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28)
페라 남작은 붙어 버린 입술을 간신히 뗐다.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잔뜩 짓눌린 목소리에 한없이 겁먹은 표정.
‘그래도 귀족이었다는 양반이, 존대까지 하네.’
그 모습을 본 엔케이는 잠깐 안쓰러운 생각까지 들 정도로, 페라은 인간의 꼴이 아니었다.
“페라 남작님 아닙니까?”
“그렇습니다만…….”
“와디아 백작님의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엔케이의 대답에 페라의 두 눈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백작님이…… 저를 잊지 않으셨군요…….”
“의뢰를 받고 행적을 찾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설마하니 하늘 산맥 안에 계실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크…… 그 빌어먹을 몬스터들이!”
“쉿! 소리를 낮추십시오. 오크들도 그렇고, 이 주변에 마물들이 상당합니다.”
페라가 두 손으로 입을 막는 걸 보며 엔케이가 말했다.
“남작님의 영지에서도 의뢰를 받았습니다. 돌아가셔야지요!”
“그렇게만 되면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라고까지 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는 돈을 받고 움직이는 용병들이니까요. 성공 보수로 남작님의 가문에 보상을 약속을 받았으니까요. 다만…….”
엔케이는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펜과 함께 페라에게 건네며 말했다.
“만에 하나를 위해서 그런 건데 여기다 서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페라가 양피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쿠오오오오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오크의 숨소리.
“남작님, 시간 없습니다. 빨리.”
엔케이의 재촉에 페라는 급하게 양피지에 서명했다.
‘됐다!’
그리고 엔케이는 웃었다.
그의 서명까지 받은 이상 계약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정도로 완벽해졌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이리로.”
엔케이는 페라 남작을 데리고 움직이며 생각했다.
‘소영주가 이리 무섭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와디아와 페라의 재산을 어느 정도 털어먹는 걸로 끝낼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주 탈탈 터는 것이다.
특히 페라는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이러니 사람은 줄을 잘 서야지. 아! 저번에 털보 놈 말한 게 더 찝찝해지네.’
엔케이는 그 찝찝함을 날리려면 최선을 다해 눈에 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 *
“각 조 점호!”
“하나, 둘.”
이곳저곳에서 숫자를 확인하는 소리가 들렸다.
육백에 가까운 사람들을 통제하기 쉽지 않아, 토니는 이십 개 조로 나눴다.
그렇게 각 조에서 인원을 확인한 후였다.
“대부!”
20조의 조장 하나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토니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한 명이 없습니다.”
순간 사람들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토니는 급히 물었다.
“누구?”
“그게…… 페라 남작이…….”
그리고 그 순간 걱정하는 표정들이 싹 사라졌다.
“잘됐네.”
“오래 버틴다 했다.”
“비명 들었어?”
“못 들었지. 소리 지를 시간도 없이 뒈져 버린 거 아냐?”
곳곳에 수군거리는 소리에 토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사람, 결국 사고를 치는구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잘된 거지요.”
“꼴 보기 싫었는데. 진작 도망치다 뒈져 버려야지.”
그 모습에 토니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계속 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모두들 주목!”
토니의 외침에 사람들이 그를 주목했다.
“모두 그동안 고생들 많았네.”
“…….”
“못난 이 사람을 믿어 줘서 나름 큰 피해 없이 버틸 수가 있었어.”
토니의 말이 계속됨에 따라 좌중은 깊은 침묵 속에 빠졌다. 그리고 눈에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토니의 말투가, 그리고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사흘 후에 우리는 산에서 내려갈 수 있게 되었네.”
……!
“오늘 협상을 완전히 끝냈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사람들.
“오크들이 락과 협상을 했다는군. 락이 당신들의 몸값을 지불하기로!”
“그게 정말입니까…… 락이…… 우리를…….”
조장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는 말에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했던 기한이 얼마 안 남았지 않은가.”
“정말 내려갈 수 있는 겁니까?”
“사흘 후에는 내려갈 수 있어. 우리를 호위할 병력도 온다더군.”
