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34)
“하아아아!”
베스타인 공작의 한숨에 모두가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들의 주군은 저런 한숨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걸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고, 생기더라도 그 전에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안 좋은 일은 몰아친다더니.”
얼마 전 수도에서 군사 격인 아란데일을 급사로 잃은 베스타인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니 와카디아 지역에서 영지전이 벌어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들 뭣들 하고 있었나?”
베스타인의 마른 목소리에 모두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모두가 에르페유를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상황이든 할 말 다 하는 에르페유는 아란데일의 사망으로 인한 군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국경 지역으로 파견된 상황.
“늙었군. 너희들도.”
그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 번 숨을 죽여야 했다.
“넌 뭐 했느냐?”
그리고 공작의 시선이 마침내 모두를 침묵하게 만든 장본인에게로 쏠렸다.
“아버지…….”
콰아아아앙!
베스타인이 살짝 탁자를 내려쳤고, 디존슨은 움찔했다.
“전권을 맡기고 갔더니 이 사태를 지켜만 봤다? 내 믿음은 점점 남아나지 않는구나.”
“억울합니다. 아버지. 영지전은 늘 있는 일 아닙니까?”
“늘? 내가 통치하던 지역에서?”
디존슨은 다시 한 번 움찔해야 했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와디아 백작은 와카디아 지역의 대영주 아닙니까? 근래 락이 그 지역의 질서를 해치고, 묵과할 수 없다는데 어찌하겠습니까?”
“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건 아닙니다! 저로서는 중립을 지키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중립이라…… 그 말 믿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디존슨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하는 말에 베스타인은 속에서 치미는 화를 내리눌러야 했다.
‘저 못난 놈을 어찌해야 하는가!’
베스타인 공작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가문의 장자로서 나름 힘을 실어 준 게 실수였다. 반대로 조금 더 혹독하게 다뤄야 했다.
그랬다면 최소한 참는 법과 사람 보는 안목은 기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상황은 벌어졌고, 자신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신의 권력으로 모두 내리눌러 원 상태로 돌릴지.
‘이렇게 된 이상…….’
후계구도에 새로운 사람을 참여시키는 걸 지켜봐야 할지를 말이다.
베스타인 공작은 디존슨을 노려보았다.
‘이것도 네놈의 운명일 터.’
와디아 백작이 와카디아 영주 거의 전부와 연합하였다고 했다. 그 말은 락이 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예전의 락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뿐이면 모를까.
‘시작한 이상 그 녀석이 와카디아만으로 만족할까?’
로라스는 제 것을 뺏기는 놈이 아니다.
로라스를 아는 이들 중 몇몇은 먼저 남의 것을 탐내지는 않으니, 큰 욕심은 없는 사람이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를 반만 아는 것이다.
로라스는 욕심이 없는 게 아니다.
‘원하는 건 반드시 얻는 놈이니, 욕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
몇 년 전에 자신에게 어디까지 가도 되느냐 물었던 놈이 바로 로라스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그런데 이놈은…….’
베스타인 공작은 디존슨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아버님, 저는 아버님의 대리로 공평하게 중립을 지켰을 뿐입니다. 이게 탓하실 일입니까?”
제 적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나 인지하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됐다.”
베스타인 공작은 실망감에 손을 홰 저었다.
“공작님, 지금이라도 양쪽을 물리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누군가의 바보 같은 의견에 공작은 짜증을 그대로 드러냈다.
“진즉 그랬다면 모를까? 이미 충돌까지 했는데! 무슨 명분으로!”
베스타인 공작은 경고하듯이 말을 이었다.
“누구도 이 일에 끼어들지 말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다. 명령을 어기면 그 죄를 확실하게 물을 것이다!”
모두를 침묵시킨 베스타인 공작은 생각했다.
‘병력 비율이 그토록 차이 난다면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기어코 제 것을 지켜내고 오히려 다 빼앗겠지. 이제 같잖은 변명으로 빼지도 못할 터.’
베스타인 공작은 더 깊은 생각에 잠겨야 했다.
* * *
이상한 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놈들 뭐지?’
말의 속도가 느려졌고, 놈들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법이 풀렸다.
적 마법사의 마나가 부족하여 지속하지 못했다는 가정이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그건 아니다!’
마법이 적용된 그 시간만으로도 놈들은 자신을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그러지 않았고, 지금도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이놈들 설마!’
깨닫고 난 후 테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놈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놈들!’
순간 테라는 말 고삐를 당길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하나다.
이곳은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야 할 곳이 아니다.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모인 락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의향이 있는데 그깟 자존심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약해서다! 그리 보여서다!’
테라의 아랫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잘 달리는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이는 미카이.
놈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와디아에게 계속 척후를 보내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하나를 잡았다.
미카이가 중얼거리는 듯하는 말에 그와 나란히 달리던 사내가 말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제 소굴로 도망치는 법이니까요.”
“그렇지요. 그런데 일레아 단장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용병단장 일레아가 반문했다.
“뭘 말씀입니까?”
“놈의 수준 말입니다. 놈이 방금 소리칠 때 포스가 꽤나 사나웠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확실히 저 나이에 그만한 포스는 보기 드물지요. 마나에 저항할 정도의 포스면…… 재능은 상당하다 봅니다.”
“아이언 센터의 수련생입니다. 브론즈 대회에서 상위에 랭크되었을 정도로 뛰어나기도 합니다.”
