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13)
“로라스!”
역시 오자마자 제일 반겨 주는 이는 어머니다.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은 거니. 살이 쪽 빠졌구나.”
키는 반 척 가까이 자랐으며, 살은 정확히 스무 근이 불었으나, 그 배가 자라고, 불었어도 어머니 입에서 같은 소리가 나올 것이 분명하기에 토 달지 않았다.
“이제 많이 먹으면 되지요. 많이 주세요.”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에렌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차이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신께서는 간신히 내 가슴에 닿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하지만 나를 꽉 안아 주시는 그 품은 너무나도 컸다.
집이다.
이게 집이라는 거다.
난 집에 돌아왔음을 비로소 실감했다.
* * *
“곧 공사가 끝나.”
에르자일의 말에 로라스는 마탑을 쳐다보았다.
에렌의 그 높고 웅장한 헤르메스의 마탑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5층짜리 석탑.
하지만 이 마탑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로라스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수고했어, 에르자일.”
“수고는 무슨. 그런데 맨 위층은 내 몫이야. 그건 확실히 해.”
“최고층은 당연히 락 최고의 마법사가 써야지요.”
로라스의 말에 에르자일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은근슬쩍 그런 말로 영지 마법사로 고용할 생각은 하지 말고.”
“꼭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런 뜻 맞잖아. 락의 마탑이지만 영지 소유는 아니라고.”
“여기가 마음에 안 들어?”
“응?”
“돌아갈 생각을 하는 거 아냐?”
에르자일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여기처럼 실전을 쌓을 수 있는 영지도 없으니까. 옭아매는 게 싫은 거야. 스승님이 허락하지도 않으실 거고.”
“헤르메스 님이 허락하면 남을 거야?”
에르자일은 뚫어지게 로라스를 보다 말했다.
“너는? 날 원해?”
뭔가 묘한 뉘앙스의 말에 로라스는 순간 흠칫하며 말했다.
“뭔 말이 그래? 그리고 당연히 너 정도의 마법사가 영지에 있는 건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해야지.”
“왜 선을 그을까?”
“선은 무슨.”
에르자일이 웃으며 말했다.
“얼굴이 빨개지네?”
로라스는 기겁을 하며 대답했다.
“뭔 소리야? 턱도 없는 소리 하고 있네.”
“내가 필요 없어?”
“당연히 필요하지.”
“그럼 날 원하는 거네?”
“뭔 소리 하는 거야?”
“난 괜찮다고.”
로라스는 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아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에르자일은 어머니를 빼면 여자들 중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인 건 맞다. 하지만 에르자일이 이런 식의 말을 할 줄 생각조차 못 했다.
“반응이 느리네. 고민하고 있구나?”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로라스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으음, 고민할 수준은 된단 말이지.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할까?”
“지금 무슨…….”
로라스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뒤 말했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대체.”
“평생 혼자 살 생각은 아니잖아. 그건 나도 그렇고. 우리 괜찮잖아?”
더 이상 대화를 섞다가는 상황이 어찌 될지 몰라, 로라스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관심 없다. 끝까지 수고해. 난 연병장에 가 볼 테니.”
로라스는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오면 생각했다.
‘정말 무슨 생각인 거야?’
전생의 기억에 뭐든 여유가 있으나, 여자는 아니다.
유역후는 평생 독신이었고, 가장 가까운 여자라고 해 봤자 셋째였던 곽아뿐이었다.
로라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많은 마을 사람들이 로라스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우리 소영주님.”
“우리 소영주님 오셨네.”
소영주는 소영주인데 말이다. 이제는 그 앞을 수식하는 데에 우리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하나같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이다.
실버스워드의 우승자이다.
게다가 지금 영지의 활기가 모두 로라스의 작품 아닌가?
지금의 락은 예전의 락이 아니다.
사람들이 조금씩 몰리기 시작했고, 상단이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움직였다. 게다가 얼마 전 아이언 센터의 지부까지 생긴다는 소식에 모두들 들떠 있는 상태였다.
락의 사내는 다른 영지 사내들의 비해 거칠다. 게다가 원주민들은 포스를 꿈꾸며 수련하는 사내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아이언 센터가 영지에 들어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
먹고살 만해졌다는 것도 만족스러운 판에, 그들은 이제 꿈까지 가진 것이다.
그 어떤 영주보다 자상한 영주에, 그에 부족하지 않은 후계까지.
락의 사람들이 신나 하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좀 떠들썩해야지.’
로라스는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열심히 일궜으니 수확을 해야지.’
아직 샴페인 잔을 높이 들 때는 아니지만, 준비 정도는 해도 될 정도로 락의 발전은 눈에 보였다.
‘인구 유입만! 어떻게든 늘린다면.’
그래서 놀고 있는 평원을 개간하여 식량 생산만 원활히 된다면.
그때부터 락은 알아서 성장하게 된다.
뭐든 기본은 사람이다.
“오셨습니까! 소영주!”
연병장에 도착하니 브렌드가 가장 먼저 반겼다.
“소영주!”
그리고 병사들, 그리고 영주민들도 훈련을 멈추며 달려왔다.
“모두들 오랜만입니다.”
반가운 얼굴들.
로라스도 활짝 웃으며 반겼다.
‘이들이 시작이다.’
사람을 늘리기 위해서는 치안이 안정돼야 하고, 이들이 그 치안을 맡아 줄 이들이다.
내가 하나하나 모두를 훈련시킬 수 없다.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이들이 기준이 되어 뒤를 이끌어야 한다.
