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39)
‘아버님이 보낸 줄 알았더니.’
로라스는 드리프가 아버지의 명을 받고 의중을 떠보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니다.
‘드리프 경도 기사이나 재정에 관여하는 사람이니!’
생각해 보니 영지에서 가장 현실적인 기사는 드리프다.
브렌드는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집중하고, 시그탑은 무를 추구한다.
하지만 드리프는 영지의 대부분의 업무에 관여하다 보니 욕심 아니, 당연히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좀 쪼들렸어야지.’
가난한 락 시대의 기억이 뼛속까지 각인되었을 테니 당연한 반응.
“아버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슬쩍 하는 말에 드리프의 눈이 빛난다.
“그것도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전장에 참여한 영주들의 몸값은 물론이고, 그들 혈족의 몸값도 지불해야 할 테니까요.”
“그게 무슨…….”
“브렌드 경의 병력이 그들의 가족들마저도 사로잡았다고 하더군요. 그들도 엄연한 전쟁포로 아니겠습니까!”
“아!”
드리프가 환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그들마저 그냥 풀어 주실지 모르니, 그 부분은 저와 드리프 경이 미리 못을 박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전쟁포로를 그냥 풀어 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주군께서도 납득하실 겁니다.”
흐뭇한 결과 도출에 로라스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제 문제는…….’
하나뿐이다.
‘다른 영주들은 몰라도! 그놈은 반드시!’
와디아 백작.
그는 죽여야 했다. 그의 대영주의 위치. 게다가 에렌과의 가장 중요한 길목을 틀어잡고 있는 놈이다.
‘놈의 영지를 전부 흡수 못 한다 하더라도 영향력은 가지고 있어야 할 터.’
로라스가 그리 생각할 때였다.
“소영주님!”
병사 하나가 달려왔다.
“와디아 백작 측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영주님께서 참석하라 하십니다.”
로라스와 드리프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급히 걸음을 옮겼다.
막사로 가 보니 뜻밖에도 로라스가 아는 이가 와디아 측의 사신으로 와 있었다.
‘용케 저 자리에 서 있군. 뻔뻔도 하지.’
그는 바로 페라 남작이었다.
에듀는 로라스와 드리프가 온 것을 보고는 페라에게 말했다.
“그쪽의 뜻은 충분히 전해졌소.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나가서 쉬고 계시오. 내일까지는 답을 알려 줄 테니.”
페라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부디 현명하신 결정을 내려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시오.”
페라가 밖으로 나가자, 에듀는 로라스를 보며 말했다.
“왔구나.”
“항복 사신입니까? 빨리도 왔군요.”
로라스의 말에 에듀가 뜻밖의 말을 전했다.
“와디아 백작이 죽었다고 하더구나.”
“네?”
로라스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아니 왜?’
죽이려고 마음먹었지만, 아직 손을 쓰기 전이었다.
“급사라더구나. 추측하기로는…….”
에듀는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말했다.
“화병일 확률이 높다고 하더구나…….”
“네?”
로라스가 기가 막혀 소리를 내자 에듀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존심은 있었던 사람이니…….”
로라스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나쁠 것 없지만, 오히려 그런 놈이기에 제 목숨은 챙길 것 같은데 말이지.’
에듀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배상을 이야기했는데…….”
에듀가 말끝을 흐리자 옆에서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입니다. 대승이라고 하나 그 배상금으로 어림도 없습니다.”
불만을 터트리는 이는 무려 시그탑이었다.
“뭐라 했습니까?”
드리프의 물음에 시그탑이 대답했다.
“전쟁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금화 오천 개를 지불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는 화를 숨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주군을 무시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 대패했음에도 그런 뻔뻔한 주장을 하는데, 우리가 만에 하나 패했다면…… 생각도 하기 끔찍하군요.”
“주군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이대로 밀고 나가시고, 그들의 영지를 점령해야 합니다!”
