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21)
상인이라 돈에 관련된 일은 빠르게 잡아내는 렘에게 만족하며 로라스가 말했다.
“상단에 세금을 취할지, 그들을 호위하는 용병단과 협상을 할지. 어떻게 해야 이득이 될지는 판단이 되지 않아. 돈을 많이 내는 쪽이 낫지 않겠어?”
“물론입니다. 하지만 마적과 산적들이 이후로도 통제에 따를지에 따른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토대를 세운 정도지만 정말 돈이 되는 순간 완벽하게 장악할 생각이니까.”
로라스의 대답에 렘이 신나서 대답했다.
“그러면 상관없습니다. 상단이 타 영지를 통과하면서 뜯기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닙니다. 그런 돈보다 조금 적기만 하면 모든 상단이 남쪽 길 대신 북부를 택할 겁니다.”
렘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마적과 산적들을 유지하는 것도 문제이니…… 소영주님이 그 규모를 정확히 파악해 주신다면 제가 적절한 금액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 역시 파악해 줘야지. 일단은 그리 알고, 자경단원의 병사 전환은 추진하는 거로 하지.”
“네, 알겠습니다.”
렘이 나가고 로라스는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완벽한 통제라…….’
에렌의 흑사회 조직과는 다른 문제였다.
일단 너무 많은 조직이 있었고, 역사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놈들을 일일이 통제하는 건 단시일 내에 되는 건 아니다.
‘물론 하고자 하면 문제 될 건 없겠지만.’
통제를 목표로 한다면 일단 힘으로 내리누를 것이다.
흑사회는 나름 재량이란 걸 줬지만 이쪽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다.
그 습성이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간을 두고 뜯어고쳐야 한다.
‘번천만으로는 부족하려나?’
로라스의 고민은 길어졌다.
‘숫자라…… 얼마나 되지?’
모두 합치고 생각하니 그 숫자가 장난이 아니다. 통제하려면 일단 풍족은 아니더라도 부족함은 없어야 했다.
로라스는 이 문제에 대해 디테일하게 고민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번천이 고생하겠군.’
아무래도 직접 가서 숫자와 상황을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콰아아아앙!
와디아는 있는 힘껏 책상을 내려쳤다.
“백작님. 고정하십시오.”
“고정? 지금 그런 말이 나오나?”
와디아는 있는 힘껏 소리를 쳤다.
“이것들이 지금 내 돈을 받기만 하고 날랐는데! 고정하란 말이 나오는가!”
“흥분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일단 사정을 파악하고…….”
“연락이 아예 닿지 않는다면서! 이것들이 돈만 먹고 나른 거야.”
“문제 될 거 없습니다. 의뢰를 중계했던 용병길드에 책임을 물으면 됩니다. 오히려 더 많은 보상이 가능할 겁니다.”
다에스 자작의 말에 와디아는 뭐라 소리치려던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 사기꾼 용병단들과 거래하여 용병길드를 통하지 않는 뒷거래를 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건 비밀 계약이다.
이 뒷거래를 용병길드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용병들이 필요할 때 페널티를 줄 수도 있었다.
“됐어! 똥 밟은 셈 쳐야지.”
와디아는 벙어리 냉가슴 앓아야 했다.
‘그나마 비용 대부분 페라 남작 쪽으로 떠넘겼으니…….’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면 자신이 크게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듣기로는 페라 남작가는 남작을 찾아오고, 몇 가지 단서를 더 달아 엄청난 돈을 제시했다고 들었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액수였으나, 페라 남작을 영지로 데려온다는 조건이었고, 자신의 돈은 별로 들지 않았기에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것.
“현상금을 거는 것으로 족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백작님.”
“왜?”
“긴밀히 백작님을 뵙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다에스 자작이 속삭이듯이 정체를 알려주자, 와디아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분이 보내셨다면 얼른 모셔야지! 그걸 왜 지금 말하나! 얼른 모셔와!”
다에스 자작은 방금까지 화만 내느라 입도 못 열었다고 대답하기 대신, 얼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저런 답답이를 측근이라고…….”
와디아 백작은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페라가 일을 망쳤으니…… 이건 기회다!’