“모두들 잘돼 가고 있으십니까?”
로라스의 말에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결과야 어찌 됐든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미소다.
로라스는 상의를 벗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같이 훈련할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외쳤다.
“좋지요!”
“환영합니다.”
그들은 로라스가 어찌 훈련하는지 잘 안다. 그리고 그 훈련시간에 굴욕도 많이 당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반 존대를 하고 있지만, 훈련장에서 로라스는 악마가 된다.
투지가 일어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예전과 같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그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
로라스와 사내들은 그렇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후우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은 호흡을 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영주…… 제가 지금 착각하는 것입니까?”
시그탑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로라스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보는 대로만 받아들이세요.”
“하지만…… 실버스워드에서 우승하셨다고 할 때도 놀랐는데…… 지금 소영주께서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마세요. 저도, 시그탑 경도 세상 사람 그 누가 알겠습니까? 세상에는 기인들이 많은 거 아니겠습니까?”
시그탑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로라스의 말대로 세상에 숨겨진 고수는 많다. 하지만 그것도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로라스의 나이 이제 고작 스물하나다.
‘그런데 내가 어찌할 수 없다니…….’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인정한다.
세상에 수많은 고수, 기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천재도 많다는 것을.
하지만 스물하나에 마스터라는 건,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다. 초월자인 베스타인 공작도 저 나이에 마스터가 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저 여유.
혈기왕성한 소영주는 자신의 경지를 별거 아니라 하고, 특별한 의미를 두지 말라고 한다.
‘그 말은 앞으로도 어렵지 않게 발전할 거라는 뜻 아닌가?’
마스터가 됐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럼에도 여유를 가지고 있음은 경악스러울 정도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들은 투지를 불태웠다.
“그나저나 포스의 수발이 이제 안정화됐군요. 긴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그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시그탑 경.”
“그야…….”
시그탑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마스터가 된 이후로 에듀의 배려로 그는 오로지 자신의 경지를 수습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은근 기대도 했다.
로라스가 돌아오면 제대로 된 마스터로 그를 깜짝 놀라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간 그의 독특한 수련법에 받은 은혜를 갚아 줄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뭔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하수가 아닌데…….’
어쩌면 소영주가 자신보다…… 이런 생각도 있었지만, 차마 그것마저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의 수준이라면 자신은 평생 소영주에게 받은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
“저야말로 소영주가 얼마나 노력을 했을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겠군요.”
로라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시그탑 경.”
“네, 말씀하십시오. 소영주.”
“기사단을 하나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어떠십니까?”
“기사단이요?”
“어제 아버님과 잠깐 이야기했는데, 이제 우리 영지도 규모가 적어도 일단은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게…….”
시그탑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기사단.
모든 영주의 꿈이라 불리는 강력한 전투 집단이다. 하지만 말만 할 뿐 쉽게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유지비용이다.
한 명의 기사에게 들어가는 돈은 막대하다.
전마는 최소 두 필은 가져야 하며, 그 장비의 유지 그리고 기사를 돕는 종자에게 들어가는 돈까지.
줄줄 새는 항아리에 물 붓는 것 같은 유지 비용을 자랑한다. 실제로 락에는 기사의 숫자가 셋뿐이지만, 그마저도 그들이 자비를 들여 장비를 수리하고, 전마를 유지하는 중이다.
시그탑이 말했다.
“소영주께서도 알다시피, 기사단 창설이 한두 푼 드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시작은 작게요. 게이트 개발이 거의 막바지라면서요?”
“아직 완벽한 운송로가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완료될 예정이라 합니다.”
“드리프 경이 결국 해냈군요.”
“저도 얼굴을 본 적이 한참 됐습니다. 그쪽에서 아예 상주하고 있으니까요.”
“조만간 저도 한번 가 봐야겠군요. 여하간 작게라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시그탑 경이 그 책임을 맡으시고요.”
“가능하겠습니까?”
“아버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재정적인 문제는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말치고는 여유가 있는 것을 보며, 시그탑은 조심스레 말했다.
“굳이 지금 시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강행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그림을 그려보고 있어요.”
“…….”
“그 그림은 락의 사내들에게 엄청난 희망을 줄 겁니다. 희망은 곧 사기가 되고. 사기 높은 부대는 기본적으로 막강한 전력이 되는 법이지요.”
로라스의 말을 시그탑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병사들. 그리고 자경단원들에게 기회를 주시려는군요.”
“네, 말로만 하는 것. 작게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 그 차이는 엄청나지요.”
“그건 그렇지요. 재정적인 뒷받침만 된다면 제가 맡아 보고 싶습니다.”
“경의 뜻만 확실하면 추진하겠습니다. 기사단의 이름부터 운용까지 전부 경에게 전권을 맡기겠습니다. 아!”
로라스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첫 번째 단원으로 정해 둔 사람이 있는데.”
“번천 말입니까?”
로라스는 웃으며 말했다.
“테라요. 물론 경이 테스트를 해야겠지만요.”
“브론즈 대회에서 상위권에 들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일단 자격은 충분하지요.”
“한번 테스트해 보세요. 실망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조만간 불러 확인해 보겠습니다. 공자께서 그리 자신하시니 테스트가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확실히 해야지요! 그럼 동의한 걸로 알고 재정을 마련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영주.”
“저야말로.”
‘이제 렘이 어느 정도 만들어 놨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인가.’
하나씩 일이 척척 진행돼 가고 있다는 성취감에 로라스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