애초 양보할 생각이 없던 드리프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배상금액에 더더욱 화를 냈다.
에듀 역시 좋은 표정은 아닌 채로 입을 열었다.
“나도 거기에 응할 생각은 없네. 그래서…….”
에듀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압박할 생각이네. 무시하고 천천히 진군하면 그들도 다른 조건을 내세우겠지.”
“아버님.”
“무슨 의견이 있느냐?”
에듀의 물음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버님부터 저희 기사들까지 협상에 능한 자가 없습니다. 차라리 대리인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리인?”
“렘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렘은 상인이니…….”
“숫자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대부분 무인인 우리가 협상해 봤자 이득을 보기 힘듭니다. 괜히 감정만 상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으음…….”
에듀는 다시 소리를 내며 고민에 빠졌다.
로라스는 물론이고 다른 기사들도 적들의 협상에 반대하고 있었다.
하긴 자신도 화가 나는 협상 조건.
‘렘이라면…… 적절한 조율이 가능할지도.’
에듀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
전쟁을 즉시 끝내 평화를 찾을 것. 그리고 충분히 보상을 받는 것.
그가 우려한 건 하나였다.
에듀는 로라스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럴 만한 나이지.’
로라스가 욕심 아니, 야망을 드러낸 것에 못마땅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려되는 부분이 있을 뿐이었다.
‘가지고자 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아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군계일학, 낭중지추라는 표현도 자신의 아들을 수식할 수 없다.
압도적인 재능의 소유자가 바로 로라스.
그래서 걱정되었을 뿐이다.
‘영지가 커질수록, 그 힘이 강해질수록 중앙귀족들과 엮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성인군자가 된다 하더라도 적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바닥이다.
중앙정계에 환멸을 느꼈던 에듀는 로라스가 그쪽과는 엮이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웬만하면 적당한 배상을 받고 싶었던 것뿐이다.
“다른 의견들이 있는가?”
에듀의 물음에 사람들 중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에듀의 걱정을 몰랐다. 그래서 자신들의 영주가 무조건 양보만 하려 한다 생각했다.
그럴 바에는 렘이 협상이 낫다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협상의 주도자는 렘에게 넘어갔고.
“이거 포로들까지 다 합치면 있는 거 다 팔아도 못 갚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는 로라스보다 더한 욕심쟁이였다.
회의의 결과를 통보받은 렘의 두 눈은 매우 빛이 났다.
“으음. 영지는 당연히 회수해야지요. 영주님의 당부가 있으셨으니 살고 있던 저택, 성 등은 남겨두도록 하지요.”
전쟁은 승리하였고, 배상금으로 뜯어낼 수 있는 근거는 너무나도 많았다.
“으음. 물론 그것도 일 년 내에 회수해야겠지만 말입니다. 남들의 관심이 멀어질 때 말입니다.”
로라스마저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렘은 그들의 모든 것을 가져오려 했다.
“소영주님께서 제일 원하는 곳은 역시 와디아 백작의 영지 아닙니까?”
“길이 놓여 있는 요충지이니까.”
“다른 귀족들의 숨줄은 붙여 주는 대신 이쪽을 완전히 먹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로라스는 와디아의 영지만큼은 먹어야 한다는 속내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됐다.
‘이 사람이 철저한 장사꾼이라는 간과했었군.’
렘은 무방비로 놓인 탐스러운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사냥꾼. 또한, 락의 재정담당으로서 가져올 수 있는 재물을 동전 한 닢 놓칠 생각은 없었던 듯했다.
“소영주님이 걱정하실 건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가져야 할 배상금.”
오히려 로라스가 말릴 것을 걱정까지 하였다.
렘의 의지가 더한 것을 알고 로라스는 모른 체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렘이 협상을 어찌 요리할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나흘 후.
“허허…….”
협상 결과를 들은 에듀는 너털웃음만 터트렸다.
