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31)
‘시간을 끌 생각인가?’
바이퍼는 락의 전략이 나쁜 생각은 아니라 판단했다.
락이 얼마나 병력을 끌어모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아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터. 어쩌면 자신의 부대보다 적은 숫자일지도 몰랐다.
변변한 성벽을 갖추지 못한 락이니 수성의 장점도 얼마 없을 터.
그렇다면 요격으로 변화를 줘야 한다는 건 기본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병력의 숫자가 돼야지.’
아군은 천인데 고작 백을 데리고 나타나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더 놀라운 건 병력을 멈췄을 때였다.
락 쪽에서 하나의 인마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혹시 항복 의사를 밝히려는 것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기껏 대군을 끌고 나왔는데 이리 항복을 하는 게 김이 빠지는 일이긴 하지만, 안 싸우고 승리하는 게 가장 좋은 법이니까.
하지만 그건 바이퍼의 착각이었다.
“내가!”
중앙에서 말을 멈추고 크게 외치는 젊은 사내.
“락의 아들! 로라스다!”
제법이다.
저 위치에서 모두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외침. 포스가 실렸기에 가능한 일.
‘벌써 포스 유저인가? 에듀 남작의 아들이 실버스워드 대회 우승자라더니. 저 나이에는 엄청난 경지지.’
바이퍼가 기사로서 순수하게 감탄했을 때 황당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 로라스는 너희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바이다!”
바이퍼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저 젊은이가 심적 부담에 말을 잘못했나 생각도 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그 대가는 피로서 치러야 할 것이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저 무모한!’
바이퍼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젊은 무인에게 가진 호의가 싹 날아감을 느꼈다.
“단장님. 계속 듣고 계실 생각입니까?”
바이퍼가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는 열쇠기사단의 기사인 튜브가 입을 열고 있었다.
“에듀 남작의 아들입니다. 잡으면 전황을 훨씬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지 않습니까?”
바이퍼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이내 상대가 실버스워드 대회 우승자라는 걸 떠올렸다.
“혈기에 멋모르고 나선 모양인데, 열을 끌고 가서 생포하라.”
‘생포’라는 조건을 붙여 튜브의 자존심도 죽이지 않은 바이퍼의 명령에 튜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자이, 나팔라, 가자!”
그리고 동료인 듯한 기사들을 부르고는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 * *
“미친…….”
시그탑은 로라스의 단독 행동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오면서 말했던 정면 돌파라는 게 그리고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말했던 로라스다.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정말 단독으로 저리 치고 나갈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소영주께서…….”
“도와야 하는 거 아냐?”
당황스럽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영주가 여태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고, 무슨 일을 하든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산지도 아니고 이곳은 평지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을 텐데, 소영주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열 손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나온다!”
아니나 다를까?
적측에서 십여 기의 인마가 달려왔고, 모두의 시선이 시그탑에게 쏠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시그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역시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달려나가던 로라스의 미소와.
―지켜보세요. 움직일 타이밍은 경도 잘 알 것입니다.
전음이라고 말해 준 그 기이한 기술로 한 말이 그것을 막았다.
‘열 정도라면…….’
적의 차림이나 그 움직임들이 기사단이라는 게 걸렸지만, 시그탑은 지켜보기로 했다.
* * *
‘역시.’
달려 나오는 적들의 숫자는 열하나.
모두 판금을 두른 전원 기사들이다.
선봉을 격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적의 기세를 꺾는 것도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적의 최정예를 갉아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세계 기사들의 무력. 그리고 장비의 중요성을 깨달은 후, 방심 따위는 버렸다.
내가 문제가 아니다. 아군이 문제였다.
기사단은 어딜 가나 최정예의 병력.
하나같이 선봉에 기사단을 세우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력한 방어와 돌격력을 지닌 부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갑옷부터 파괴해야 하는데, 일반 병들은 그게 쉽지 않았다. 포스 유저가 중요한 게, 이 때문이다.
좀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포스 유저들은 포스를 물리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자신의 무기에 포스를 담아 적의 무기와 갑옷을 파괴하는 수법으로 사용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세계의 무인들에게는 포스가 우러러볼 만한 힘.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무식한 힘자랑으로밖에 안 보였다.
‘에르페유가 같은 마스터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인이 되어, 권신으로 불리는 이유일 테고.’
이 세계의 무인들은 포스의 활용도가 너무 떨어졌다. 그나마 에르페유는 무기보다는 손을 사용해서인지, 내가중수법을 활용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수많은 무인을 이기며 그 위치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 있었다면!’
난 이 수법을 락의 포스 유저들에게 가르쳐 줬을 것이나, 너무 늦게 알았다. 개천지보의 발전과 마법이라는 학문에 빠져 이 세계의 무공에 등한시했고 거기에 무시까지 했던 탓이다.
두두두두두.
어느새 놈들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보여 줘야지!’
오늘 전투로 이곳에서 해 왔던, 그리고 통했던 전투의 형식은 깨질 것이다.
* * *
“저게…….”
바이퍼는 상대가 포스 유저라는 것을 알았고, 공신력 있는 대회인 실버스워드 대회 우승자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열한 명의 기사를 보냈다. 그것도 최정예인 기사단 안에서도 손꼽히는 기사들이다.
그중 반이 포스를 활용할 수 있는 포스 유저들이고, 나머지 반도 포스를 깨달은 자들.
터어어어엉!
그런데 보라.
‘어떻게…….’
창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자신의 수하들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창의 기세는 맹렬해 보였으나 갑옷을 뚫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기사단 돌격!”
바이퍼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먼저 나간 기사들이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패배하면 사기는 바닥에 떨어질 터. 그러기 전에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두두두두두두.
