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32)
계속되는 격전.
아프다.
고통이 전신을 휘몰아친다.
언제였지?
‘미딩에서였던가?’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미딩에서는 일부러 부상당하기 위해, 예측하고 준비했던 고통이라면.
터어어엉!
지금 갑옷을 찌르고 치는, 이 충격은 예상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준비도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더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살아 있음을. 그리고 내가 무인이라는 사실을.
게다가 이 격렬한 통증을 적에게도 그대로 돌려주고 있음에 신도 났다.
아니, 어디 통증뿐일까?
터어어어엉!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차디찬 감촉.
“크허헉!”
그리고 그대로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뒤로 날아가는 기사들.
막고 치고 쓰러트린다.
피하고 치고 쓰러트린다.
맞고 치고 쓰러트린다.
이 간단한 세 가지의 움직임에는 변수가 없다. 한 상대를 두 번 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단전에서 열이 느껴졌다.
운기조식할 때를 제외하고는 찾아오지 않았던 열기. 그만큼 내력을 최대한 끌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좋구나!’
꽤나 위험스러워 보이는 상황인 것 같은데 말이다.
고통은 있는데 위기감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아!
로라스로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유역후 시절에서는 있었다.
‘놈들이 황궁과 손을 잡았을 때였던가?’
너무나도 압도적인 천황성의 진격에 황궁이 지레 겁을 먹고, 적들과 손을 잡았던 적이 있었다.
백만 황군이라 주장하나 사실 허수가 많다. 하지만 그래도 삼십만 이상이었던 군대의 통수권자.
황제!
그를 직접 만나 보려 한다는 말에 제자들이 우려했다. 하지만 이미 반쯤 미쳐 있던 유역후는 조금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독으로 황궁에 침입하는 무모한 일을 저질렀었다.
하지만 결과는 무모하지 않았다.
만에 가까운 병력과 금위의의 수비를 뚫고, 유역후는 황제와 서로 얼굴을 마주했었다.
어찌 됐냐고?
천황성이 무림일통을 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건 없었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때 황제를 협박했을 때에 비하면 말이다.
‘지금은 전혀 무리랄 것도 없지.’
내력을 더더욱 끌어 올렸고 창에 붉은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완성해야지. 전설을!’
홍염이 사방을 휩쓸었다.
* * *
시그탑은 로라스의 압도적인 무위에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아니 그 표현도 부족하다.
‘꿈인가?’
뻔히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터어어엉! 까아앙! 타아아앙!
난전 속에서 갖은 철음이 퍼졌지만, 로라스는 서 있고, 그 주변의 적들은 날아갔다. 그리고 바닥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이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백에 가까운 적이다. 게다가 일반 보병도 아닌 풀 아머를 장착한 기사다.
시그탑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그렇게 얼마를 지켜봤을까?
결국, 도망치는 기사들이 생겼다.
아니, 명령이라도 내려온 듯 일제히 로라스의 주변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오! 신이여!’
그리고 그 순간 시그탑은 신을 찾았다.
시그탑은 무신론자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신을 찾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찾아야 했다.
로라스의 손에 들린 홍염의 창.
대체 어떤 포스길래 그리 강렬한 붉은빛을 발휘하는지. 그래서 놀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붉은빛이 아니었다.
‘마창사라니…….’
붉은빛이 아닌 말 그대로 불꽃이 일어나는 걸 보니, 창에 어린 홍염은 빛이 아닌 말 그대로 불!
원래 마법과 포스를 같이 쓰는 무인이 아주 적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많은 편이다. 포스와 마나가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보니, 포스 유저 중 기초적인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로 분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검과 공격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무인들.
마검사.
따로 분류한 이유는 간단하다.
무인들 중 검사들만이 검과 3클래스 이상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어서다.
무인들 중 검사들이 많아서인지, 검이 마법을 사용할 때 용이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숫자도 적지 않아 따로 분류한 것.
하지만 창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무인은 없었다.
물론, 로라스가 마법사로 진로를 고민할 정도로, 마법에도 정통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창과 마법이라니.’
그 순간 창에 서린 홍염이 창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창이 날아갔다.
창에 서린 홍염 그 모습 그대로…… 물러서는 적들을 갈랐다.
“우아아아아아아!”
로라스의 함성!
시그탑은 그때 깨달았다.
―지켜보세요. 움직일 타이밍은 경도 잘 알 것입니다.
로라스가 말한 그 타이밍!
‘지금이다!’
전술?
그딴 건 지금 필요 없었다.
홀로 백 명을 상대하는 무장이 있는데, 백 대 천은 오히려 쉽지 않겠는가?
“돌격!”
시그탑은 그렇게 부르짖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 * *
“우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의 함성.
“으아아아악!”
그리고 비명이 공존하는 가운데 곳곳에 피가 난무하였다.
“볼 것도 없다! 그냥 밀어!”
저돌적인 락의 선봉대에 와디아의 선봉대는 속수무책이었다.
진형을 탄탄히 하고 맞서 싸우면 이리 밀릴 이유도 없었겠지만 이미 사기는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다.
수습?
그런 인물이 와디아 선봉대에는 없었다. 모두가 수적 우세를 믿었고, 백 명이나 되는 기사단을 믿었던 상황에서 이런 상황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수습할 수 있는 기사들이 전부 단 한 명에게 무너진 상황.
‘살려 줘!’
죽는다는 공포가 머리를 지배하였고.
“빨리! 빨리 도망쳐!”
“후퇴! 후퇴하라!”
