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38)
“흐흐흐흐.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오리시암은 서재 뒤의 비밀 문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정말 귀신같네. 귀신같아.”
토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는 말에, 오리시암은 다시 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원래는 광대 출신이었지요. 귀족 나리들 저택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이 정도야 식은 스프 먹기죠.”
“그래. 너 정말 잘났다.”
“전부 제 몫이라는 약속 잊지 않으셨지요?”
“의심도. 소영주님께서 그간 잘 참았다고 주시는 상이라 말씀하셨다니까.”
“확실한 게 좋지요. 사실 제가 혼자 먹을 수도 없는 거란 말입니다. 이 숫자를 끌고 나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하고 손가락을 빨아야 하는데. 이득이 안 되면 통제하기 힘든 놈들입니다.”
“그것도 염두에 둔 거지. 그러니 자네들은 자네 잘하는 것만 잘하면 돼.”
“흐흐흐. 가지요. 그래도 저도 양심은 있으니 혼자만 먹지 않으렵니다.”
“그럴까? 하지만 재물이 탐나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런 거야. 이런 곳의 영주는 뭘 그리 숨기고 사는지 말이야.”
토니가 오리시암과 어깨 나란히 비밀 통로로 들어가는 걸 보며, 브렌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토니를 데려온 건 정말 최고의 한 수였군.’
토니가 없었다면 어쨌을까 할 정도로 그는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브렌드는 걱정이 많았었다.
킹드래곤 길드의 수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쓰지만, 오리시암은 산적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수하들이란 자들도 그랬다.
마적들은 또 어땠던가?
기사 중에서도 기사.
너무나 모범적인 삶을 넘어, 만사 꽉 막혔다는 소리를 듣는 브렌드와는 상극이었다.
그들과 만남 이후 솔직히 브렌드가 검병에 손이 몇 번이나 올렸는지 모른다.
여기서 토니의 역할이 빛났다.
그는 기사이자, 지휘관이 되어야 할 브렌드의 부담감을 이해했고, 오리시암과 산적들과 마적들의 삶을 알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들과 어울렸고, 그들에게 지휘관으로서의 브렌드의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다.
‘소영주께서 이 사실을 알면 어찌 이야기하실지…….’
로라스는 산적과 마적들을 이끌고 적의 후방을 교란하라고 했지, 이런 식으로 약탈하란 말은 없었고, 모두 가지라고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브렌드님. 일반인들에게만 손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토니는 깜짝 놀라던 브렌드도 설득했다.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들의 사정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소영주께서 엄명을 내려 본업을 일부 막은 것 같은데. 불만이 의외로 컸습니다. 저놈들도 그냥 끌려 나온 것보다, 동기를 부여할 만한 게 있다면 신나서 일할 겁니다. 교란이 별 겁니까?
―하지만…….
―믿어 주십시오. 소영주께서도 이런 방식에 뭐라 하지 않으실 겁니다.
토니는 사람들을 2년 이상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도 칭송받게 만드는 로라스의 수법을 잘 알기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었고.
그 설득에 브렌드는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난 기사가 아니라 임무를 받은 지휘관.’
약탈이라는 것 자체에 극렬한 거부감은 여전히 있으나, 저런 오리시암의 행동이 더 효율적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절대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영주 가족들은 모조리 찾아서 포로로 끌고 간다!”
브렌드는 영주관 약탈이라는 행위를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하기 시작했다.
* * *
겨울임에도 유난히 따뜻했던 그 날.
햇살마저도 좋았던 그 날.
에듀와 와디아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병력들이 메타린 외곽에 모였다.
와디아 연합군 병사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긴장한 건 인정하지만, 그 긴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불안감이 전신을 감쌌다.
반면 락의 병사들은 달랐다.
그들 역시 긴장이 역력한 표정이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컨디션이 좋아서 일수도 있지만, 그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몰랐다.
자신들이 서 있는 이 땅의 비밀을 말이다.
