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111화 (111/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11)

확실히 대단한 놈이긴 하다.

애초에 약속의 증서에 내가 이겼을 경우 돈을 바로 지불한다는 조항을 기재한 이유.

어둡고 깊은 밤이 아무리 돈을 쏟아 내는 화수분 같은 곳이라도, 백만이 넘는 골드 코인이라면 순간적으로 지급 불능 상태에 이른다.

지면 어둡고 깊은 밤은 내게 넘어온다.

놈도 그 사실을 알기에 잠시 몸을 떨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실력에 일말의 의심도 없는 자신감 때문이리라.

‘그냥 내 사람으로 만들면 좋겠지만.’

그랬다면 여기 관리를 맡겨 지속적으로 막대한 돈을 뽑아낼 것이다. 하지만 놈은 큰아버지의 하수인이고, 내게 한 짓거리들이 있다.

그냥 둘 수가 없다.

게다가 난 이미 고스트를 내 손에 넣었고, 그쪽에 힘을 실어 주기로 결정했다.

놈의 손목이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 뚫어지게 쳐다봤다.

‘응. 걱정 마. 속임수 따위는 안 쓴다.’

그렇게 말해 주고 싶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하다. 놈이 속임수를 쓰지 않듯이.

‘나도 다만 기술을 쓸 뿐이지.’

미카이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했다.

저것도 무공과 똑같다. 목표에 눈을 떼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 그리고 그 순간 난 손가락을 튕겼다.

누가 그랬더라.

그래, 도박을 좋아했던 둘째 세진이가 그랬었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고.

주사위가 던져지는 순간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건 마법도 아니고, 포스도 아니다. 순수하게 기를 모아 쏘았을 뿐.

아니, 놈이 봐도 상관은 없다.

뭐라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약속을 어긴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본인 스스로 처럼 말이다.

주사위는 굴렀고, 손가락을 몇 번 더 튕겼다. 그렇게 주사위는 멈췄다.

세개의 주사위는 모두 4점을 가리켰다.

‘남을 해하려 했던 네 운명이다. 사사사(死死死).’

* * *

소란 따위는 없었다.

도박은 많은 이들이 봤으며, 에르페유와 헤르메스가 지켜봤다.

미카이는 날 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다음 날.

깊고 어두운 밤은 내 소유가 되었다.

주인이 바뀌었지만 달라질 건 없다.

고스트의 인원이 순식간에 미카이 수하들이 하던 것을 대체했다.

“흐흐흐.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전보다 나아지면 나아졌지, 절대 수익을 떨어트리지 않겠습니다.”

발란스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요르크가 웃으며 하는 말에 피식하고 말았다.

“발란스.”

“네, 공자님.”

“고아원 운영에 돈을 아끼지 마라. 그리고 원하는 아이들만 수업시키고.”

할 이야기가 많았다.

애초에 고아원을 이용해 믿을 만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강제할 생각은 없다.

난 착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할 것, 안 할 것은 구분하며 살아왔다.

“양지를 지향해라. 그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요르크.”

“넵, 공자님.”

“에렌을 먹어라. 다른 조직이 있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이걸 저희가 운영하는 이상 시간문제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피는 당연히 봐야겠지만 최소화해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발란스와 요르크의 조합은 아주 괜찮다. 그러니 고스트 같은 조직을 키웠을 테고 말이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만 정해 주고, 나머지는 세세히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어둡고 깊은 밤의 소유주가 됐다는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도 어둡고 깊은 밤의 소유주는 내가 아니다.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

아쉽긴 하지만 계산은 정확해야 하는 법.

이 환락가의 50퍼센트 지분을 가진 이는 바로 헤르메스였다. 다만 운영을 내게 위임했을 뿐.

지분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수익은 30퍼센트만 가져가기로 했다. 에르페유의 경우에는 20퍼센트. 페컴은 5퍼센트.

그게 거래 조건이었다.

좀 아쉽긴 했으나 덕분에 뒤가 깔끔했다.

많은 귀족 권력가들이 이 환락가를 탐한다지만, 그 누구도 헤르메스에게 덤빌 수가 없다. 거기에 에르페유 역시 20퍼센트의 지분을 가진 곳 아닌가.

