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12)
뭉툭하다.
컬렉션 룸의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속이 간지럽다.
뭉툭한 기운에 숨겨진, 아니 존재할 그 칼날 같은 예기가 보고 싶다.
어찌 설명해야 할까?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다 해야 하나?
마른 천으로 검을 닦고 있는 할아버지 옆에 다가갔다. 그리고 주변에 떨어진 천으로 같이 검 하나를 잡고 닦기 시작했다.
오기 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또 어떻게 대처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이리 검을 닦고 있노라니 좋다.
검을 닦는 게 아니라 마치 나를 닦는 것 같다.
얼마나 그리 검을 닦았을까?
아마 닦아야 할 무기들이 많았다면, 밤이 다 지나도록 검만 닦았을지도 모르겠다.
“기특한 놈.”
마침내 할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압니다. 저도. 기특해서 미칠 것 같으시지요?”
“좋긴 하구나.”
“계속 그리 기쁘실 겁니다. 제게 계속 관심을 주시는 이상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검을 장식대에 올리며 말했다.
“소문이 거하게 들리더구나.”
“어제 큰아버지와 같은 소문은 아니길 바랍니다.”
“아니냐?”
“에르페유 경이나, 매지스터 헤르메스가 할아버지에게 숨길 리도 없으니.”
할아버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어쩔 생각이냐?”
“할아버지의 생각이 중요하지요. 제가 어디까지 가도 됩니까?”
“갈 생각은 있고?”
반문에 반문이 오갔지만, 머리 굴릴 필요 없다. 이 정도면 매우 직설적인 대화이지 않은가.
“선을 그으려 합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락뿐입니다.”
“거기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더구나.”
“땅이 아깝지 않습니까? 발전할 겁니다.”
“그래서 이쪽은?”
“선을 긋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음흉한 놈!”
“선을 긋는 게 어찌 음흉한 겁니까? 손자가 할아버지의 눈치를 본다는 뜻이지.”
할아버지는 피식하며 말했다.
“눈치? 누가? 네가?”
“할아버지가 심술이라도 부리시면 제가 어찌할 방법은 없으니, 눈치라도 봐야지요. 어디까지 가도 되는지 묻기도 했고요.”
“그걸 왜 나에게 묻냐. 네 선택이지.”
할아버지의 두 눈이 휜다.
참 심술 맞다.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으며, 끝까지 속내를 뜬다. 그럴 필요도 없는 사람이.
“그래서 선을 그으려 하는 겁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걱정? 누가? 내가?”
“재미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에렌에는 욕심이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찰떡같이 알아들으면서 욕심이 없다고 하니, 그게 더 이상하구나.”
“그건 제가 똑똑하니까 알아들은 거지요.”
“그러면서 큰놈에게 한 방 먹인 거냐?”
“제가 뭘 어찌했다고 그러십니까.”
“환락가. 손에 넣지 않았느냐. 그것도 너는 쏙 빠진 채, 헤르메스와 에르페유를 앞세워서.”
역시, 미카이의 배경이 누군지 알고 계셨다.
“먹인 게 아니라 되돌려 준 것뿐입니다. 그리고 에렌에는 욕심이 없지만, 돈은 필요하니까요.”
“정말 없냐?”
이 영감이 정말.
“없는데 자꾸 생기려 하네요. 허락하실 겁니까?”
“선 긋는다면서.”
“할아버지! 정말 생각이.”
“흐흐흐. 해 봐라.”
“없다니까요…… 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순간 잘못 들었나 싶다.
능력 있는 자가 가문을 이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같은 값이면 내 아들이 우선이다. 아니, 형편없지만 않으면, 기본만 할 수 있다면 내 핏줄이 우선이다. 그래서 천륜이라 불리는 거다.
할아버지가 날 직시하며 말했다.
“해 보라고. 도와는 주지 않겠지만 방해는 하지 않을 것이니.”
“…….”
“거짓말 아니다. 능력 되면 도전해도 나쁠 것 없지.”
정말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떠보는 것인가? 아니, 그 전에 뭐라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동안 긴장이 없었지. 긴장이 없으면 물이 고이게 되고, 고인 물은 썩은 내가 나지.”
