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05)
애초에 라이너와 손발을 맞추는 순간 위기 따위는 걱정할 게 없었다. 게다가 집단으로서의 응집력도 약했다.
그들이 고수들의 집단인 건 맞다.
동선이 겹치지 않고, 서로의 공격과 방어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위치 선정과 공격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그 뜻은 말이다.
‘하향 평준화를 일으키지.’
공격을 위한 위치 선정이 아니며, 스스로가 원하는 최선의 공격 타이밍을 얻기가 힘들다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런 단점을 안고서라도 뭉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리하임을 제외하고는 나와 라이너의 상대는 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시간을 끈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위험은 제거해야지!’
충분히 위협적인 리하임의 공격.
그 역시 집단의 방해를 받고 있었으나, 그건 이쪽에서도 마찬가지. 그래서 그와 다른 포스 유저들의 움직임을 충분히 숙지할 필요가 있었다.
‘내 차례지.’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상대는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예측되는 움직임들. 내가 본 건 딱 하나.
콰아아아앙!
그의 검과 처음으로 제대로 맞부딪쳤고, 순간 풍압이 사방으로 일었다.
충격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지만, 개의치 않고 진기를 돋웠다.
‘포스의 특질은 화.’
그의 쌍검에 어린 두 개의 붉은빛으로 대충 짐작은 했다.
‘그 색은 알기 편하단 말이지.’
전력을 다해 검을 날렸다.
사실 마법을 섞어 볼까 생각도 했다. 불의 기운이니 검에 물의 기운을 살짝 덮는 것만으로도, 그의 검에 담긴 기세를 덜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약간의 위험도 지지 않기 위해서다.
마나를 사용하다가 그의 포스에 대응하는 게 조금이라도 늦으면 곤란했다.
“하아앗!”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압력이 확 줄어듦을 느꼈다.
푸른색의 포스.
라이너가 드디어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촉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나랑 합이 좋은 건지.’
라이너는 나와 비슷한 면이 많다. 특히 포스의 특질이 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어쩌면 그도 그것을 느꼈기에 나를 돕는 게 아닌가 싶다.
‘이 고비를 잘 넘기면 좋은 친구 하나 사귀는 게지.’
아직은 나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다 하나, 그 차이는 크지 않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무인들은 단 한 번의 깨달음에 크게 약진하는 법이니. 끌어 주고 밀어주는 데 서로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다.
‘너무 익숙한 게 좀 걸리긴…… 헛!’
압력이 줄어들었으나 너무 신경을 그쪽에 썼다. 리하임의 붉은 기운이 시야 밖에서 찔러오는 것을 놓쳤다.
발을 뒤로 하며, 허리를 뒤틀어 피하며, 동시에 반격했지만, 옆구리에 화끈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집중력을 놓친 대가치고는 싸게 먹힌 거고.
‘이번엔 네가 집중력이 떨어진 것 같구나.’
경지는 높으나 실전의 부족했던 것인가?
나에게 일격을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리하임의 검로는 옆에 있는 라이너에게 향했다.
‘실력이 엇비슷한 처지에 그리 가면 되나!’
내가 대가를 치른 것처럼. 그 역시 실수의 대가는 치러야 할 터.
제왕검 제 4초식. 제왕군림(帝王君臨).
찰나의 순간을 사용하기 위해 진기를 제대로 담지 못했으나.
“허엇!”
그가 급히 두 검을 교차하여, 내 공격을 막았지만, 벼락처럼 쏟아진 내력에는 그대로 노출되었다.
“크허헉!”
짧은 신음과 함께 순간 이를 꽉 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선혈은 이 사이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차라리 토해 내는 게 나았을 것이다.
아군의 사기를 생각해서 참은 것 같지만 잘못 판단했다. 울혈(鬱血)을 토해 내지 않음으로 내상이 깊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 결투는 끝이 났다고 봐야 했다.
마스터의 검을 막을 집단도 아니고, 막을 수 있는 개인도 없다.
더 이상 이 결투를 진행하는 건.
