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37화 (137/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37)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느린 진군 속도에 와디아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병력의 우위를 이용하여 전광석화처럼 락을 굴복시켜 이득을 챙기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일반적인 속도만 갖춰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근래 적의 기습이 사라져 속도를 차츰 올리고 있지만, 그래도 시간 지연에 따른 재정과 병량 소비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한 번! 한 번이면!’

속이 타들어 가는 만큼, 제대로 된 싸움 한 번에 대한 열망은 커져 갔다.

‘어떻게 운이 좋아 이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로지 숫자의 유리함만 생각하던 와디아는 다시 짜증이 났다.

‘미카이! 이자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무려 일레아 용병단을 데리고 나갔음에도 소식 하나 없었다.

‘혹시 이미 무슨 성과는 거뒀나? 그리고…….’

어쩌면 적의 기습대를 격파하여 밀어붙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척후도 전방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 않았는가?

며칠 동안 전방에 아무것도 없음에 와디아는 전군에 속도를 올릴 것을 명했다.

“백작님!”

그리고 정확히 나흘 후.

“언리언 남작의 부대가 괴멸했다고 합니다!”

“뭐라!”

“살아 돌아온 자가 쉰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말에 와디아는 소리를 빽 질렀다.

“지휘관들 다 불러!”

* * *

락의 본군과 와디아 본군의 첫 격돌?

그 전투는 격돌이라고 할 만한 전투가 아니었다.

락의 선봉대에 최정예 병력을 잃은 와디아. 게다가 그 탓에 보급선을 길게 가져가고 그래서 병력이 집결하지 못했다.

숫자의 유리함을 가져가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락의 병력보다 더 적은 병력의 부대로 첫 전투를 치른 것이다.

너무나 압도적인 승리라 뭐라 말할 가치조차 없었다.

와디아의 진영도 아주 멍청한 게 아니었다.

첫 전투의 패배 후 그 이상의 진격을 멈췄다. 그리고는 후방의 부대를 기다렸다.

단 한 번의 전투.

압도적인 숫자의 유리함으로 일격에 무너트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 의도를 모를 락이 아니었다.

“기동력은 아군이 압도적으로 앞섭니다. 시간을 주지 말고 싸움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드리프는 그렇게 주장했고, 대부분의 지휘부가 동의했다.

“시간은 저쪽 편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리해집니다.”

하지만 로라스만이 다른 의견을 내었다.

“보급 문제를 노리시는 겁니까?”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드리프의 물음에 로라스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한 수를 말하자, 막사는 정적에 휩싸였다.

로라스는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어떤 병력인지, 어떤 식으로 후방을 차단하는지 궁금한 게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묻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락에, 특히 락의 기둥이라 할 만한 여러분들이 모르는 게 좋습니다.”

무법지대의 병력에 대해서는 말해서 좋을 게 없었다.

도덕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준비한 호송사업이 원활치 못하게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에듀를 제외한 지휘부들에게 이 사실을 숨긴 것이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야. 하지만 급한 건 저쪽이지, 우리가 아닌가. 어차피 단 한 번의 싸움은 여기서 싸울 게 아니지 않은가?”

에듀의 말에 대치하다가 적의 규모가 커졌을 때, 다시 뒤로 후퇴하기로 결정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고, 막사 안에는 에듀, 드리프 그리고 로라스까지 셋이 남았다.

“소영주님.”

“말씀하십시오. 드리프 경.”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겁니까? 브렌드 경이 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간 건, 척후 개념인 줄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드리프 경. 그건…….”

“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라스가 말하기 전에 에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드리프에게까지 숨길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 그리고 솔직히 애비도 궁금하구나. 대체 어디까지 생각한 건지.”

로라스는 에듀와 드리프를 번갈아 쳐다봤다.

‘으음!’

고민됐다.

모든 계획을 명확하게 오픈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이 세계 귀족, 기사란 자들은 워낙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역후의 기억에서는 전쟁이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이기지 않으면 내 사람들이 전부 죽는 거였다.

하지만 이 세계는 아니다.

전쟁도 따지는 게 많았다.

명예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싸우기 전에 수많은 요식행위를 하는 건 그나마 이해했다.

포로의 몸값?

뭐 이긴 쪽이 이득을 얻는 것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거기서 끝나 버리는 게 문제였다.

로라스의 목적은 영토 확장, 그리고 더 나아가 에듀의 대영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는 것.

‘이 지역을 손에 넣으면 아버지는 백작 위를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

로라스는 슬쩍 에듀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버지의 성향으로 봐서는…….’

그래서였다. 모든 계획을 오픈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와카디아 지역을 손에 넣는다. 나머지는 문제는 그 후 고민한다.

하지만 에듀가 직접적으로 물은 이상 대답을 회피할 수는 없다.

“아버지.”

“말해 보거라.”

“이 전쟁 어찌 마무리하실 생각입니까?”

“마무리?”

“네. 영지전을 어찌 끝낼지 아버지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로라스의 반문에 에듀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와디아 백작이 락을 탐내 공격해 왔으니, 자신은 지킨다는 생각뿐이었다.

“으음…….”

에듀는 슬쩍 로라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로라스가 생각한 결말을 고민해 봤다.

‘내 아들이지만…….’

가끔 감당할 수…… 아니, 따라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라스의 눈빛, 표정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이 생각한 결말이 뭔지 말이다.