“…….”
“다른 녀석들이 애는 쓰는데, 큰놈이 너무 유리하니까. 네 녀석이 끼어들면 신선한 충격이 될 거다.”
자식들도 저울질은 피할 수 없다는 건가?
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다.
“며칠 후에 락으로 돌아갈 겁니다.”
“…….”
“두 분 스승에게도 이야기해 뒀습니다.”
“돌아간다고?”
순간 할아버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너무 순식간에 그리고 뜻밖의 반응이라 잠시 당황했다.
“밥값은 했으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지요. 거기서도 제가 할 게 많습니다.”
“정말이구나.”
“네, 할아버님께 거짓을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내게 시선을 떼며 말했다.
“제 아비를 닮지 않아 총명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같구나. 미련한 놈.”
“…….”
“가라. 더 볼 일 없다.”
방을 나왔다.
‘영감탱이…… 그 반응은 아니잖아…….’
가슴이 조금 쓰린 것은 그만큼 내가 정말 공작과 조손지간이라 생각했다는 증거일까?
생각하면 할아버지는 아낌없이, 내게 베푸는 쪽이었다. 밥값을 빙자한 거래도 제안했지만…… 아끼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다면, 꺼내지 않을 것들.
‘이게 맞습니다.’
그는 제국, 아니 이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이지만 늙었다. 친인들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골육상쟁을 지켜봐서 좋을 게 하나 없다.
‘저울질은 눈으로만 해야지, 검이 오가고 피를 흘리면…….’
그게 깔끔하게 선을 그은 이유 중 하나다.
‘그러고 보면 유역후는 스스로 문제가 있었지만, 말년 복은 좋았지. 네 놈 모두 서로를 끔찍이 아꼈으니.’
하지만 에렌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아직 격도 안 되는 조카를 옭아매려 하는 디존슨이 있다.
다른 두 명의 후계는 본 적이 없지만, 디존슨이 저런 걸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을 것이다. 심성이 선한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존슨의 압박을 벗어나려면 선한 심성도 바뀌어야 버텼을 터.
‘이게 최선이다!’
* * *
새벽 일찍 나섰지만, 꽤 많은 이들이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포플러가 말했다.
“정말 가는 거냐?”
“그래, 간다.”
“너 가면 누가 내 상대를 해 주냐?”
웃으며 말했다.
“덜 맞았구나. 계속 맞고 싶으면 너도 락으로 오던가.”
“삼 년만 더 수련하다 가련다. 포스 유저가 됐을 때 한 판 뜨러 간다.”
“기다리…… 뭐 하냐? 너?”
이놈, 날 덥석 안는다.
“우냐?”
“보고 싶어서 어쩌냐.”
“꼭 락으로 와라. 너 수련이 끝날 때쯤이면 락도 예전의 락은 아닐 터이니.”
우는 놈 떡 하나 물려 준다고, 뭔가 짠한 느낌이 있어 놈을 토닥여 줬다.
“우리 친구 맞지?”
“…….”
“네가 간다고 하니 말하는 거지만…… 그래도 우리 친군데 너는 늘 뭔가 거리감이 느껴진다. 네가 강한 것도 알고, 대단한 것도 알지만…….”
또 짠하다.
‘그래, 친구 못 할 것도 없지.’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지만, 포플러는 자기애가 강할 뿐이지 심성은 순한 놈이다.
‘같이 늙어간다 치면…… 뭐. 안부를 물어 가면 지낼 놈으로 이만한 녀석이 없지.’
놈을 떼어 내며 말했다.
“친구지, 그럼. 수련 게을리하지 마라. 테라한테 망신당하기 싫으면.”
“물론이지. 반드시 포스 유저 된다.”
“다른 놈들에게도 안부 전하고.”
“당연하지. 단체로 락으로 간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모임의 리더는 너니까.”
그렇게 모인 이들 하나하나와 안부 인사했다. 그래도 내가 간다고 이른 새벽부터 나와 준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컴에게 인사했다.
“그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편하게 지내다 갑니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내가 득이 됐으면 됐지.”
페컴은 아쉬워하며 말했다.
“결국, 갈 줄은 몰랐다. 공작님께서 네게 거는 기대가 컸는데.”