맹렬한 말발굽 소리가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은 정말 빨리 움직였다.
“크허헉!”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 남은 수하가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낙마했다.
“이놈!”
바이퍼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속도를 높여!”
속도를 더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맹렬하게 달리고 있었으나, 바이퍼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놈이 도망을 치기 전에 잡아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런데 말이다.
……!
‘미친!’
순간 바이퍼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놈의 처지에서는 급하게 도망을 쳐도 모자랄 판인데…….
“생포는 필요 없다. 대신 반드시 죽여야 한다!”
바이퍼는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로라스를 보며 소리쳤다.
* * *
‘얼마 만이지?’
전장에 직접 선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미딩에서도 전장에 나서긴 했지만, 그건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계략을 실행시키기 위한 그냥 행동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다르다.
적을 쓰러트리고 제압한다. 그것도 인정과 사정을 두지 않고 말이다.
부으으으으응.
창의 울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도 무쇠창인데 내력을 견디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 멈추지 않는 걸 보면.
‘흥분한 것 같은데.’
흥분했다면 힘 조절이 제대로 되지 못했을 것이고, 예상보다 더 빨리 지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런 탐스러운 열매를 두고, 흥분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웃기지 않는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적 지휘관과 기사단이 보였다.
지금은 냉정보다는 흥분하고 날뛰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 선봉으로, 홀로 나섰다.
아군이 내력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말이다.
‘전력을 다해 본 적이 없으니. 그게 좀 걸리는군.’
걱정하는 건 아니다.
무리라 판단했으면 본능이 억눌렀을 것이나 그런 건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한계를 명확하지 않으니 마음에 걸리는 것뿐.
‘시험해 보면 알겠지!’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말이다.
창을 들었고, 달려오는 이들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건 시퍼런 창날.
갑옷을 입은 무인들의 싸움. 그리고 대규모 난전에서는 감각이 필요하다.
타아아앙!
창날은 막았지만, 거기서 전해져 오는 순수한 물리력은 그대로 막을 수 없었다.
말을 타고 있으니 허리 아래쪽이 흔들린다.
‘힘은 좀 흘려야 할 테고.’
동시에 창을 휘둘렀다.
터어어엉!
강력한 물리력과 동시에 내력을 쏟아부었다.
서로 달리는 속도 때문인지, 처음 나왔던 놈들을 쓰러트렸던 수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힘을 전달할 시간이 없으니, 물리력 대신 무기에 내력을 실어야 할 테고.’
바로 내력을 실으니 셋의 하나는 내력에 밀려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생각했던 이론을 바로 실전에서 써먹으니, 빨리 익숙해질 것 같은데 말이다.
‘나쁘지 않아!’
설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전장의 신병.
최소한 이 몸은 그렇다.
그 탓에 새로운 감각이 마구 들어온다.
주변을, 몸통을 치는 물리력도 그리고 손에서 전해져 오는 짜릿한 느낌까지.
그 새로운 감각 중에는 고통은 없고, 감정 안에서 불안은 없었다.
나는 양 떼에 뛰어든 사자.
양 떼가 수천 마리 덤벼도 사자가 두려워할 필요가 있던가?
아쉬운 게 있다면 손은 두 개고 무기는 한 개일 뿐이라, 더 많은 양을 제압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대량 살상.
가능은 할 것 같다. 진기를 더 뽑아내면, 그래서 단 일 초에 갑옷을 파괴하고 그 속살을 베어 낸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개천지보의 진기를 더 뽑아내야 할 터.
하지만 그 선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한계를 확인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적 기사단의 붕괴.
붕괴시키기 전에 진기의 부족함을 느끼느냐? 아니면 남느냐?
확인은 그때 해도 충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야가 극도로 좁아졌다.
쓰러트리는 데 너무 집중한 탓인가, 보이는 건 나의 창끝.
“우아아아!”
그리고 죽어라 소리를 질러대는 적 기사들뿐.
이 역시 나쁠 것 없다.
지금의 난 지휘관이 아닌 한 명의 무인. 그리고 단 한 번의 적을 갈라낼 한 자루의 창.
난 그에 충실했고, 그렇게 적을 갈라냈다.
그대로 적을 갈라냈고.
“후아아아!”
시야가 다시 확 넓어지는 바람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재미있네.’
말 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싸웠는데, 멀쩡히 말에 타 있는 적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렇게 남기면 안 되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뭘 알아봐야 할까?’
생각하기 무섭게 적의 대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소리쳤다.
“일단 떨궈! 떨구고 상대해!”
저 말은 나를 말에서 내리게 하겠다는 건가?
카아아아아앙!
맞나 보다. 그들의 창끝이 내가 아닌 말을 향해 있었다.
‘후회할 텐데 말이다.’
말 위에서 그대로 몸을 날렸고, 그들 사이에 떨어졌다.
귀한 전마를 죽게 할 수는 없다.
마상전에서는 신병이나 두 발이 땅 위를 딛는 순간, 난 미쳐 날뛰는 사자가 아니다. 노련하게 놔줘야 할 놈은 놔주고, 잡아야 할 놈은 잡는 사냥꾼.
두두두두두두두.
사방에서 날뛰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좌우로 휘둘러지고, 찔러 오는 창들.
타아아아아앙!
두 다리는 쉼 없이 움직이며, 적의 창은 창으로 그리고 남은 손은 적의 말을.
‘내가 내려왔으니, 너희도 내려와야지?’
달려오면서 내지르는 창의 속도는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물리력이 형성된다.
그럼에도 걱정하지는 않았다.
일 대 백의 싸움.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모두에게 공평하겠지.’
그리고 이 싸움이 끝나면.
‘나는 전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