일레아는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그렇지만 아직 애송이일 뿐입니다.”
아이언 센터의 수련생. 그리고 브론즈 대회의 상위 랭커였음에도 일레아는 조금의 위축도 없었다.
그 모습에 미카이는 만족스러웠다.
‘오늘 끝장을 내 주마!’
그래서 대공자의 신뢰를 다시 사고, 에렌에서 입은 손해를 락의 지분을 소유함으로 보충하리라.
“저기 새로운 놈이 나타났군요.”
일레아는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세 명의 인마가 서 있었다.
“이거 더 몰아야겠는데요. 몇 안 되지 않습니까?”
일레아가 계속하는 말에 미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반대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게 소굴의 정체입니다.”
“네?”
“열도 안되는 놈들에게 당했다고 하더니…… 이제 보니 넷인 것 같군요.”
미카이는 전방을 향해 있는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저놈만 잡으면 이 전쟁은 매우 수월해질 테니까요.”
* * *
‘저놈은?’
잘못 봤나 싶어 자세히 봤는데 역시 미카이, 그놈이 맞다.
‘놈이 왜 여기에?’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좋은 관계도 아닌 나쁜 관계인데. 음흉한 놈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주군!”
테라의 얼굴을 보고 알았다.
유인해 온 게 아니라, 정말 쫓겨서 도망쳤다는 것을.
“적 중에 마법사가 있습니다. 말이 엄청 둔해졌는데…… 그리고…… 그리고…….”
분한 테라의 표정을 보니 뭔지 알 만한데,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게 할 필요도, 그리고 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됐다! 갚아 주면 그만.”
그리 말해 주고는 미카이, 그리고 놈이 데려온 자들을 봤다.
‘마법사라…….’
탐색하는 사이 놈들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자.”
찢어 죽이고 싶을 텐데, 능글거리는 저 표정을 보면 확실히 난놈은 난놈이다.
“또 보는군. 빙빙 돌려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테고. 와디아 백작의 편에 선 건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뭐 먹을 게 있다고, 자네가 이런 변방의 영지전에 참여했을까?”
“먹을 거야…… 제가 찾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락에 찾아 먹을 게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놈은 눈에 살기가 보였다.
“공자를 잡으면 에렌에서 제가 잃었던 것도 찾아올 수 있을 것 같고 말입니다.”
“그럴 거면 그냥 다시 주사위 한 번 굴리면 될 것을. 어때? 한 번 더 도박하는 건. 네가 이기면 그대로 항복하지. 내가 이기면 네가 항복하고 말이야.”
“고마운 제안입니다만. 전 승률 좋은 게임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서.”
“승률이 좋다라…… 뒤에 저 마법사를 믿고?”
오면서 단 한 번도 내게 시선을 떼지 않은 노인이 흠칫하는 게 보였다.
확실히 만만히 볼 만한 마법사는 아니다.
마나 탐색을 할 필요 없이, 주변에 마나의 흐름이 보일 정도다. 게다가 테라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에르자일보다 더한 마나가 느껴지는데?’
물론 마나가 마법사의 경지를 모두 대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나의 양 자체가 높은 쪽이 유리한 건 사실.
그때 미카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충분히 믿어도 되지요. 일레아 용병단의 매지스터 샤이하라는 이름. 들어 보셨을 텐데요.”
“몰라. 그런 이름. 내가 아는 매지스터의 이름은 단 두 개! 매지스터 헤르메스. 매지스터 에르자일.”
살짝 모욕을 줬을 때는 반응하지 않더니, 두 사람의 이름에는 반응하는 노인.
“적으로 오셨다니 어찌 한 번 해 보겠는가? 나도 마법사이니. 매지스터가 나를 사로잡으면 큰 공을 세울 것 같은데.”
노인은 대답 대신 미카이 옆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저자도 강자고. 용병단의 수준이 매우 높군.’
포스가 흘러넘치는 걸 보면, 반박귀진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저것만으로도 마스터라 불릴 만한 수준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소영주.”
시그탑이 옆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일레아 용병단은 세계 십대용병단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용병단장인 일레아는 마스터급의 무인이고, 저 샤이하라는 마법사는 ‘전장의 마법사’라는 칭호가 따로 있을 정도로 전투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단순한 사실을 전달할 뿐이지만, 그의 어투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저희는 용병단일 뿐입니다.”
그때 상의가 끝났는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용병들은 돈과 신의에 따라 움직일 뿐. 저희 용병단의 고용주께서는 안전하고 확실하게 소영주님을 사로잡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 제안은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거슬리는군. 안전하고 확실하게라…… 누가 누굴?”
“…….”
“뭔가 착각들을 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내력을 끌어 올리자.
“용병단은 돈에 움직이는 것도 맞지만, 자신들의 목숨값은 정확히 판단해야 하는데.”
부우우우우웅.
창이 울었고.
“그 목숨값. 제대로 받은 것들이 맞나?”
“…….”
“내 사람들이 혹여 하나라도 다쳐서 문제라도 생기면.”
그 창을 놈에게 뻗었다.
“모조리 죽게 될 텐데. 확실히 받은 거 맞아?”
창에 담긴 살기로 놈을 휘잡았고.
“십대용병단이라는 곳이, 누구를 상대할지도 조사하지 않은 건가?”
일레아라는 놈이 뒤로 물러나는 걸 보며 웃어 줬다.
“기회는 너희들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주는 거였지만. 애석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