“할아버지. 잘 부탁드립니다.”
“큰일 날 소리를. 누구에게 누굴 부탁해. 아서라. 그리고…….”
페컴은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뭡니까?”
“공작님께서 필요하면 쓰라 하시더구나. 필요 없으면 가져가지 말라 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상자를 열어보니 크기는 작지만, 최상급 마나석이 들어있었다. 필요 안 하기가 힘든 물건이다.
‘얼굴이나 한번 보여 줄 것이지…….’
페컴에게 말했다.
“잘 쓰겠다 말씀드려 주세요.”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지만 주기적으로 안부 전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페컴은 슬쩍 시선을 멀리 던졌고, 그 끝에는 트아이 집사가 있었다.
“공작님이 늘 곁에 두실 정도로 모르는 게 없는 분이다. 흔치 않은 기회이니…….”
“알겠습니다.”
헤어짐 없는 이별은 없는 법. 그렇게 에렌을 떠나 락으로 향했다.
* * *
“대무간 대리. 분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됩니다.”
“대무간 대리. 이번 습격은…….”
“대무간 대리. 상단 하나가…….”
나타족의 무간 중 하나이면서, 대무간의 임무를 대리하고 있는 오러후이는 짜증 났다.
‘대무간 대리, 대무간 대리.’
차라리 그냥 무간 오러후이라 불렸으면 이렇게 짜증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무간이 해야 할 일 의무는 다 짊어지면서 권리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는 술병을 꺼냈다.
얼마나 마셨을까?
쨍그랑!
“원래 내 것인데…… 왜 대리냐고!”
애꿎은 술잔을 깨 버렸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여전히 그는 대무간 대리였으며, 그건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뗄 수만 있다면…….’
그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으으…….’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놈을 생각만 해도, 신음이 나오고 오금이 저리는 인물인데, 뭘 어찌하겠는가?
“오러후이, 있나?”
그때 노크도 없이 그의 방으로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낮부터 술인가?”
오러후이는 순간 들끓는 살기를 죽이며 대답했다.
“아! 그냥 좀.”
“회의가 끝났잖아. 어찌 결정했어?”
부족의 문화는커녕, 부족의 사업은 조금도 모르는 놈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대한다.
“별거 없습니다. 무간이 다 보이지 않았으니. 불만만 잔뜩이었지요.”
“하긴 힘들 때긴 하지.”
“그러니 좀 털어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니 기존의 놈들도 협상하지 않고 몰래 길을 넘어가려 하는 거 아닙니까!”
“당분간은 어쩔 수 없지. 곧 새로운 지침이 전달될 거야.”
오러후이는 말했다.
“그 당분간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그분은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워낙 바쁘신 분이니까, 이해해야지.”
“불만이 점점 커집니다. 이리 불만이 쌓이면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러후이는 순간 움찔하며 대화를 나누던 사내를 보았다.
“어쩔 수 없으면?”
“네?”
“어쩔 수 없으면 뭐 어쩔 건데?”
“대무간…….”
쏟아지는 살기에 오러후이는 순간 움찔거렸다.
“반란이라도 한번 일으켜 보게? 어느 무간이 그러기라도 하자 그래?”
“아닙니다. 대무간!”
“시키는 대로 해. 불만이 그리 많으면 나한테 직접 따지라고 하던가.”
“…….”
“하긴 내가 요새 너무 자리를 비웠지.”
사내는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잊은 게지. 근래 무간이 바뀐 적이 없지?”
“네, 그렇습니다.”
“내게 도전하는 놈도 없고 말이지. 꼬셔 봐.”
“무슨…….”
“같이 날 쳐 보자고 말이야. 차륜전 좋잖아.”
오러후이는 흠칫하며 말했다.
“감히…… 어떻게…….”
“그럼! 불만 갖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회의 결과 정리하고, 현재 가장 상황이 안 좋은 일족이 어디인지도 고민하고.”
“네.”
사내가 다시 나가지 오러후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번천…… 놈만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놈이!’
순간 오러후이는 번쩍 드는 생각이 있다.
‘그래, 놈만 아니면 되지 않는가!’
오러후이는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