공포에 몸이 반응하였다.
싸울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빨리 도망치지 못하면 죽는다! 오로지 그것만이 가득했다.
난전으로 보이나 일방적인 학살의 공간.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로라스가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
“투항하라!”
그래서 로라스는 소리를 질렀다.
“무기를 버린 자! 목숨을 살려 준다! 무기를 버린 자는 죽이지 말라!”
함성과 비명이 가득한 공간.
하나 늪지에 툭 튀어나온 나무 한 그루처럼, 로라스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전장을 지배했다.
이런 학살에 베는 자도, 베임을 당하는 자도 이미 통제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지만.
“무기를 버린 자! 죽이지 말라!”
시그탑이 먼저 반응하였고, 이내 다른 사람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살려 줘!”
“항복! 항복이다! 죽이지 마!”
그리고 적병들마저도 바로 무기를 버리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니, 전장은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우아아아아아!”
그리고 백으로 천의 병력을 굴복시킨 락의 병력은 각자 무기를 높이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메타린 외곽의 첫 번째 전투는 그렇게 락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 * *
“봤지?”
“나, 네 옆에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건 내가 물었던 이야기고.”
락의 병사들은 한창 서로에게 말을 걸었다. 티격태격하는 게 아니다.
그저 기쁨에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듯이 묻고, 답하고, 다시 물었을 뿐이다.
그만큼 스스로도 믿지 못할 정도의 압승.
지휘부도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부상자만 두 명 있고 사망자는 없습니다.”
부대장들의 보고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있던 시그탑은 절로 주먹을 꽉 쥐었다.
대승이라 생각은 했지만, 말도 안 되는 결과 보고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것이다.
“소영주님!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시그탑은 여전히 가슴 뜨거운 뭔가를 숨기지 못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자 로라스는 그를 보며 말했다.
“모두가 축하할 일이지요.”
“소영주! 정말…….”
“당연히 이겼어야 할 전투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피해가 경미하니 기분이 좋군요.”
로라스 역시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벼락처럼 들이쳐서 얻은 승리입니다. 다음 전투에서는 통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이지요. 이번 전투는……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니까요.”
오늘 로라스를 보니 이런 기적은 자주 일어날 것 같았으나, 그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모를 시그탑이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충분히 신나도록 두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승리는 앞으로 전투에서도 계속 사기가 충만하도록 말입니다.”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 정도가 정예라면,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겠으나…….’
역시 방심은 경계해야 했다. 귀한 사람들을 잃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러다 로라스는 처리하지 못한 일을 떠올렸다.
“포로들은 어찌 처리해야 할까요?”
그건 바로 포로의 문제다.
“으음, 예상하지 못했던 바라…….”
시그탑도 그제야 곤란함을 느꼈다.
이번 전투에서 투항한 자들은 오백이 넘는다. 그야말로 아군보다 포로가 더 많은 상황.
무장을 해제했다고 했지만, 그 숫자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군량미는 충분합니까?”
로라스의 물음에 시그탑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충분히 대비는 해 뒀으나 포로를 다 먹이려면.”
보급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근래 락의 재정은 그 어떤 영지보다 풍요로운 편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물자들을 날라 줄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격전을 통해, 적의 진영을 길게 만들고, 소규모로 계속 전투를 지속하려고 한 것이고 말이다.
“으음!”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로라스도 고민이 될 때, 시그탑이 조심스레 말했다.
“풀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시그탑은 슬쩍 포로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며 로라스가 말했다.
“전부 죽이자고 하고 싶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소영주께서 약속을 하셨고, 또 그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시그탑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고, 로라스는 고민하다 대답했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약속도 약속이거니와 아버지의 명성에 해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이들을 죽이면 민심이 락에서 등을 돌립니다.”
“아…….”
“그리고 와카디아 지방에 사람은 적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거둘 사람들.”
“그럼…….”
“일단 포로를 후방으로 보내야지요.”
“그럴 만한 인력이…….”
“없지요. 하지만 이 지역을 포기하더라도 그래야 합니다. 이미 한 번의 대승을 거뒀으니 적들도 예상보다 더 느리게 움직일 터. 적의 사기도 꺾었으니 좀 더 유들이 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그탑도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포로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 하세요.”
“네. 그리 하겠습니다.”
시그탑이 부대장들을 보며 말했다.
“모두 들었지?”
“네!”
부대장들이 달려가 병사들에게 훈시를 하는 사이, 로라스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변수가 있지만, 전략을 수정할 정도는 아닐 테고…… 결국 더 안으로 끌어들여야 하긴 하니까.’
예상하지 못한 대승.
그 대승을 더 활용할 방법.
‘되려나?’
되긴 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이 있다.
‘전장에서 십 할 안전한 것을 추구하는 것도 말이 안 될 터.’
로라스는 결정했다.
“시그탑 경.”
“네. 소영주.”
“새로운 생각이 났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저와 경. 그리고 몇몇은 이곳에 남았으면 합니다만.”
시그탑은 순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소영주. 설마…….”
“위험은 있겠으나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적 입장에서는 충분히 먹음직스럽지 않겠습니까?”
“으음…….”
시그탑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두렵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로라스의 말대로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
‘소영주와 함께라면…….’
괴물 같은 그 위력을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준비하겠습니다. 열 정도면 되겠지요?”
“더 줄여도 됩니다. 테라와 번천만 남기지요.”
“그 두 사람이라면.”
시그탑도 동의하는 걸 보며, 로라스는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전설은 계속 전설로 남아야 그 가치가 있는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