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24)
로라스는 저택에 돌아오니,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하늘 산맥 지역의 모든 영주들은 와이다 백작이 주최하는 영주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령이 왔다는 것.
“뜬금없습니다. 갑자기 무슨 영주 회의를 말하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구나.”
로라스의 물음에 에듀도 뭔가 짐작이라도 되는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참석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참석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도 이 지방의 대영주란 불리는 사람이다.”
“뻔히 함정인 걸 아는 데 가는 건 아닙니다. 아버지.”
“내게 감히 대놓고 뭘 할 수 있겠느냐?”
에듀의 말에도 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는 법입니다.”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하지만 내가 그리 당할 사람으로 보이느냐?”
로라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만의 하나의 경우는 늘 있는 법이니까요.”
“시그탑을 데리고 가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다시 고려해 주십시오. 어떤 준비를 했을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로라스가 간곡하게 말리자 에듀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그탑 경이 마스터이고, 아버지께서도 그 못지않다는 걸 소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손이 열손을 당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으음…….”
로라스는 진심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에듀, 시그탑 두 사람 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 웬만한 세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두 사람은 어찌 빠져나올 터.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성격은 독한 편이 아니다.
먼저 손을 쓰지 못할 것이고, 상황에 맞춰 대처할 텐데, 다른 수행원들을 인질로 삼기라도 하면 정말 만의 하나의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었다.
이런 일은 절대 무력만 믿고 움직여서는 안 됐다.
‘아예 먼저 다 죽여 버린다면 모를까!’
로라스의 눈에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시작하겠단 말이지?’
분명 락을 탐하는 자가 나올 거라 생각은 했으나, 그 방법까지는 미리 예측할 수는 없기에 기다렸다. 그런데 그 방법이 에듀가 조금이라도 다칠 확률이 있는 방법이라면 말이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로라스의 냉랭한 음성에 에듀가 물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느냐?”
“무시하시지요. 어차피 그쪽에서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면, 극단적인 방법도 취할 게 뻔합니다.”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 아닐까? 와디아 백작이 우리를 어찌할 명분은 없다.”
“명분은 만들면 됩니다. 두고 보시면 압니다. 억지 명분을 가지고 영지전을 하려 할 테니까요.”
“으음…….”
쉽지 않은 선택인지 에듀가 다시 신음성을 내었을 때, 로라스가 그를 부르며 말했다.
“아버지, 제게 그림을 보여 달라 하셨지요?”
“그랬지.”
“그 그림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기에는 명분이 필요했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습니다.”
에듀는 그제야 로라스의 그림의 전체적인 부분을 볼 수 있었다.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단 말이지?’
아들의 생각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들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전쟁…… 그건 입에 쉽게 담아서는 안 될 단어이기에.
“아버지!”
하지만 에듀는 결정해야 했다.
“정말 만에 하나 아버님께 문제가 생기면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말입니다.”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로라스의 살기.
“제가 악의(惡意)를 품게 됩니다. 제 악의는 반드시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제 의견을 따라 주십시오.”
악의.
단순한 두 글자로 이뤄진 단어였으나 로라스의 입에서 그것이 나왔을 때, 에듀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로라스가 그것을 품었을 때 자신과 와디아의 문제만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 * *
락은 계속 발전했으나 주변의 분위기는 평범치 않았다.
에듀가 영주 회의에 참석하지 않자, 와디아는 크게 화를 냈다.
물론 에듀가 왔을 때 그를 수많은 명분으로 가둬 두려 했다. 영주가 이곳에 있는 이상 락을 삼키는 것은 어렵지 않기에.
하지만 설마하니 그가 참석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본심은 본심이고, 감히 자신의 권위를 무시했다 생각했다.
그런 와디아의 분노에 부채질한 건 다른 영지들의 영주였다.
말은 안 했지만 락을 시기와 질투했던 이들.
그들은 에듀가 건방지고, 막무가내라며 성토하기 시작했다.
회의가 진행될수록 락 때문에 무법자들이 날뛴다는 둥, 외지인들이 쏟아져 치안이 불안해진다는 등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좋은 말을 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분위기가 그렇게 쏠리자, 락과 친분이 있는 영지의 영주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특히 베론 남작은 좌불안석이었다.
‘이거 큰 사달이 나겠구나!’
말이 필요 없다.
에듀와 락을 성토하는 이들의 눈에 탐욕이 불타오르고 있으니까.
‘이러다가는…….’
최악의 상황이 나올지도 몰랐다.
영주들이 모인 회의는 꼭 참석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잘나가는 영지일수록 정치가 필요했다.
척박한 이 지역에서, 뜯어먹을 게 있으면 모두 달려들었으니까.
“백작님의 권위를 무시했습니다.”
“지역의 평화를 위해 강력하게 경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피해가 있는 지역은 배상도 해야 하겠지요.”
이쯤 되면 억지도 억지가 아니게 된다.
‘귀족이란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휘말려 어느새 락은 천하의 나쁜 영지가 되고, 자신들은 정의의 사자가 되어 벌을 내리는 입장이 된다.
하지만 베론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도 배척받는다. 아니, 그 전에 이 땅을 무사히 빠져나갈지부터가 걱정해야 할 판이다.
자신과 에듀가 동맹 관계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으니까.
“연합하여 죄를 물어야 합니다.”
“백작님께서 주관하시면 저도 모든 병력을 동원하겠습니다.”
다행히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는 없었지만, 상황은 최악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백작…… 당신이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이렇게 대놓고 억지를 부릴 수 있는 건 와디아가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그의 탐욕이 다른 영주들을 전염시켰다.