거대한 두 사람의 명성에, 실버 우승자 수준의 내 이름은 거론될 틈도 없었다.

그렇게 일이 대충 정리될 무렵 날 찾는 사람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큰아버지.”

“왔구나.”

환하게 웃고 있는 걸로 보이지만 그 속내는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간 어둡고 깊은 밤에서 나오던 자금이 끊겼으니, 세력을 유지하는 데도 곤란할 터.

“재미있는 소문이 들리더구나.”

그의 말에 모른 척 물었다.

“어떤 소문 말입니까?”

“네가 어둡고 깊은 밤의 실제 소유주라는 그런 소문 말이다.”

“정말 재미있는 소문입니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봤다던데. 도박으로 엄청난 승리를 따냈다고.”

“그 많은 사람들이 매지스터 헤르메스와 마스터 에르페유 경은 보지 못한 것 같군요. 소문이 그런 식으로도 와전되는군요.”

“넌 관계가 없다?”

거짓말은 적절한 사실이 섞여야 하는 법. 무작정 부정하지는 않았다.

“관계야 있지요. 두 스승님이 직접 나설 수 없으니 제가 대리인으로 나섰으니까요.”

“대리인이라…….”

“제가 제법 담이 크지만, 골드 코인 일 만개를 빚질 정도의 담은 없습니다. 그 돈이면 제 고향인 락을 사고도 남을 거액 아닙니까.”

“그런가?”

시녀가 가져온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정말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이란 걸 믿으셨습니까? 지기라도 했으면 전 아버님께…….”

손날로 목을 한 번 긋자, 디존슨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자신도 차를 들이켜며 물었다.

“헤르메스와 에르페유. 그 두 사람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일을 벌인 걸까?”

“글쎄요. 그건 아마도 거기 책임자인 미카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려서 아닐까요?”

“욕심? 무슨 욕심?”

“사실 저는 개의치 않았는데 말입니다. 제가 거기서 도박을 즐기는 걸 헤르메스 스승님이 아셨습니다.”

“그런데?”

“호되게 혼이 났지요. 에르페유 스승님도 아시고. 아유! 말도 마십시오. 큰아버님도 아시지 않으십니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도박을 즐·겼·다는 것을 말입니다.”

디존슨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즐기든 말든 도박을 권장하는 큰아버지는 없으니까. 게다가 내가 그 사실을 넌 알고 있지 않았느냐? 하고 말했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 그건…….”

디존슨의 반응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여하간 이미 지고 있던 빚이 막대하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하기는 제가 무리하긴 했지요. 또 듣고 보니 미카이 그놈도 괘씸하고 말입니다. 욕심도 적당히 부려야지요.”

“…….”

“대체 제게 그리 빚을 지게 만들고 뭘 하려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입니다.”

“그게 놈들의 습성이지. 일단 빚을 지게 하고…… 천천히 받아 내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요. 듣고 보니 화도 나니, 적극적으로 헤르메스 스승님의 계획을 도왔지요.”

“그러니까 모든 게 그녀의 계획이다?”

“대부분은 말입니다. 실제로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시기도 하셨고. 덕분에 어둡고 깊은 밥을 손에 넣었지만 말입니다.”

“그래…… 그랬었군.”

“그런 소문이 왜 났는지 모르지만, 이상한 소문은 믿으셔서는 안 됩니다. 사실, 전 그게 제 것이면 더더욱 좋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하.”

아예 소리 내어 웃어 줬다.

그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번지는 것처럼 보이는 건, 잘못 본 게 아니리라.

“사람을 보고 덤벼야 하는데 말입니다. 과한 욕심도 말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 건지 눈치챌까?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이곳에 뜻 없음이.’

잔뜩 창피를 줬으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혹시 또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어! 아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센터에 가 봐야 할 시간이라서요.”

“그래. 바쁜 너를 괜히 붙잡았구나.”

“아닙니다. 큰아버지. 큰아버지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우니까요. 용돈도 두둑이 챙겨 주시고 말입니다.”

그의 저택을 나왔다.