중앙에 선을 댈 수 있는 기회. 그것도 그 줄을 내려주는 사람이 대공자라면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렇게 기다리니 잠시 후 한 사내가 들어왔다.
‘으응?’
자작과 함께 들어온 이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옷차림은 흠잡을 곳이 없지만 숨길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뭔가 비릿한 느낌에 귀족이라기보다는.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와디아 백작님. 미카이라고 합니다.”
* * *
“크헉…… 너! 이 새끼…….”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내뱉어지는 욕설을 내뱉으면 번천은 살기를 드러냈다.
“그만 좀 뒈지지. 일을 어렵게 만드는구나!”
오러후이 역시 지지 않고 살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시벌! 이리 셀 줄은…….’
충분히 준비했던 일이다. 방금 암습에 번천은 죽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옆구리에 한칼을 먹은 채로도 저리 똑바로 서 있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모든 게 완벽했는데!’
마약을 먹였으며, 대무간 쟁탈전까지 벌였다.
하지만 번천은 그 상황에서도 도전자를 물리쳤고, 쟁탈전이 끝난 직후를 노린 자신의 칼에 암습도 당했다.
‘그런데 왜 안 뒤지냐고!’
오러후이의 두려움에 몸을 힘을 잔뜩 주고 있을 때, 번천 역시 현재 상황에 고민했다.
‘주군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했는데.’
주군은 자신에게 이곳을 보내며 명확하게 경고했다.
―평생을 남의 것을 빼앗아 살아온 놈들이다. 믿음을 주지 말고 늘 경계해라.
‘부리는 놈들로 생각하고, 틈을 주지 말라고 하셨는데…….’
주군의 가르침을 잊은 건 아니었다. 그나마 그 경고로 항시 조심했으니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근래 한 단계 높은 경지에 눈이 멀어 철저히 경계하지 못했을 뿐.
여하간 오러후이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수련에만 집중했던 게 화근이었다. 말로만 위엄을 세우고,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으니, 지금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일 터.
‘네놈 때문에!’
오늘의 사태는 자신의 안일함에 발생했고,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할 터.
주군의 신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번천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그대로 오러후이와 그의 일당에게 향했다.
무슨 약을 먹었는지 시야가 또렷하지 못했고, 다른 일족의 무간을 상대하느라 체력 역시 저하된 상황이지만.
“흐아아앗!”
혼신의 힘을 다했던 그간의 수련에 번천은 여전히 강했다.
“이 자리에서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오러후이는 악에 받친 소리와 함께, 수하들과 함께 번천을 공격했다.
까아아아앙!
“으아아악!”
철음과 비명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두 손으로 열 손을 막기는 쉽지 않다. 거기다가 몸 상태가 제 정상이 아니니 번천은 압도적인 무위를 가졌음에도 이곳저곳 상처가 났다.
“크아악!”
하지만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그의 몸에 칼 한 방을 먹인 놈은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쉴드!’
악전고투 속에서 번천이 버틸 수 있던 건 마법의 힘이 컸다.
―도움이 될 거예요.
특히 에르자일이 선물로 준 마법 액세서리들은 큰 힘을 발휘했다. 주문 영창 없이 기본적인 물리 방어력을 높여 주는 장신구가 자잘한 상처를 막아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공간은 혈향의 비릿함이 가득했고, 평평치 못한 바닥에는 핏물이 고였다.
스물이 넘은 오러후이 일당 중 서 있는 자들은 다섯이 채 되지 못했다.
“괴물 같은 놈!”
그나마 몸이 성한 이는 질린 표정의 오러후이와 멀리서 단도를 날리던 사내 하나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만큼은 다 데려간다.’
번천은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자신감이 들었다.
두두두두.
그때 한 무리의 인마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번천은 물론이고 오러후이와 그 일당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아!’
그들이 들고 오는 깃발에는 커다란 용 대가리가 그려져 있었다.
킹드래곤 길드의 표식.
산적길드치고는 멋진 건지, 아니면 유치한 건지 모르는 그 깃발을 본 순간 번천은 절망했다.
나타족만이 아니라 산을 장악한 그들마저 이 일에 끼어들었다면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
“오리시암!”
오러후이가 킹드래곤의 수장 오리시암을 반기며 소리쳤다.
“이게…….”
