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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27화 (127/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27)

“곤란하다고 하시네…….”

대답하는 에르자일의 표정에도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설마 스승인 헤르메스가 방관하라는 명령을 내릴지는 그녀도 몰랐기 때문일 터.

그런 에르자일을 로라스는 오히려 달랬다.

“당연한 거야! 그런 표정 지을 거 없다.”

“어떻게! 그냥 두고 보라고 하실 수 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야기해야 했는데!”

에르자일은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스승이 당연히 도우라는 말을 할 거라 생각했기에, 너무 늦게 보고한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마. 스승님의 입장도 생각해야지.”

“그러니까 당연히 널 도와야지.”

에르자일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 하자 로라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예상했던 거래도. 그리 열 내려면 마법 무구라도 만들어 주던가.”

“저쪽에서 마법사가 동원된대?”

“모르지. 하지만 준비는 해야 되겠지.”

“알았어. 그리고 저녁에 스승님이 다시 연락하신다고 하셨어.”

“그래?”

헤르메스가 돕지 못할 거라는 건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마음에 걸리긴 한 듯했다.

“그럼, 오랜만에 마법 수련하면서 기다려야겠다.”

로라스의 말에 에르자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좋지. 우리 락에 마법 전력은 너랑 번천 님밖에 없을 테니. 내가 전쟁에서 유용한 마법 전술 몇 개 알려 줄게.”

로라스는 웃었다.

‘우리 락이라…….’

아직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락도 에르자일이라는 고위마법사를 가질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에르자일과 로라스는 마탑 한 층을 통째로 비워 연습장으로 삼았다.

“전쟁에서 가장 효율적인 마법이 뭔지 알아?”

에르자일의 물음에 로라스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폭발형 불덩어리겠지.”

“좋은 선택이야. 강력한 살상력을 지닌 광역 마법이니까. 하지만 마법 전력이 극소수라면 겨우 몇을 쓰러트리기 위해 쓰는 건 아깝지 않을까?”

“공포를 전염시키고, 진열도 무너지는 효과도 있으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지. 하지만…….”

에르자일은 두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마나 소모가 심한 것도 인정해야지. 몇 개나 만들어 낼 수 있겠어?”

“마나석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긴 하지만…… 네 말뜻은 알겠다. 효율에 대한 문제구나.”

“그래, 폭발형 불 마법보다는 써클이 낮은 마법을 더 많이 빠르게 사용하는 게 효율적일 수 있어. 적의 규모를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지.”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불과 뇌전 등의 공격 마법은 보기에 화려하여 마법이라면 그쪽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마저도 그쪽을 먼저 생각했으니.’

로라스는 그리 생각하며 물었다.

“추천할 마법은?”

“적들의 체력을 약화시키고, 우리 쪽 병력을 강화시키는 마법.”

“대규모로 그게 가능할까? 나는 아직 네 개의 원밖에 그리지 못해.”

“전투 지역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지 않아?”

에르자일은 로라스를 뚫어지게 보며 묻는 말에, 머리에 확 와닿는 게 있었다.

“마법진!”

“그래, 우리는 미리 준비할 수 있잖아.”

“효과가 있을까?”

“엄청난 영향을 줄 수는 없겠지만, 적의 숫자를 생각해 봐. 한 사람의 전투력을 숫자로 ‘십’이라 생각했을 때. 공격 마법으로 수백을 처리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수천의 효과가 있지만, 약화 마법으로 개인의 전투력을 ‘구’ 정도만으로라도 만들 수 있다면?”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총 전투력은 낮아진다는 이론이군.”

에르자일은 바로 그거라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물론, 이 이론이 옳게 적용될지는 알 수가 없어. 나는 전장에 서 본 경험이 없으니까. 또 실제로 벌어진 전투에서도 효과가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경향이 분분했거든.”

“해서 나쁠 건 없지. 전장은 우리가 선택할 거니까. 미리 준비해서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반드시 해야 할 것이고.”

로라스는 그리 말하며 웃었다.