이 전장은 어쩌다 보니! 전쟁의 흐름이 이리로 흘러서! 선택된 곳이 아니다.
이 땅은 철저하게 락이 준비하고 계획했던 곳이다.
로라스는 필승을 확신하면서도 어떻게든 더 피해를 줄여 보겠다고 선택한 곳.
그래서 중립을 선언한 마탑의 탑주, 에르자일이 몇몇 마법사들과 이곳에 살다시피 했던 땅이란 건 그들은 몰랐다.
뿌우우우우우웅!
양쪽의 거대한 뿔피리 소리와.
두우우웅! 두우우웅!
커다란 북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양측의 병력은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퇴각로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철수해야 합니다.”
“락에 휴전을 제의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끝입니다.”
귀족 들의 말에 와디아는 성을 냈다.
“이대로 철수하자고! 케이스 남작. 그걸 지금 말이라 하는가!”
그 성을 받아 줄 사람은 없었다.
이번 영지전은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락의 승리로 결정되어 버렸다.
석패?
그런 패배도 아니었다.
아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병력의 숫자를 믿고 덤볐던 그 한 번의 전투에서조차 말이다.
메타린 회전.
각기 가문에서 치욕스러운 불명예로 남게 될 그 전투는 애초에 시작해서는 안 될 전투였다.
회전 시작 전 후방에 적이 나타났다고 했던 그 순간, 후퇴해야 했다.
모두가 돌아가자 했지만, 와디아 백작은 기어코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패전의 원인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가장 큰 이유 몇 가지를 짚어 보면 이랬다.
첫 번째는 그 누구도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
적의 별동대에 영주들은 자신들의 영지가 폐허가 될까 전전긍긍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소문이 병사들에게까지 퍼져 버렸다.
이미 바닥 친 사기가, 소문이 퍼진 후로는 전의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두 번째는 기병대의 부재였다.
선봉에서 대부분의 기병들을 잃어서 적의 기병대에 속수무책이었다.
세 번째는 장수의 차이였다.
락에는 놀랍게도 마스터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두 명이나 말이다.
락의 영주 에듀 그리고 그 수하 기사라 알려진 시그탑.
두 개의 푸른 섬광이 아군을 가를 때, 그것을 막는 무인이 없었다.
네 번째는 이 모든 이유로 인한 전술의 붕괴다.
뭉치지도 못했으며, 적의 변화에 대응하지도 못했다.
특히나 전쟁의 경험도 없고, 전술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급조된 징집병들.
반면 락의 병사는 달랐다.
그들은 빠르게 진영을 바꿀 능력이 있었으며, 단 한번의 돌격에 아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몰랐던 것이다.
락 역시 전쟁의 경험은 없으나, 그에 준하는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매년 몬스터를 상대로 대규모 토벌전을 벌이는 락의 사내들이 다른 영지와 같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하간 이제 자신들은 후퇴조차 할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이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없는 게 없습니다.”
심복인 다에스 자작의 말에도 백작은 요지부동이었다.
“졌으면 다시 싸워 이길 생각을 해야지! 어찌 하나같이 항복하자는 말만 하는가!”
“…….”
“내 이런 자들을 믿고 대사를 도모했으니!”
와디아는 열과 성을 다해 역정을 내니, 귀족들의 고개는 점점 숙여졌다.
그들은 솔직히 외치고 있었다.
백작이라고, 대영주라고 해서 뭔가 특별함을 기대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역량이나 그의 역량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아니 지금 보면, 자신들보다 대세를 읽는 눈도 부족한 것 같았다.
“최후의 결전이다! 모두가 죽을 각오를 하고 덤비면, 이기지 못할 리 없어! 다시 준비해! 아직 숫자는 비슷하잖은가!”
백작의 외침에 다에스 자작은 입을 다물었다.
‘사달이 나겠구나!’
주변 귀족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긴 왜 아닐까?
