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15)
락은 발전에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된 영지.
특히나 금을 캐내는 게이트의 존재는 그런 락에게 날개를 달아 줬다.
게이트이긴 하나 사람들에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금광이나 게이트나 금이 생산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멀어서, 위험해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지역에 상인들은 물자를 수레 한가득 싣고 왔다.
락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한 것도, 필요 없는 것이라도 상인들이 목숨을 걸고 온 것을 생각해, 최소한의 이득을 보장하여 사들였다.
렘은 처음에 불필요한 지출이라 생각했으나, 장기적으로 봐서 필요한 것을 인정한 듯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물론 그의 상단이 주력으로 취급하는 식량과 무기 시장의 독점을 유지했으나, 그 외 가죽, 생활 도구 등에 관련된 시장은 포기하는 과감함까지 보였다.
진입하는 상인들의 비례하여 용병들도 몰려왔다.
아무리 작은 상단이라고 해도 호위병력은 필요하다. 실력이 엄청 뛰어나지도 않아도 괜찮다.
락에 힘쓰는 일은 널려있다.
물론 실력 있는 이들도 몰려 있다.
원래 락의 토벌대는 용병들 세계에서도 나름 알찬 일자리로 알려져 있다. 이제는 토벌대의 규모까지 키울 수 있으니, 더 실력 있는 이들도 몰려들 것이 분명했다.
마탑이 완공된 이후에는 기대 이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변방까지 누가 올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헤르메스의 명성은 생각 이상으로 컸으며, 실제로 5클래스 마법사인 에르자일이 탑에 실제로 거주한다는 사실은 간과했었다.
게다가 또 하나 간과했었던 사실은 마법에 관한 입문의 벽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이다.
마법은 원래 귀족들의 학문.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돈이 너무 많이 드는 학문이라, 재정이 받쳐 주지 않는 사람은 엄두 자체를 내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기왕 맡은 거 키워 보려고.
에르자일이 뜻밖에도 그쪽으로 관심을 가지며, 오는 모든 이들에게 기회라는 것을 부여했다.
옛날 가문의 시험 때처럼 그런 무식한 방법이 아닌 제대로 테스트를 진행한 것이다.
그것을 공표한 후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용병, 그리고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일반인들까지 몰려와 마탑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 탓에 락은 더 많은 재정을 지출해야 했지만, 로라스의 강력한 주장하에 그 어떤 비용 축소도 없이 마탑에 지원했다.
거기에는 로라스의 음흉한 속내가 따로 있었다.
에르자일의 소속은 정확히 에렌이다. 그리고 거기서도 명망 높은 마법사로 활동할 수 있는 위치의 있는 마법사다.
하지만 로라스는 잘 안다.
―같은 꽃이라도 자신이 키운 것이 더 귀하고 값어치가 있는 법.
옆집의 커다란 과일나무보다, 초라한 자기 집 과일나무의 열매가 더 맛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에르자일이 락의 마탑에 관심을 가질수록, 그리고 규모가 커 갈수록 그녀는 락에 남을 확률이 커진다.
소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에르자일 같은 실력자가 실제로 락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락에서 양성되는 마법사는 헤르메스와 협의하에 락의 마법사가 될 수도 있는 기회도 부여할 수 있다.
마법의 위력을 알고 있는 로라스가 무조건적인 지원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하간 이 모든 것들이 락의 발전 요소였으나, 이 모든 이유와 맞먹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쿠오오오! 잡아!”
그건 바로 락에 지근거리에 있는 천년나무집 일족의 마을. 그러니까 오크 일족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는 것에 있었다.
“쿠오오오오! 그것도 못 막냐?”
“그러다 밥값 하겠냐? 요새 너무 많이 먹었지? 쿠오오오! 그래서 배에 기름이 낀 거지?”
샤이한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마물 소탕에 열을 올렸다.
“로라스. 너도 움직여. 너희들 땅이기도 하잖아!”
오크들의 시원스럽다고 말하고, 무식하다고 느껴지는 움직임을 지켜보던 로라스에게도 샤이한의 외침이 날아왔다.
“난 내 밥값 했는데.”
로라스가 자신의 발밑을 보며 하는 말에, 샤이한의 시선도 아래로 떨어졌다.
“크으으응!”
샤이한은 크게 콧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로라스의 발밑에서 바닥에 처박혀 있는 대형 몬스터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오크 일족은 모든 먹을 것을 포함한 사물을 공유한다. 그리고 전사들은 모든 분배에 대해서 우선권을 가진다.
전사들이 배가 고프면 모든 일족이 배고픈 것이고, 그들이 헐벗고 있으면 모든 일족이 헐벗는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런 전사의 권리는 의무에서 온다.
오크 전사에게 의무는 단 하나다.
일족의 안전.
사지 하나가 없어도 그들은 그 어떤 오크보다 먼저 적진에 뛰어들어야 한다.
샤이한이 밥값, 밥값 하는 건 정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오크들에게 로라스는 이미 전투에서 밥값을 했다.
그의 발밑에 있는 그린 자이언트는 전사 스무 명은 달려들어야 제압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이유로 로라스는 느긋하게 그들의 전투를 관람하듯이 볼 수 있었다.
‘이제 자체적으로 식량 생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몬스터들이 들끓는 토벌 시기는 어쩔 수 없지만, 일반적인 시기에는 오크들에게 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는 오크들에게 완전히 맡기면?
그렇게 되면 락의 모든 무장 세력들을 평원으로 진출시킬 수 있게 된다.
락의 발전의 가장 주축이 될 농업.