“어디까지 삼킬 생각이냐?”

영토 확장이 목표라는 걸 깨달은 에듀가 물었고, 로라스는 대답했다.

“그가 시작한 전쟁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여 줘야 합니다. 락은 더 이상 쉽게 건드릴 수 있는 변방의 작은 영지가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

“그의 모든 것을 가져오고 싶습니다. 와디아 백작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 협력한 모든 영주의 영지 전부!”

로라스의 단호한 대답에 에듀는 잠시 침묵했다.

‘역시!’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을 생각하는 아들이다.

“전쟁에 이긴다 하더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쉽게 만들면 됩니다. 찍소리도 하지 못하게 밟아 버리면 됩니다. 특히.”

로라스는 쉽게 뒷말을 잇지 못했다.

‘영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에듀가 그걸 허락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여기는 귀족들에게 참 관대한 곳이니 말이다.

로라스는 에듀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려 합니다.”

살생부를 작성한다는 말에 에듀는 흠칫했다.

“죽이겠다고?”

에듀의 반응을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기에, 로라스는 원래 생각보다 더 순한 계획을 말했다.

“다 죽이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

“몇몇은 살려 두려 합니다. 우리 락의 발전에 필요 없는 영지의 영주들은 살려 두지요. 어차피 항복을 받고, 충성을 맹세하게 하면.”

“나머지 영주들은? 다 죽이겠다는 말이냐?”

“본보기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라스!”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결말을 들어 보니 그러지 못할 것 같음에 에듀가 급히 말했다.

“네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들을 모두 죽인다면 모든 귀족들의 공분을 살지 모른다!”

“공분을 사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면 됩니다.”

로라스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포로를 남기지 않으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전장에서 죽이면 그 어떠한 의심도 남지 않습니다.”

에듀는 순간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로라스는 전쟁 자체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더더욱 큰 문제는 그게 사실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만 봐도 그렇다.

와이아 백작이 팔천이나 모았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한 지가 엊그제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승리가 기정사실화됐다.

이 모든 게 로라스가 단 백 명을 이끌고 만들어 낸 상황이다.

물론 시그탑의 역할도 컸지만, 그 외 모든 것들은 로라스의 작품이었다.

‘아니, 시그탑이 경지에 이른 것도 이 아이의 영향력이 컸으니…….’

그건 시그탑 본인이 먼저 털어놓은 사실이다. 그리고 덕분에 자신도 같이 경지가 올랐다.

이렇게 말한 건 너무 쉽게 이루는 로라스였다.

‘조금 단속해야 할까?’

그 엄청난 재능, 또는 능력에 에듀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에듀의 침묵이 긍정이라 생각한 로라스가 말했다.

“아버지께서 제게 맡겨 주시면 모두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에 조금도 해가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로라스.”

“네. 아버님.”

“이 아비는 네가 너무 극단적으로 일을 계획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는구나.”

에듀는 순간 입을 다무는 로라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흐름 대로 맡기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이 아비는 불필요한 피는 흘리게 하고 싶지 않구나.”

말을 하면서도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로라스가 자신의 뜻에 반할까 봐. 계속 자신을 고집할까 봐.

“알겠습니다.”

하지만 로라스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그 걱정을 깨 버렸다.

“아버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괜찮겠느냐?”

“락은 아버님의 것. 그리고 소자 역시 아버님의 아들. 뜻을 거스를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분명 공들여 만든 그린 그림일 터인데, 의외로 순순히 자기 뜻에 따르는 로라스를 보며 에듀는 기쁘면서도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 그들의 기세를 꺾고, 락을 침범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 아비도 성인군자는 아니다.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다.”

에듀의 말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괜히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결과가 이유를 앞서면 안 됐다. 어차피 이 모든 게 에듀를 위한 일이었다.

‘한 놈만!’

다만 와디아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놈만 처리하면 남은 귀족들은 전부 하급 귀족들이니, 무슨 협상이든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돌려줄 때, 돌려주더라도 일단은 뺏어야지!’

목숨은 살려 주되, 숨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게 하리라.

로라스는 반드시 그렇게 만들리라 다짐했다.

* * *

와디아의 부대 육천. 에듀의 부대 이천이 메타린평원 서쪽 외곽에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적의 본군을 제대로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와디아와 지휘부들은 자신만만했다.

이 평원에서 숫자 많음은 압도적으로 유리해진다.

“기병 숫자가 적으니 기동력은 적을 따라잡지 못할 터. 진영을 무리하게 산개하지 말게.”

전쟁을 겪어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병법서는 몇 번 훑어본 적이 있는 와디아가 말 그대로 책에 있을 듯한 한 말에 다른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 역시 전쟁의 경험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와카디아 지역의 영지들은 척박하여, 누가 누구의 영지를 탐낼 필요도 없었고, 말 그대로 먹고사는 데만 집중했던 곳.

막연하게. 책에서만 보아왔던. 그런 전쟁만이 그들의 머릿속에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락의 별거 아닌 게릴라 전에 그리 휘둘린 것이다.

여하간 그 모든 고생은 오늘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백작님!”

막 공격 명령을 내리는 순간 전령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뭐냐!”

“후방에! 후방에!”

다급한 표정에 같은 말만 반복하는 병사를 보며 와디아가 역정을 냈다.

“후방에 뭐!”

“적이 나타났습니다.”

“뭐!”

와디아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