“그 진의 설치는 도와줄 거지? 믿을 만한 사람만 동원할 거야. 괜히 나중에 네가 도왔다는 소문이 돌면 곤란하니까.”

“상관없어, 전장에 나서지 않았는데. 이 정도밖에 도울 수 없는 게 더 미안하지. 어머니 뵐 낯이 없다니까.”

“이것만으로도 널 업고 다니시려 할걸.”

에르자일의 변화.

가만 지켜보면 나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인 것 같았다.

‘딸 대하듯이 하시니…… 외로웠던 에르자일이 정이 많이 갔던 거지…….’

자신에 대한 집착도 그 부분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도 같았다. 내 배우자가 되는 순간 어머니와는 정말 가족이 되는 것일 테니.

로라스는 계속 꼬리를 물며 딴생각을 하다,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집중할 일이 있었다.

로라스는 에르자일에게 마법진의 구조. 그리고 그 영향력의 영역. 그리고 그녀를 상대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고, 로라스는 헤르메스와 통신구로 연락을 할 수가 있었다.

“미안하구나, 로라스.”

마나 수정구를 통해 들려오는 헤르메스의 목소리. 돕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하는 감정이 여실히 전달되었다.

“아닙니다. 스승님. 충분히 이해합니다.”

“주군이 계시면 무슨 방법이 있겠지만…… 지금 황도로 가셔서 어찌 손쓸 방법이 없다. 빌어먹을!”

헤르메스는 욕설과 함께 자신이 왜 그를 돕지 못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베스타인 공작이 에렌을 비웠다는 것. 그래서 대공자인 디존슨이 임시로 에렌의 영주가 되어 일을 처리하는데, 형평성 때문에 절대 관여하지 말라는 공고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디존슨…… 혹시나 했지만 와디아 뒤에 네가 있었단 말이지?’

와디아가 감히 영지전까지 생각한 그 내막을 아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 헤르메스가 다시 말을 전달해 왔다.

“돕지는 못하지만, 훼방은 놓을 수 있지!”

“훼방이요?”

“와디아! 내가 몇 마디 하면 그놈이 그 영지전 계속할 수 있겠어? 최소한 눈치가 보일걸!”

협박하겠다는 말에 로라스는 기겁을 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영지전은 자신도 바라는 바다. 락을 확장시키려면 더 많은 땅과 인구. 그리고 걸맞은 지위가 필요하다.

와디아는 억지 명분으로 락을 침공할 수 있지만, 락은 반대로 억지 명분을 세울 수는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리 나와 주면 락이 영토 확장의 명분은 절로 만들어진다.

헤르메스는 와디아를 협박함으로 도와주는 건, 오히려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

“스승님에게 부담되는 제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담은 무슨. 넌 늘 내 자랑스러운 제자지. 내가 인복은 있어. 큰놈도, 작은놈도, 에르자일과 너까지.”

“그러니 끝까지 믿어 주시면 됩니다. 마탑을 세워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요.”

“혹시라도…… 정말 위험하다면 말이다. 그때는 꼭 내게 말하거라, 대공자와 각을 세우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손을 쓰겠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대화 내내 로라스는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애정 어린 관심 이런 게 정말 기분이 좋았다.

로라스로 살기로 결정한 후, 이런 경우가 있을 때 보람까지 느꼈다.

여하간 그렇게 대화가 끝났고 로라스는 생각했다.

‘디존슨, 적당히 해야 할 텐데 말이지.’

덕분에 락을 확장할 기회를 얻었지만, 그 포지션이 계속된다면 앉아서 당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핏줄이라는 거에 감사해라. 너를 그냥 두고 왔던 건 할아버지 때문이었으니.’

로라스는 진심으로 그가 선을 넘지 않기를 바랐다.

* * *

“이겁니다! 소영주님!”

마을의 대장장이 율터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내게 내민 철 덩어리.

판금 갑옷이라 불리는 물건이다.

“여태 갑옷을 착용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해서…… 제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소영주님의 것을 만들어 봤습니다.”

