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06)
회의가 끝나고 방에는 공작과 그랑데일만이 남았다.
미딩의 내전에 개입하기로 했고, 그 방안에 관해서도 결정됐다.
이제는 에렌의 군사 그랑데일이 전체적인 조율을 하면 끝이 난다.
그랑데일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군, 미딩의 왕을 교체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주변국의 경계는 커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후 황실의 견제가 심하게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
“명분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명분만으로는…….”
그랑데일은 말끝을 흐렸다.
신하 된 도리에서 주군이 모욕을 당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할 문제. 그러니 그 명분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말을 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걱정할 것 없어.”
“혹시 다른 무슨 방도라도 생각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그걸 내가 왜 생각하나?”
그랑데일이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공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로라스, 그 녀석이 생각해야 할 문제지.”
“공자가 어떻게…….”
“그러니까 그건 나나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척! 하면 착! 이라고 공작의 말은 금세 이해한 그랑데일이었으나 이번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순간 번쩍 드는 생각이 있었다.
“주군, 그럼 주군께서는 로라스 공자가 명분을 마련했을 것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공작은 추호의 의심도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일을 이리 크게 벌였다면, 돌아오면 크게 혼을 내야지.”
공작의 대답에 그랑데일은 낭패를 느꼈다.
‘아…… 이건…….’
주군의 로라스에 대한 총애가 높은 건 알고 있으나, 이건 너무 지나치다 생각했다.
로라스의 재능은 자신도 알고 있는 터. 하지만 이런 문제는 정치적 경험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문제다.
“주군, 지금이라도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주시면…….”
“걱정하지 말래도.”
“주군!”
“저번에 말했잖는가. 이번 일은 끝까지 녀석에게 맡기겠다고. 두고 보세.”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그랑데일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 로라스가 그걸 만들어 낸다면…….’
그랑데일은 가슴 한편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래서 지금도 무거운 주군의 총애가 더 얹어진다면 말이다.
‘내가 너무 앞서가는 건가?’
하지만 지나친 생각은 아니다.
스무 살의 로라스에게 이런 일에 책임을 지게 한 것부터가, 상징하는 의미가 크다.
‘그래도 아닐 거야.’
그랑데일은 자신의 생각 끝에 있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 * *
‘이거 좀…….’
브라카이는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 혼란해하고 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나이 마흔둘.
작년에 미딩의 기사단 중 하나인 블랙비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고, 어딜 가나 존중을 받는 무인.
브라카이는 스스로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더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브라카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불운인 건지.’
그의 시선 끝에는 블랙비 기사단원들의 포위를 당한 채 움직이는 한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있었다.
‘대체 왜 이리로 온 건지…… 일행을 보내고 자신만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던 것인가?’
브라카이가 상부로 받은 명령은 포위망 구축을 위한 길목 점령과 왕자인 요단과 그를 도왔던 인사들을 체포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은 없었다.
일단 기사단을 이끌고 움직이긴 했으나 자신이 가는 지역은 서부국경으로 빠지는 길목.
왕자가 이곳으로 올 확률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그가 지키던 길목에 저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나타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청년은 결투 재판 때 바로 엄청난 무위를 선보였던 에렌의 로라스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모른 체하며 통과시키고 싶었다.
상대는 마스터다.
자신과 블랙비 기사단의 모든 기사들이 목숨을 걸어도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거기다 왕자를 제외한 타국의 인사들은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고 했다.
브라카이는 그 명령에 듣는 순간 욕을 입 밖에 내뱉을 뻔했다.
상부에서 비현실적인 명령을 내린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 너무한 명령이었다.
웃대가리들이 그리 바보 같으니 왕자가 그리 세력을 키운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하간 모른 체, 통과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미딩을 빠져나가는 타국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수하들의 눈치도 보였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로라스의 앞을 막았다.
하지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로라스가 자신들의 체포 요구에 순순히 응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성도로 그를 호송하고 있었다.
체포를 하고도 그를 묶지 않은 이유는 마스터에 대한 예우였고,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순순하게 체포당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고, 상부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결투 재판으로 승리했으면서 하루가 지나고 바로 자신들을 보내 다시 잡아들이는 건 대체 무슨 수작이냔 말이다.
가는 내내 찝찝한 이유도 기사인 자신이 기사도에 어긋난 행위를 하고 있기에 그런지도 몰랐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며 힐난하는 것 같았다.
브라카이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공이야 엄청나겠지만.’
그래도 또 한편으로는 무사히 이대로 성내로 귀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포스 유저가 되었을 때는 그 경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했다. 그 경지가 높은 산의 정상에 있었으나, 그 산조차 보지 못한 포스 유저가 어디 한둘이던가.
그래도 자신은 그 산을 보았으니 꾸준히 하면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산은 만만하지 않았다. 길이 없었으며, 천 길 낭떠러지도 수없이 존재했다.
‘이번 전공으로 어쩌면…….’
마나석을 상으로 받을 수 있고, 어쩌면 왕에게 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길이 생기고, 낭떠러지를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생길지도 몰랐다.
기사로서의 명예와 무인으로서의 욕심이 그리 교차할 때였다.
두두두두.
전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펄럭이는 미딩의 왕가의 깃발을 보며 브라카이가 의아해할 때였다.
두두두두두.
그런데 달려오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브라카이가 옆에 있던 기수에게 눈짓했다.
기수가 블랙비 기사단의 깃발을 높이 든 채로 앞으로 달려갔다.