‘요건 테라에게 선물로 줘야겠네.’

디존슨이 준 돈주머니를 흔들며 센터로 걸음을 옮겼다.

* * *

“들이쉬고.”

테라가 호흡을 들이쉬는 걸 맞추며 그의 영대혈에 올린 손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내뱉으며 내 손에 달라붙는다는 느낌으로 움직여.”

손바닥에서 은은한 진동과 함께 열기가 느껴졌다.

개천심법을 운용하여 손바닥에 진기를 불어 넣었다.

같은 특질의 기운이 안과 밖에서 달라붙으려 한다. 그대로 천천히 기로(氣路)를 따라 움직였다.

‘역시 테라는 걱정할 게 없겠다.’

계속 옆에서 지켜봤지만, 테라는 재능도 있으며, 배우고자 하는 욕망도 크다.

물론 그 두 가지는 고수의 기본이긴 하지만, 테라의 경우에는 한 가지 더 갖추고 있었다.

승부욕.

이 역시 가지고 기본 중 하나이나, 테라의 승부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번천의 집요함은 자신을 향하지만, 테라의 집요함은 타인에게 향한다. 아카데미에서 눈부신 발전을 한 것도 그 부분도 상당히 작용했을 터다.

‘라이벌이 있어야 발전한다면…….’

역시 테라는 락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다. 거기에는 번천이 있으니. 그를 따라잡으려 기를 쓸 것이다.

“후우우우!”

테라가 어느 순간 긴 숨을 내뱉었다.

개천지보 운기조식의 일주(一走)가 끝난 후에 나온 반응이다. 훌륭하다. 이제 막 삼보에 오른 상태이니 계속 더 수련하면 끊기지 않고 진기를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떠냐?”

“주군…….”

눈을 뜬 테라가 대답하려다가 머뭇거렸다.

“날아갈 것 같냐?”

“그게…… 이게 맞는 겁니까? 몸이 붕 뜬 느낌이 드는 게…… 이건…….”

“잘 적응해야 할 것이다. 에르페유의 경의 포스써클레이션과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느 것이 옳습니까?”

“틀린 건 없다.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 에르페유 경의 포스써클레이션은 무거움을 추구하고. 내가 전수한 내공은 공(空)을 추구할 뿐이다.”

“공이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너는 사람이 어떻게 숨을 쉬는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그야…….”

테라가 자신 있게 뭐라 말하려다가 대답하지 못한다.

“어느 문제는 답에서 본질에서 찾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찾아야 할 때가 있다.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네.”

“곤충들이 사는 나라에 수많은 곤충이 있었다. 그곳에는 다리가 수십여 개가 달린 지네도 있었지.”

이 이야기는 이런 거다.

어느 날 개미가 지네를 보며 물었다.

너는 걸을 때 어떻게 걷냐고?

지네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수많은 다리가 어떻게 움직여 걷는지 고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네는 다리를 움직였으나 어느새 혼란에 빠졌다.

“지네는 그 이후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어느 다리부터 움직여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테라가 지네처럼 되기 전에 말했다.

“그런 거다.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익으면 그만이다. 애초에 포스나, 마나의 근원 같은 건 누구도 밝히지 못했지 않느냐.”

“…….”

“내 포스써클레이션…… 내공이라 불리는 것도 포스와 마나 같은 걸로 생각하면 된다.”

“네.”

테라는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 순간 또 의문이 솟구칠 것이다. 그러다 무지(無知: 아무것도 알지 못하다.)를 깨닫고 무작정 달릴 것이고.

‘그러다가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고, 아니면 유역후처럼 흉폭하게 변하겠지.’

지금의 나도 내공이, 개천지보가 무엇이다! 라고 정의 내리지 못하지 않는가.

‘본질이라…….’

그걸 알았다면 유역후가 로라스가 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나도 궁금은 하다.

‘이런 문제는 고승이나 현자들이 찾아야 할 문제.’

무인은 무인의 길을 걸으면 그뿐이다.

그렇게 센터에서 수련을 끝내고 성으로 돌아오자, 페컴에게서 할아버지의 호출이 있었다는 걸 전달받았다.

할아버지의 컬렉션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