뛸 듯이 기뻐할 소식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아직 제대로 실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들을 보며 토니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를 살려서 노예로 부리는 것도 이 오크들이 락과 나쁘지 않은 관계여서 가능한 거였어. 아니면 그냥 다 죽였을 텐데.”
토니는 이 협상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락은 우리가 노예로 잡힌 것을 몇 달 전에 알게 되었다. 몸값 협상을 하려 했으나 그 액수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락은 오크와 관계가 있기에, 최대한 그 액수를 깎았고, 근래에 재정을 마련해 협상에 성공했다는 것.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리고 토니의 망설이는 말투에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값을 자네들이 온 영주들이 주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이게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군.”
토니는 계속 말했고 사람들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앙되기 시작했다.
“우리를 이렇게 버렸는데! 가능하면 저희도 락에 살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다른 사람들도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대부.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락에 미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저도 옮기고 싶습니다!”
“저도 이번에 정착하렵니다. 제 목숨을 사 주셨으니까요!”
영지에서 온 병력들은 물론이고, 용병들마저도 한마디씩 하는 걸 보며 토니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들을 락에 편입시키는 것.
그게 소영주로 받은 궁극적 목표. 보니 최소한 반 이상은 뜻대로 할 수 있는 예감이 들었다.
이유는 정말 많지 않은가.
‘이들 가족까지 오면 최소 삼백여 가구는 늘어나겠구먼.’
토니는 흐뭇해졌지만,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계속 이 사람을 믿어 준다면 그 문제도 내가 해결해 주지. 몸값의 탕감은 물론이고, 정착금까지 지원하도록!”
“정착금!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가진 것도 없는데 어찌 사나? 우리 영주님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먹고 살길을 열어 주실 거야. 그분이 자네들 몸값을 지불했다는 걸 잊지 말라고!”
토니는 그리 대답하며 속으로 다시 웃었다.
‘이 년 넘게 고생한 대가를 이런 식으로 주는 거지만, 안 넘어오고 배겨?’
임무를 아주 훌륭하게 완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래서 소영주에게 은혜 갚음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토니는 더없이 기뻤다.
* * *
하늘 산맥에서 육백에 가까운 사람들이 내려왔을 때, 많은 락의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시간을 냈다.
마을 입구에 뜨거운 수프와 고기 종류의 요리들. 그리고 시원한 맥주까지 준비했다.
“우아아아아아!”
그리고 그들이 보이자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환영했다.
‘뭐지…….’
‘환영받고 있는 건가…….’
락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뜻밖의 환영에 당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슴이 뭉클해졌다.
노예로 풀려난 처지일 뿐이었다. 게다가 락이 자신들의 몸값을 지불했으니, 영지민들 입장에서 자신들은 돈만 쓰게 만든 존재들일 뿐이다.
자신들이라면 절대 이리 환영하지 못할 터.
하지만 이리 환영해 주고, 오자마자 따뜻한 음식을 데워 주니 그들의 눈시울은 절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몇몇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2년이 넘도록 매일 같은 환경, 매일 비슷한 음식을 먹어 왔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 그리고 사람이 모였을 때의 따뜻함을 느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응은 괜찮은데.’
그걸 지켜보던 로라스는 내려온 사내들과 락의 영지의 사람들을 보며 만족스러웠다.
이 작전은 극비리에 계획된 것.
시작할 때 부친인 에듀에게도 숨겼을 정도로, 이 작전을 아는 이는 정말 극소수였다.
그 덕분에 락의 영지민들도 내려오는 이들이 몬스터들에게 사로잡힌 노예로 생각했기에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락에서는 이웃 사람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여하간 이 순간을 위해 로라스는 꽤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가장 문제는 락이 천년나무집 오크일족과 동맹이라는 관계를 어떻게 밝히느냐였다.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토니가 이들을 정말 잘 통제하고, 평소에도 협상이 가능한 이유는 락과의 친분 때문이라는 걸 강조해 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사람들이 노예 생활을 하게 된 건 그들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세뇌하듯 말해 왔고 말이다.
그리고 이 허술한 변명에 화살받이를 세웠다.