너무 자랑스러워하고, 너무 기뻐하는 표정에 로라스는 차마 그 갑옷이 불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보니 사비까지 털어 만든 건데, 그런 말을 했다가는 상처받을 게 분명했다.

“오! 좋네요.”

그런 이유로 로라스는 일단 갑옷을 건네받고 칭찬부터 해야 했다.

‘응?’

그러다가 생각 이상으로 가볍다는 걸 알고 살짝 놀랐다.

로라스는 사실 단 한 번도 갑옷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에게 갑옷은 거추장스러운 철 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물건.

그 탓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다.

‘오십 파운드? 육십 파운드?’

근으로 따지면 사오십 근의 무게. 게다가 따로따로 착용하고 구조를 보면 무게가 잘 분산되어 있는 것이, 착용해도 크게 부담은 될 것 같지 않다.

“소영주님, 제게 소영주님을 도울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무슨 영광까지, 제가 고마운 거지요.”

율터는 로라스에게 다가오며 갑옷 착용을 도왔다.

상체 부분과 어깨를 보호하는 견갑부터 하갑과 투구까지. 혼자 입는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나, 율터가 도와주니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이것도 기술이었다!’

그리고 판금 갑옷을 착용한 로라스는 금방 움직임에 큰 불편함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세밀한 힘 조절까지는 적응 기간이 필요하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어느 정도의 방어력이 있는 겁니까?”

로라스의 물음에 율터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크로스보우도 튕겨 냅니다. 소영주님.”

“크로스보우까지?”

“이제 우리도 질 좋은 철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한 곳만 집중적으로 타격당하지 않는 한, 화살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내가 편견을 가졌구나…….’

로라스는 자신의 편견, 그리고 자만을 빠르게 인정했다. 처음 봤을 때 단순하게 철 덩어리라고 무시한 것이 실수였다.

‘둔기류가 왜 발전했고, 왜 그렇게 포스 유저를 꿈꿨는지 알겠다!’

기사가 이 정도의 무구를 갖춘다면, 일반 병사 열도 너끈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왜 기사단이 최강의 전투 단체인지, 정확한 이유를 깨달은 로라스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가장 상식적인 걸 몰랐으나 이제는 알았다. 활용할 수 있는 거면 바로 활용해야 한다.

“이게 얼마나 보급되었습니까?”

율터는 바로 대답했다.

“딱 백 갭니다. 마지막은 소영주님을 위해 만든 거라서요.”

“백 개라…… 많지 않은데. 비용의 문제입니까?”

“돈도 그렇지만 손이 많이 갑니다. 아직 마을에 대장장이는 저뿐이라…… 도제를 몇 들이긴 했지만, 아직은 만들 실력이 되지 못합니다.”

로라스는 말했다.

“드리프 경에게 말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기술자들도 더 불러 모으고요.”

“그러면야 좋지요. 예전에 비하면 풍족한 편이긴 하지만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요.”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 알았으니 달라질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귀하다.’

그려야 할 그림이 하나 더 늘었다. 그리고 그걸 완성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적이 이런 걸 입고 있으면 병들의 희생이 커질 터. 이것도 답을 찾아봐야겠군.’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 * *

“빌어먹을 새끼.”

“저 새끼만 아니었어도 시간을 조금 단축했을지도 몰라!”

들려오는 목소리에 페라 남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한때는 저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영주로서 그리고 지휘관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모멸과 멸시.

쏟아지는 비난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날들.

토니라는 그 장년인이 아니었다면, 밤중에 살해를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나가기만 하면!’

‘탈출에 성공하는 날에는!’

하지만 언제나 마음뿐이었다.

이곳은 산속이지만 작은 섬이나 다름없었다. 탈출할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곳.

시간이 지나면서 페라 남작은 말라 갔다.

다행히 책임자인 토니는 자신에게도 먹는 것과 쉬는 것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말라 가는 건 정신적 이유.

‘말…… 나도 말이란 걸 하고 싶다…….’

이 년이 넘도록 그가 말을 내뱉은 건 열 마디가 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인간이라는 자각을 잃어 가고 있을 때.

“페라 남작님입니까?”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생겼다.

“남작님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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