적 별동대에 의한 후방의 영지가 약탈당하고 있다고 했다. 그 와중에 이겨야 할 전투까지 져 버렸다.
얼른 돌아가 수습해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백작은 고집을 부린다. 일말의 희망까지 앗아가는 말이다.
귀족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
자신마저도 이 모든 책임이 백작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자작은 더 말리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래도 와디아 백작과 철저하게 거리를 둬야 할 때라 생각했다.
* * *
“엄청 쫄았었는데 말이지.”
“쫄긴 왜 쫄아? 우리가 당연히 이기는 전투였지.”
“얼씨구! 전투 전날에 하루 종일 기도하는 걸 내가 봤는데.”
두 병사의 대화에 한 병사가 껴들었고.
“소리까지 냈잖아. 살아서 돌아가면 착하게 살고, 신전도 꼬박꼬박 나간다고.”
“헛소리 하지 마! 내가 언제!”
당사자인 병사가 버럭 소리를 내며 부정했다.
“이번에 보자고. 꼬박꼬박 신전에 나가는지.”
“우리 사제님 좋아하시겠네. 교단 하나 세우겠다고, 혼자 열심히 하시던데. 저놈이 도와줄 거 아냐.”
“헌금도 꼬박꼬박 내!”
“하하하하하!”
병사들의 놀림에 당사자는 화를 냈지만, 실제로는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자신은 살았다!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그리고 마물을 통해 생사를 가르는 전투의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건 그뿐만 아니라 모든 락의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
살아 있어 놀릴 수 있고, 살아 있어 놀림 받을 수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병사들의 떠들썩한 대화를 보고 있는 로라스도 행복해하고 있었다.
“보기가 좋습니다. 소영주.”
그런 로라스 옆으로 드리프가 다가왔다.
“그렇지요?”
“기사로서. 그리고 저들의 지휘관으로서 또한 락의 영지민으로서 소영주께 감사하고 싶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게 어디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말단 병사에서부터 우리 지휘관 들. 그리고 아버님이 이뤄 낸 일이지요.”
로라스는 드리프가 별말 없이 자신과 같은 곳을 지켜보자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으시군요. 말씀해 보세요.”
드리프는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전쟁은 이겼습니다. 그럼 남은 건…….”
“드리프 경. 경이 제게 못할 말이 뭐가 있다고 뜸을 들이십니까. 전쟁은 끝났고 남은 건 배상 문제이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소영주.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당연한 걸 물으십니다. 그들로 인해 입은 피해는 모두 보상받아야지요.”
“그러니까 그게 어디까지…….”
로라스는 슬쩍 드리프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우려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말했다.
“강자 독식. 우리가 이겼으니 모조리 우리가 차지하고 싶지만!”
“…….”
“아버님의 의향이 제일 중요하지요. 저는 뜻대로 따를 뿐.”
“주군께서는…….”
드리프는 두리번거림으로 주변의 병사들이 이쪽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입은 피해를 정확히 산출해서 요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락의 사업이 정지됨으로 인한 손해. 그리고 사망자와 부상자들의 유족과 가족에 대한 충분한 보상금 지급 말입니다.”
로라스는 고개를 드리프에게 홱 돌리며 물었다.
“그뿐입니까?”
“네. 방금 그 피해액을 산출해 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으음…….”
살짝 우려는 했지만, 현실이 되니 성이 차지는 않았다.
그런 아버지이니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는 하지만, 그걸로 끝내기에는 아쉬운 건 사실.
“그래서 포로에 대한 비용도 따로 청구하려 하는데…….”
“포로요?”
“주군께서는 귀족들은 몸값을 받더라도, 평민들은 그냥 돌려보내시려고 하시니까요. 그래서…….”
‘아!’
로라스는 순간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한 우려가 아니군.’
드리프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로라스의 생각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간단하다.
‘이긴 쪽은 진 쪽의 모든 것을 가진다’라는 약육강식의 철칙이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