그게 바로 페라 남작이었다.
페라가 계획과는 달리, 공을 탐하여 무리하게 그들의 영역까지 치고 들어갔다는 그런 이유.
이 문제는 통했다.
모든 이가 페라를 증오하고 있는 상태였고. 마지막까지도 자신 혼자만 탈출하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락의 주민들에게도 계획이 필요했다.
사실 이건 문제도 아니다.
락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주와 소영주에게 품은 신뢰는 종교 수준이었다.
에듀가 흙으로 맥주를 만든다고 해도 믿을 테고, 로라스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 거라고 해도 믿을 이들.
이렇게 모든 게 준비되었고 덕분에 오늘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들을 바로 전력으로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조금 아쉬웠다.
건장한 사내 육백을 바로 쓸 수 없다는 건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이들 대부분은 와디아 백작과 페라 남작의 영지민들. 그들이 가족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전쟁에 동원할 수 없다.
페라 남작은 무리한 사내들을 동원하여 휘청이는 상황이라 별 영향이 없을 테지만, 와디아 백작의 병사들은 아닌 것이다.
‘뭐 그 사실이 락에 정착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
이들도 알 것이다. 특히 와디아 백작소속의 병사들은 더더욱 말이다.
곧 자신들의 고향과 이 락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여하가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에듀가 직접 나와 그들을 위로했다.
“모두 고생들 많았다. 그래도 우리 영지를 도우러 온 사람들이었는데. 너무 늦었던 걸 사과한다.”
에듀의 사과에 모두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구해 준 락의 영주가 저리 사과하고 나올지 몰랐던 탓에 더더욱 그랬다.
“당장이라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이 땅에서 푹 쉬어도 된다. 다만 당분간은 어느 정도의 통제만 따라 주기 바란다.”
에듀의 외침에 내려온 이들은 뭔 소린가 싶었다.
하지만 며칠 후 현재 락이 처한 상태를 알고 기겁을 했다.
‘그럼 적병이 될지도 모르는 우리들을 구해 왔단 말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람들은 당황스러워했고, 그걸 토니가 나서서 다시 다독였다.
“전쟁은 전쟁이고, 사람은 구하고 봐야지. 우리 영주님과 소영주님이 그러신 분이야. 며칠 지내봤으니 여기 분위기가 어쩐지 알 거 아니야.”
“…….”
“천운이 내렸다고 생각하게. 우리 영주님, 소영주님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을.”
토니의 말에 와디아 백작 측에서 파견되었었던 간부 하나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뭔가?”
“괜찮겠지요? 그래도 저희는 적이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내가 말하지 않았나. 사람은 구하고 봐야 했다고. 물론 솔직히 나도 이해는 되지 않아, 막·대·한 몸값까지 지불하면서까지 이 시기에 구한 건.”
“…….”
“하지만 우리 영주님은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시지. 자네들도 알지 않는가? 에서 토벌전이 있을 때마다 많은 용병들이 몰리는 거. 신뢰 때문이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함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옛날부터 락은 평판이 좋았다. 특히 세금이 낮은 걸로는 와카디아 지역에서 최고였다.
“모른 척하고 얌전히 있어. 영주님은 당신들에게도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시니까. 전쟁이 끝난 후 모른 척하고 정착해. 정착 비용도 지원해 준다니까.”
“솔직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저희들에게…….”
토니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천운이라 하지 않았나. 우리 영주님과 소영주님 같은 분들은 다른 어디에도 없는 분들이니까.”
토니는 아직도 두려워하고 떨떠름 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염려들 하지 말고 크게 소란만 피우지 마. 노예 생활보다 낫잖나. 그리고 내일은 개간하는 평야나 같이 가 보지. 우리 락은 개간한 땅의 반은 개간한 사람에게 줘.”
“그게 정말입니까!”
“여기 사람들, 누구든 잡고 물어보라고. 내가 어디 거짓부렁 하나, 두고 보면 알 게야. 그러니 자네들은 행운에 감사하고 여기서 한몫 잡을 생각들이나 하시게.”
토니의 말에 사람들은 이 엄청난 행운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