‘무슨 협박이라도 한 것인가?
아니다.
로라스는 물론이고, 기사들은 전부 진영 안에서만 머물렀다. 그렇다고 렘이 귀족들을 상대로 협박을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니, 정말 협상을 잘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협상의 결과가 너무 좋았다.
전쟁에 참여했던 영주들.
그들은 당장 상당한 재화를 내놓음과 동시에, 이후 그들의 영지에서 나온 생산량의 30퍼센트를 영구적으로 락에 보내는 조건에 서명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죽은 와디아 백작의 경우에는 영지에서 나오는 생산량의 80퍼센트를 보내기로 했다.
‘와디아 백작이 그럴 위인이 아닌데…….’
화병으로 죽을 정도의 속이 좁은 위인이, 죽기 전에 전쟁의 패배에 책임지겠다는 말을 남겼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죽은 이에게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다.
남은 건 죽기 전에 작성했다는 배상 책임에 관한 문서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에듀는 이 문제를 외면하기로 결정했다.
배상 협상을 끝냈다. 괜히 더 건드려 봤자 득 될 게 없었다.
무엇보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는 거로 끝낸 게 아닌가.
그렇게 협상이 끝났다.
에듀와 연합군 영주 간의 협의가 문서화되었고, 전쟁이 종료되었다.
“전군 락으로 돌아간다!”
“우아아아아!”
그리고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함에 락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전쟁은 끝이 났다.
* * *
락으로 돌아가는 길.
로라스는 렘이 주변을 자꾸 얼쩡대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는가 싶어 물었다.
“왜 그래?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소영주님…… 그게…….”
“할 말 있으면 해. 못 할 말 할 게 있나?”
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입을 열었다.
“와디아 백작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왜?”
“그 죽음이…… 아무래도…… 급사가 아닌…….”
“응?”
“살해당한 것 같습니다.”
“무슨 근거로?”
“협상이 그러했으니까요.”
렘은 에듀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협상할 때 분위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뭔가 숨기는 듯한 표정. 게다가 웬만한 책임 전부를 와디아 백작에게 떠넘기고, 그것에 대해 이미 입을 맞춘 듯한 그들의 언행까지.
“무엇보다…… 와디아 백작을 벌써 화장했더군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충분히 가져갈 수 있는…….”
“화장의 이유는 전염병의 위험이 있다고 했나?”
“네. 그겁니다. 시체가 곳곳에 있는데 굳이 백작을 화장했다는 건…….”
“신경 쓰지 마.”
“네?”
“이미 끝났어. 그걸 들쳐 봤자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진상을 밝힐 수도 있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독살 같은데.”
렘은 계속 입을 열었다.
진상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아냄으로 귀족을 협박하여 앞으로도 그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
‘나보다 더 독하네.’
감이 좋고, 숫자를 잘 다루는 데 그런 쪽으로도 머리가 비상한 것 같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절대 그러지 마!”
로라스의 주의에 렘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걸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그들을 계속 틀어쥘 수 있는 기회이니.”
“하지 마!”
로라스는 살짝 정색하며 렘의 말을 잘랐다.
“결국, 그들 모두 아버지 밑으로 들어올 귀족들. 그런데 그런 자신들의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하면 어찌 될 것 같아?”
아는 것이 힘. 모르는 것이 약.
상반된 내용이 있지만, 이럴 때는 후자다. 그리고 이건 그들 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로라스는 렘을 보며 다시 물었다.
“렘, 네가 이런 의문을 가진 걸, 저쪽 귀족들 중 눈치챈 이가 있나?”
“없습니다. 극도로 조심해야 할 일 아닙니까!”
로라스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나와 당신만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추후 조사도 하지 마. 이건 양쪽 모두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이야. 이건 명령이라 생각해도 좋아!”
렘도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굳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다면 모를까!’
만약 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다 죽여야 한다!’
로라스는 그런 일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