은 그놈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쏴아아아아!
계절은 어느새 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네.’
노란 들판을 보니 절로 미소가 어렸다.
물론 풍족한 편은 아니다. 그만큼 땅도, 인구도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최소 락이란 이름이 지배하고 있는 땅에서는 배곯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나오셨습니까!”
렘이다.
“여기 와 있었나?”
“와야지요. 추수는 제가 관리해야 할 일인데요.”
“다른 일도 바쁘지 않아? 아직 추수하려면 이레는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렘은 살짝 창피한 듯해하면서 말했다.
“추수 때 뒷주머니를 챙기는 놈이 제일 많아서 말입니다.”
“부피가 커서 힘들지 않겠어?”
“부피가 커서 한눈에 물량 파악이 쉽지 않으니까요. 또 곡식이 가장 빠르게 현금화를 시킬 수 있어서, 처리도 금방입니다.”
“일이 많네. 나중에 크게 보답할 일이 있을 거야.”
영지가 클수록 렘의 일은 가중된다. 자기 사업과 동시에 락의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누구나 잡고 싶어 하는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그리고 보고는 받으셨지요?”
무슨 일인가 싶어 반문했다.
“어떤?”
“호송 사업 말입니다.”
“아! 수익이 의외로 잘 나오던데?”
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작년만 해도 의미 없는 금액이지만 올해는 나름 의미 있는 숫자더군요. 오리시암 길드장도 그렇지만, 엔케이 대장의 영업 능력도 상당합니다.”
“오리시암은 감이 좋고, 엔케이는 원래 용병대를 이끌던 사람이니. 숫자에 민감해할 테니까. 그런 사람이라 네게 붙인 것이고.”
“네. 뭔 말만 하면 잘 알아듣더군요. 왜 따로 정규군으로 편성하지 않으셨는지 이해했습니다.”
“손발이 잘 맞으면 된 거고. 그런데 그 수익은 왜?”
“저번에 말씀하신 거 잊지 않으십니까. 아카데미.”
“아직은 돈 뺄 곳이…… 수익의 의미를 찾더니 그 때문인 건가?”
렘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시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급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소영주님께서 원하시는 전 분야는 힘들지만. 한두 개는 가능할 듯합니다. 그래서 어느 분야를 먼저 시작할지 여쭈려고 합니다.”
“아버님에게 먼저 말씀드려야지.”
“여쭸는데 소영주님과 상의하라 말씀하시더군요. 영주님은 이거 이외에도 신경 쓰실 게 많지 않으십니까?”
“많이 바쁘신가?”
“네. 정신없으십니다. 계속 영지와 영지를 오가고 계십니다.”
렘의 말을 들으며 살짝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락의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아버님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영지를 발전시켰다.
‘예상보다는 커진 건 사실이지만…… 내가 진즉 이렇게 되리라 생각했어야 했는데…….’
조금 더 편한 삶을 추구하고자 한 건데, 그것 때문에 이리 여유가 없을 정도라면 잘못된 거다.
‘어머님도 바쁘게 되셨으니…….’
재정과는 별개로 영지의 안주인인 어머님도 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실권은 거의 없어졌지만 각 영지의 영주들. 그 부인들과 영지의 균형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셔야 했고, 빠르게 발전해 가면서 나타나는 부작용.
그 부작용에 주민들의 억울한 일도 나서서 처리하고 계시고 있으셨다.
‘나도…… 도통 ‘적당히’란 걸 모르니.’
행복하면서도 평범한 삶이란 걸 꿈꿨는데,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이었다.
뭐. 이제 그런 일은 천천히 바로잡으면 될 테고.
“일단은 특정 분야를 발전시키는 것보다는 기본적인 지식을 전수하는 아카데미부터 만들기로 하지.”
“기본적인 지식이라 하시면…….”
“아이들을 위해서 적성을 찾을 수 있도록 여러 분야 조금씩 가르치는 아카데미가 어떨까 싶은데.”
렘은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했다.
“분명 그 부분도 필요하지만…… 당장은 부족한 대장장이와 건설 분야의 전문가를 키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두 분야 모두 일 이년 내로 키울 수 없는 분야라…….”
“네 말도 일리는 있지만, 이쪽이 먼저 아닐까? 기술자들은 숫자는 적지만 그래도 꾸준히 유입되고 있잖아. 하지만 아이들 교육은 기반을 잡아 놔야 해.”
유입되는 인구의 증가율은 낮아지고 있다. 하지만 인구는 여전히 많다.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고, 기초적인 의료를 지원하니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엄청 늘고 있었다.
반면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은 전무한 상태다.
아카데미 초기에는 시행착오도 많을 텐데. 미리 준비해 놔야 했다.
렘에게 계속 말했다.
“아이들을 계속 태어나고 자랄 텐데, 그것부터 자리 잡자. 그 아이들이 커서 적성에 맞는 기술을 다시 배우면 되는 거니까.”
“네. 그럼.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소영주님.”
“응. 또 무슨 일이 있나?”
“그게 오리시암 말입니다.”
“오리시암이 왜?”
“계속 그쪽에만 두실 건지…….”
“질문이 뭐 그래? 왜? 무슨 불만이라도 있다고 하나?”