베론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현명한 여러분들의 의견은 잘 들었소. 나 와디아! 벨키에 지방의 대영주로서 락의 오만방자함을 간과하지 않기로 했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결국, 병력이 동원되기로 결정됐고.
와디아 백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가 고맙소! 이리 영주들이 뜻을 모으면 에듀 남작도 정신을 차릴 터!”
와디아는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해 준 영주 하나하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공은 잊지 않을 것이오!”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락은 나눠 먹기로 하기로 결정된 영주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자신의 영지로 움직였다.
‘이걸…….’
베론은 도망치듯 와디아의 영지를 빠져나가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락과의 동맹을 지켜야 하느냐?
아니면 대세에 편승해야 하느냐?
베론은 가능하면 어느 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 * *
“이, 에듀. 베론 남작님의 결정.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에듀가 손을 잡고 하는 말에 베론은 웃을 수 없었다.
‘내 선택이 맞기를!’
그렇게 바라고 또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베론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에듀는 말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몬스터 웨이브도 이겨 낸 우리입니다. 이번에도 큰 피해 없이 넘길 겁니다.”
베론 남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100퍼센트 의리 때문에 락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예전 몬스터 웨이브 때 락의 저력을 본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 오크부대는 또 어떠했던가?
락은 분명 강했다. 그래서 선택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와디아 백작의 연합군의 전력도 만만한 게 아니다. 지능이 없어 보이던 몬스터들이 아니다. 인간의 군대다.
“병력을 집결하고, 지휘 체계를 만들기 전까진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와디아 백작에게 사람을 보내 잘 협상하시는 것이…….”
“남작님.”
베론이 조심스레 하는 말을 자른 에듀가 말을 이었다.
“영주 회의에서 어떻게 락이 토벌 대상이 되었는지 말씀해 주신 게 베론 남작님이십니다. 지금 와디아 백작과 대화가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하아…… 부끄럽지만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군요. 제가 과연…….”
베론은 슬쩍 에듀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 앞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인가?’
영주 회의의 이야기를 전하던 중 베론은 살짝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전한 소식이라면 지금 에듀는 아주 심각하게 이걸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위로까지 하려 한다.
‘예상하고도 이런 반응이라면…….’
그러고 보니 영주 회의에 뚜렷한 이유 없이 참석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정말 필승의 수라도 있는 것인가?’
베론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질 때 에듀가 말했다.
“베듀 남작님의 걱정을 덜어 드려야겠군요. 신의를 보여 주셨으니 숨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게 무슨…….”
“가시지요.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에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하는 말에 베론도 따라 일어섰다.
움직이면서 에듀가 말했다.
“짐작하셨겠지만, 우리는 이미 이런 일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고민이 많았지만, 우리 락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 때문에 고민한 거였습니다. 그리고 와디아 백작은 더 시간을 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이번 영주 회의를 소집한 것 같습니다만.”
에듀는 두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늦은 겁니다.”
베론은 마른침을 삼켰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락이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 * *
“후우우!”
나름 긴장한 탓일까?
시선 끝의 창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이럴 필요는 없는데!’
정말 그럴 이유가 없다.
국가 간의 전쟁도 아니고, 큰 영지의 싸움이 아니다.
와카디아 지역은 제국에서 가장 빈한 영지들이 모인 곳.
큰 곳 입장에서는 고만고만한 힘이 부딪치는…… 그런 아이 같은 싸움이다.
그런 전쟁에서는 소수의 막강한 무인들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락은 그런 막강한 무인들이 많다.
‘마음이 약해진 것뿐이지.’
이곳의 평화에 너무 적응해 버렸다.
전장…… 그곳에 선 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다시 설 생각을 하니 생각이 많아져 버렸다.
잃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왔던 영지의 사람들.
새로운 희망을 품고 락에 들어온 이주민들.
전쟁이 벌어지면 아무리 잘 싸운다고 해도 분명 누군가는 죽는다.
그 절대적인 사실이…… 나를 약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회피만 하자면 더 큰 전쟁을 치러야 한다.’
하지 않을 싸움이라면 하지 않을 터나, 이번 싸움은 해야 한다.
제대로 힘의 우위를 알려, 격이 되지 않는 놈들은 감히 락에 침 흘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해야 하는 그런 싸움이다.
그래야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고, 귀한 사람들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선봉에 설 생각이다.
지휘관은 아버지, 브렌드 경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 만한 게 없지!’
사실 검이나 창이나 내게 큰 의미는 없다. 다만 다인을 상대로 할 때의 효율을 생각하면 창이다.
“후우우우!”
주로 검을 수련했으니 창으로 그 감각을 바꿔야 할 터.
손에 묵직함을 즐기며, 그것을 휘둘렀고, 베었으며, 찔렀다.
구결은 필요 없다.
감각은 호흡을 자연스레 들어오고, 내뱉게 만들었으며, 움직임은 끊임없게 만들었다.
시야가 극도로 축소되다가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방으로 퍼 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만물이 뭉개진 세상이 펼쳐졌다.
그곳에 존재하는 건 창뿐이다.
거치적거리는 건 없다. 이곳은 내 세계였기에.
파아아아아앙!
원하는 모든 점과 선, 면을 만들어 내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재한다).
홀로 존재함의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오래 즐기지 않았다.
인간(人間)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인간이었고, 오롯이 혼자 있는 이 세계는 오래 머물기에는 너무 위험하기에.
광인 유역후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눈을 뜨니 많은 사람들이 동그랗게 몰려 있었다.
‘보여 줄까?’
당신들의 소영주가 어떤 사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