오리시암은 주변 상황을 보며 놀란 듯 보이는 것을 보니, 이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번천은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마적이나 산적이나 그놈이 그놈이다. 자신의 편보다는 오러후이의 편을 들 확률이 높았다.
“대무간 선출전이 열렸는데, 승패를 인정하지 않네.”
오러후이의 말에 오리시암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대무간 선출전? 그게 아직 열리나?”
“부족의 전통이니까.”
“전통은 전통이고 뒷감당 어찌하려고?”
“흔적을 깡그리 지워야지. 너만 도와준다면 금방 처리할 것 같은데.”
“난 관여하기 싫은데. 일이 어찌 될 줄 알고.”
오리시암이 망설이는 표정에 오러후이가 말했다.
“애초에 말이 안 됐어. 잘 운영되고 있는 지역에.”
오러후이는 번천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말을 이었다.
“저런 놈을 보낸 것부터가 말이야. 우리끼리 입을 잘 맞추면 이 지역은 다시 우리 것이 될 텐데.”
“…….”
“지금 개나 소나 지역을 지나다니고 있잖아. 한 재산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오러후이는 감언이설에 오리시암은 흥미가 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기는 한데…….”
“저놈이 살아나간다면 이쪽만 잘못될 것 같아? 그분이 너희들도 처리하려 할걸!”
“흐음, 그건 맞는 말이지…….”
오리시암도 말에서 자신의 창을 꺼내며 다가왔다.
“시벌, 갑자기 이게 무슨…… 오러후이. 오늘 넌 나한테 빚진 거야!”
“당연하지. 이 은혜는 꼭 갚지.”
그렇게 오리시암이 다가오는 걸 보면 번천은 더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오러후이도 그렇지만 저 산적두목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저놈까지 가세한 이상…….’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짐에 번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복수를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주군의 믿음을 저버린 것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 놈들이 자신의 죽음을 감출 것이 억울했다.
‘오냐 팔 한 짝은 가지고 가 주마! 그래야 주군께서 의심이라도 하지.’
번천은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검을 고쳐 잡았을 때였다.
“커헉!”
단말마의 비명. 그리고 커다래지는 눈.
그 주인공은 오러후이였다.
“너…… 이게…….”
“미친놈. 사고를 쳤으면 혼자 수습해야지. 누구를 끌고 들어가려고 그래.”
오러후이의 복부에서 창을 빼내며 입을 여는 이는 바로 오리시암이었다.
“너…….”
“그냥 혼자 뒈져. 난 그냥 봐도 오금이 저리더니만, 너는 그분을 직접 경험해 보고 이 사달을 내냐.”
오러후이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그대로 죽어 버린 탓이다.
“미친놈들!”
오리시암은 오러후이를 발로 차서 쓰러트리고는, 아직 살아남은 일당을 보며 외쳤다.
“뭣들 해! 뒈지기 싫으면 빌어!”
모두가 무릎을 꿇었고, 오리시암의 수하들이 남은 이들을 묶기 시작했다.
“육감…….”
번천은 로라스가 늘 부르는 별명으로 오리시암을 불렀다.
“뭘 그런 눈으로 보신답니까! 설마 제가 이 머저리랑 같이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오리시암의 물음에 번천은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리 생각했었으니 말이다.
“저 육감입니다.”
오리시암은 검지를 머리 위로 들고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귀신 같단 말입니다. 어찌해야 살아남을지 말입니다.”
농담 같은 그 말에 번천은 웃을 수 없었다. 오리시암의 그 육감이 자신을 살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길드에 계시라니까. 그런 이런 험한 꼴도 없었을 것이고, 저 머저리 놈도 이런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겁니다.”
“…….”
“그분에게 말이나 잘해 주십쇼. 제가 백번 말해도 번천 님 말 한마디보다 못할 것 같으니까.”
“네가…….”
번천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보다 주군을…… 잘 아는 것 같구나.”
“척! 하면 착! 해야지요. 이 바닥이 원래 아! 했는데 어! 안 하고, 뭐? 이래 버리면 죽는 겁니다. 솔직히 번천 님이 이곳에 왔을 때 불안했었는데.”
“…….”
“번천 님이 너무 순진한 것 같으셔서…….”
번천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