“그런 게 아니라…….”
렘이 입을 열었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마디 조언을 던졌다.
“이용당하지 마.”
“네? 그게 무슨?”
“렘, 오리시암이 술에 취해 제 생각을 흘린 게 아니야. 취중진담은 그놈에게는 해당 안 되니까. 그 빠꼼이가 어떻게든 제 의도를 전하기 위해서 널 이용한 것뿐.”
“…….”
“놈답다. 여하간 제 뜻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으니.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놈을 상대할 때는 상인으로서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 네 주머니도 털어 갈지 모르는 놈이야.”
“네.”
“여하간 오리시암이 양지로 나오고 싶어 한다는 건 알았으니 생각해 보지. 그대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만 집중해 줘.”
“네. 알겠습니다.”
렘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보며 생각했다.
‘양지라…….’
놈의 밑에 있는 놈들만이 아니라, 그 자신도 그쪽을 희망하고 있었던 듯했다. 번천과 테라, 토니를 기사로 임명할 때 녀석의 표정이 기억났다.
‘부러워하는 눈치긴 했지.’
알았으니 됐다.
오리시암 정도면 수족으로 쓸만한 놈이다.
‘알아볼 때도 됐군.’
놈이 어떻게 무법지대까지 흘러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산적 놈들의 두목이 되었는지 말이다.
‘필요하긴 하잖아.’
사실 수족으로서 100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테라와 번천. 그리고 토니까지다.
그중 토니가 일을 맡기기 제일 좋았지만, 나이도 있는데다 이미 맡고 있는 일도 많았다. 반면 테라와 번천은 무력은 강하지만, 어떠한 일에 쓰기에는 생각할 게 많다.
‘그나마 테라는 락 내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락에 태어났고, 자란 그는 락 안에서는 시킬 일이 많았다. 문제는 번천이다.
쓰려면 쓸 곳은 많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을 생각하면 좀 아쉬운 일들.
그나마 에르자일이 번천을 편안하게 생각해서, 그녀의 일을 많이 돕고 있는 편이다.
‘으음!’
아쉬운 면을 생각하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더 벌이지 말자. 지금의 락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
들판들 다시 쳐다봤다.
쏴아아아아아!
다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 * *
“번천 경.”
곧 대규모 곡식 호송을 앞두고 며칠 휴가를 받아 락에 머물고 있던 엔케이는 번천을 찾았다.
“엔케이 대장.”
번천은 독립부대를 이끌고 있는 엔케이를 대장이란 친숙한 느낌으로 불렀다.
둘 다 모두 용병 출신에서 성격이 맞는 것도 있었고, 락에서 약간의 텃세를 받았다는 공통된 경험. 게다가 번천이 이것저것 영지 일을 돕다 보니, 가끔은 엔케이 부대와 함께 상단호위대에 있었던 걸 계기로, 둘은 꽤나 친해졌었다.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어제 도착했지요. 이번엔 일주일 이상의 긴 휴가라서. 같이 어울려 주셔야 합니다.”
나이는 엔케이가 번천보다 열 살 가까이 많았으나, 번천의 지위가 조금 더 높은 편이기에, 서로 존대를 썼다.
“하하하. 저야 좋지요.”
번천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과 시간 딱 끝마쳐 오신 걸 보니 술이 당기셨군요. 바로 갈까요?”
“이래서 번천 경이 좋다니까요. 가시지요. 애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야! 기다려 주시기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엔케이와 번천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펍으로 걸음을 옮겼다.
“번천 경!”
“이거 전세 내야겠는데. 번천 경도 말술이잖아!”
엔케이의 수하들은 친숙을 넘어 번천을 좋아했다.
번천이 정식 기사는 아니라 하지만, 락에서 번천은 기사 대접을 받는 이.
그런 거 치고 그는 자신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어 편했고, 또한, 번천이 종종 자신들과 대련해 주면서 잘못된 점까지 가르쳐 주는 스승 역할까지 하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엔케이 부대원들에게는 오랜만에 받은 휴가라 바로 술판이 벌어졌다.
사내들의 술자리는 비슷하다.
나 마시고, 너 마시고, 너 또 마시고, 나도 마시고, 이렇게 빠르게 취한 후 나오는 말은 자기 무용담 자랑.
그들의 술자리도 다를 게 없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할 정도 되자, 구라가 상당히 섞인 자신의 경험담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내가 잘났네. 네가 못났네 하며 비교질도 시작했다.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었다.
일단 각 출생지역이 달랐고, 엔케이에 모이기 전에는 다른 용병단 생활도 많이 했기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번천도 그런 그들의 이야기에 웃고 떠들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대단했지.”
콧수염이 멋지게 달린 부대원이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고 있었다.
“적이지만 정말 대단했어!”
그리고 그는 이긴 전투가 아니라 패배한 전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생존자 중 하나인 게 더 대단한 거였지. 그만큼 적 마법사는 대단했거든!”
적 중에 있던 마법사의 이야기.
“미쳤었다니까. 보통 마법사들이 지팡이나 손에 불길을 모으잖아. 하지만 그놈은 전신에 이렇게 불길이 피어오르는데!”
그리고 순간 번천이 꿈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