“대체…….”
깃발이 단칼에 잘려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며 브라카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소리를 질러야 했다.
“적이다!”
브라카이는 대체 아군이 왜 자신들을 공격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대응하지 않으면 눈앞의 기병 무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
두 무리의 기병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으음!”
얼마 만에 입어 보는 부상인지 모르겠다.
시그탑이나 대련할 때나, 에르자일과 마법을 주고받을 때 잔상처는 몇 번 입은 적이 있었으나, 이토록 출혈이 난 적은 없었다.
무인은 고통에 익숙해져야 한다.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뭐 이런 말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건 변명일 뿐이지.’
좋게 말하면 스스로에 대한 격려이고, 나쁘게 말하면 실력 없는 자들이 자기 위안.
여하간 많이 아프다.
뭐, 내 역할에 너무 심취했다는 증거이고. 덕분에 계획은 훌륭하게 성공한 것 같았다.
“주군!”
크게 벌어진 상처를 보며 타라는 안절부절못했다.
“제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맞다.
이 상처를 만든 장본인이 타라다.
녀석의 실력이라면 깔끔하게 위태위태한 연출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내가 잘못한 거지. 차라리 포플러나 올랜드에게 부탁을 해야 했는데.’
타라가 날 어찌 생각하는지 알면서, 무리한 요구를 한 듯했다. 하지만 그 역할은 꼭 타라에게 맡기고 싶었다.
타라는 내 식구에 속하지만 다른 놈들은 아니니까.
죽을상을 하고 있는 타라에게 말했다.
“더 조심했으면 나 죽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군.”
“내가 시켰는데 죄는 무슨. 그런데 검사가 검을 쓰는 데 주저하면 안 돼. 스스로 실력을 믿었어야지. 그러면 상처가 깔끔하게 났을 텐데.”
“…….”
“사실을 이야기한 거지, 탓하려는 게 아니다.”
녀석의 머리를 쓸어 주고는 말했다.
“덕분에 잘된 거지. 연극은 제대로 됐으니까.”
“꼭 이리 하셔야 했습니까?”
“말했잖냐. 에렌이 나설 명분이 필요하다고. 게다가 요단을 유리하게 만들려면 이만한 방법도 없지. 마들린의 평판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중요해.”
몇 번이나 설명했으나 타라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다.
곧은 녀석이다. 당연히 정치적인 술수 자체를 생각조차 못 할 것이다.
“넌 기사는 돼도, 지휘관 되기는 틀린 것 같았다. 지휘관은 정치도 알아야 하는 법인데.”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못하면 하려고 노력해야지. 정말 네가 지휘관이 됐을 때, 여전히 이해 못 하면 수하들을 사지로 몰아넣게 될 테니까.”
“…….”
“됐다.”
뚱한 표정을 짓는 녀석의 머리를 한 번 더 쓸어 주며 생각했다.
‘정말 문제긴 한데. 타라도 그렇고, 번천도 너무 곧아.’
곧지 않은 것보다 곧은 게 낫긴 하지만, 처세라는 것도 좀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그건 가르쳐서 될 게 아닌데.’
지금이야 벌인 일의 규모들이 작으니 나 혼자 처리한다지만, 이후가 살짝 걱정됐다.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능구렁이 몇 마리 정도는 품은 인물이 필요한데 말이지.’
인재란 늘 부족한 법이니 눈에 띄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영입해야 할 것 같다.
“공자.”
그때 나젤이 막사로 들어왔다.
“연락은 하셨습니까?”
“네, 중요한 말은 다 전했습니다.”
대답하는 나젤의 표정이 무겁다.
그는 이번 호위대의 책임자. 내 결정으로 인해 괜한 인원 피해를 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피해는 얼마나 됩니까?”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습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부상자는 있어도, 죽은 이는 없었으니까요.”
“그건 다행이군요.”
“실력 차이가 존재했으니까요.”
“돌아가면 전투에 준하는 논공행상을 요청하겠습니다. 충분히 보상받을 겁니다.”
나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지며 대답했다.
“모두가 좋아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할 건 다 끝났군요. 요단 왕자는 어디 있습니까?”
“공자의 치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제 그와 협상을 마무리하면 더는 우리가 개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대로 끝인 겁니까?”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말입니다. 왕자를 만나야겠습니다.”
“모시겠습니다.”
나젤과 함께 요단의 막사로 향했다.
“공자.”
“세자 전하.”
“나젤 경. 잠시 자리 좀.”
나젤은 흠칫하더니 일단 막사로 나갔고, 난 요단을 쳐다봤다.
“모두들 나가 있게.”
요단도 눈치채고 사람들을 물리자 막사에는 그와 둘만이 남았다.
뭐라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 그가 먼저 말했다.
“은혜를 두 번이나 입었군요. 어찌 갚을까요?”
역시 영민한 사람이다. 불필요한 말을 할 필요 없게 만든다.
“아직은 그것을 논할 상황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내 대답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걸 아시고 계시니 마음이 한결 놓이는군요. 기왕 도와주시는 거 더 도와주시겠습니까?”
“공이, 이제 제 손을 떠났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요단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눈치는 빨라.’
공이 내 손을 떠났다는 말은, 에렌이 이 내전을 개입할 거라는 뜻이다. 당연히 세자의 편을 들어서 말이다.
“마지막 선물도 드리지요.”
난 입을 열었고.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공자.”
요단은 아주 많이 그리고 매우, 매우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