그것을 위해 평야에 상시로 병력을 주둔시킬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크 일족이 자리 잡은 건 락의 가장 큰 행운이다.
아직 그들 일족의 세력이 크지 않지만, 이제 금광의 지분을 가졌으니 더 많은 식량과 무기가 공급될 것 터.
그러면 일족이 번성할 것이고, 번성할수록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해질 것이고, 안전하니 더더욱 인구수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룰 것이다.
당연히 농지도 더 늘릴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락은 변방의 작은 영지 따위가 아닌 대영주의 격을 갖추게 될 터.’
이제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로라스는 그간 모든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일이 잘 풀리니 하루 종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면 확인하는 것도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흐르기 시작했다.
* * *
에렌 성의 분위기는 무겁기가 한량없었다.
“하아!”
정적 속에 들리는 건 베스타인 공작의 한숨뿐.
“하아아!”
그리고 연이은 한숨은, 공간은 더 이상 무거워질 수 없음에,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미련한 놈!”
그리고 한숨이 아닌 노성이 터져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몸을 움츠렸다.
눈치 없어 분위기 파악 못 한다는 에르페유마저도 굳게 입을 다물고 바닥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눈치 없으나 반복된 학습으로 공작이 한숨을 쉬기 시작했을 때는 그냥 입 다무는 걸 최선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말이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무엇보다 공작이 아들인 디존슨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을 때는 더더욱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계속되는 노성에 디존슨은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나 보다. 그저 잘못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던 그가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아버님. 제가 실수한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제가 이리 꾸짖음을 당할 일입니까?”
“뭐라?”
“그래 봤자 평민. 그것도 우리 제국민도 아닌 작은 나라의 사람 하나일 뿐입니다.”
“…….”
“그리고 놈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제게 뭐라 하기에 버릇을 고쳐준 것뿐입니다.”
“계속 말해 보거라. 그래서? 너는 잘못한 것이 없다?”
공작이 약간 누그러졌다고 생각했는지 디존슨은 과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했다.
“물론, 제가 좀 과하게 벌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게 이 많은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적당해야 합니까!
“베라레안 왕국의 야장(대장장이)마스터가 작은 나라의 사람 하나라고 생각하느냐! 왜 그따위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야!”
“그래 봤자 철 조금 만지는 놈일 뿐입니다. 겨우 그깟 놈 하나 때문에! 제 위신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 특히 공작을 잘 알고 있는 심복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대공자가…… 주먹밖에 모르는 에르페유 경보다 더 무식하구나!’
‘눈치가 없기가 에르페유 경보다 더하다!’
많은 사람들이 에르페유가 절로 떠올랐고, 당사자인 그마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저건 안 되는 건데…… 대공자가 아직 주군을 모르는 건가…… 억울한 게 있어도 한숨이 나올 때는 납작 엎드렸다가, 기분 좋을 때 이야기 해야 하는 건데.’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디존슨은 크게 실수하고 있었다.
지금 누가 누구의 앞에서 위신을 운운하는가?
그의 말마따나 위신이라는 걸 생각했다면, 신하들인 자신의 앞에서 부친이 실수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됐다.
모든 사람들이 공작이 대노할 거라 예상한 그 순간.
“하아! 됐다! 나가라!”
“아버지!”
“나가래도!”
노성이 섞였으나 예상보다는 훨씬 작은 반응에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만 봤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당장 나가지 않으면 모두 그 자리가 온전치 못할 것이다!”
눈치 빠른 헤르메스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러가겠습니다. 주군.”
그리고 도망치듯 나가자, 사람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회의실에 남은 건 공작과 다 나가라는 명령에서 예외가 되는 단 한 사람만이 남았다.
그 단 한 명 트아이가 입을 열었다.
“주군, 고정하시지요.”
“하아…… 대체 어찌 된 놈인지…… 엄히 가르쳤다고 생각하는데 왜 생각은 그 수준인지!”
“…….”
“자식 농사는 뜻대로 안 된다더니…….”
트아이는 공작의 푸념 같은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 그게 최선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한창 혼잣말 같은 말을 하고는 뜬금없이 묻는 말에도, 트아이는 공작이 지칭한 아이가 누군지 잘 아는 듯이 대답했다.
“여전합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내 뜻대로 안 되는군.”
“답장을 한번 보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나 싫다고 도망친 놈에게 무슨…….”
공작이 말끝을 흐리는 걸 보며, 트아이는 공작의 화가 이제야 어느 정도 풀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말했다.
“주군이 싫어서 도망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 고향이 더 좋다고 한 것뿐이지요.”
“그랬다면 더더욱 이곳에 남았어야지. 거기에 있는 것보다 여기에 남은 것이 제 고향에 더 영향이 있다는 걸 왜 모를까.”
공작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으나, 스스로도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라스는 주기적으로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락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떠한 결과가 있었는지 적혀 있었다.
공작은 늘 관심 없는 척했으나, 로라스의 강력한 추진력, 실실적으로 발전되고 있는 락의 모습에 감탄한다는 것을 트아이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조언 한마디 해 주시면 공자는 감격할 겁니다.”
“됐어. 종이쪼가리나 보내고 단 한 번을 오지 않던 놈이 뭐 이쁘다고.”
“그래도 한 번도 잊지 않고, 주기적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습니까. 공자는 주군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됐네, 됐어.”
공작은 손을 홰홰 저었다.
“하아! 그릇이 달라. 그릇이. 큰놈이 제 조카의 반만 닮았어도.”
그런 공작의 모습에서 절대자의 풍모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아버지의 고뇌만 보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