‘학살이다.’
손속에 사정을 둬야 했다.
그럴 확률은 낮지만, 만에 하나 눈이 뒤집힌 검왕이 병력이라도 동원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눈치가 빨라 정말 편하네.’
어느새 라이너의 검에 실린 포스도 사라졌다. 그냥 맞받아 주는 수준이다.
‘이제 끝내라.’
이 결투를 끝내는 건 우리가 아니고,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그들도 아니다.
더는 위협이 되지 않는 리하임의 검을 맞받아치며 시선을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지독하게 무표정한 검왕 마들린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나의 시선과 맞부딪쳤다.
‘다 죽이기 싫으면 끝내라.’
‘놈!’
그런 눈빛의 대화.
그는 버티려 했지만.
“커허헉!”
특별히 손을 쓰지 않았음에도 리하임이 스스로 포스를 운용하려다가 결국, 검붉은 피를 토해 내는 순간.
“그만!”
마들린의 입이 열렸다.
* * *
결투 재판은 끝났다.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세자는 무죄가 되었다.
하지만 무죄라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왕도, 세자도 그리고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로라스 공자.”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 생각됩니다. 갈 곳이 있습니까?”
물음에 요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나가지요.”
요단은 남은 인원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부상자들과 결투 때문에 생긴 시체를 챙기기 시작했다.
요단과 라이너 일행.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이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요단의 측근 중 하나가 말했다.
“돌아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냥 그대로 영지로 돌아간다.”
“챙겨야 할 것들이.”
“그 챙길 것이 목숨보다 중한가?”
요단의 말에 측근이 입을 다물었다.
‘뭐가 가장 먼저인지 잘 알겠군.’
검왕이 성에서 우리를 내보냈지만, 살심 가득할 것은 뻔할 터.
수도에서는 이목이 있어 손을 쓰지 않겠지만, 도성을 벗어나는 순간 병력을 보낸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검왕이 추격대를 꾸리기 전에 먼저 빠져나가야 했다.
요단은 이내 나와 라이너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로라스 공자, 라이너 경. 같이 가지시요. 은혜 갚을 기회를 주셔야지요.”
순간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도와달란 말을 은혜 갚을 기회를 달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않는가.
‘그렇지, 왕이 될 자 저렇게 뻔뻔한 면이 있어야지.’
왕에게 후안무치는 흠이 아닌 덕목이다. 다만 그 목적이 왕에 걸맞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슬쩍 라이너를 보니, 그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
나야 이미 요단과 한배를 탈 생각이었지만, 라이너는 살짝 당황한 얼굴이다.
‘즉흥적이었나?’
그가 왕이 아닌 나를 돕기 위해 나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잠시 미뤘던 의문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대체 왜?
그때 그가 물었다.
“로라스 공자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차피 지금 병력으로는 미딩을 빠져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요. 세자 전하와 함께 가서 상황을 보려 합니다.”
“검왕이라 하나 귀 가문을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아이언 센터의 이름으로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안방이지 않습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할 자신만 있다면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만.”
위기를 부풀리긴 했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잠시 침묵하던 라이너의 입이 열렸다.
“로라스의 공자의 선택이 에렌의 선택입니까?”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건 에렌에서 결정하겠지요.”
“…….”
“이나마 제국 그리고 라이너 경의 입장을 존중합니다. 일행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귀국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어찌 결정하시든 경이 절 도왔다는 사실은 잊지 않을 겁니다.”
라이너는 이번에도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저희 역시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베스타인 가문과 연이 생긴다면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요. 합류하지요.”
갈수록 의문이 든다.
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게 나쁘지 않았다.
그와 비무할 때도 그렇고, 같이 결투 재판을 치렀을 때도 그랬다.
그와 함께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나쁘지 않음을 넘어 기분이 괜찮다. 합이 잘 맞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분.
‘그 역시 같은 생각인 건가?’
합류한 이상 그를 알아갈 기회는 많을 터. 일단 모두 합류했으니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세자 전하. 이야기 드릴 게 있습니다만.”
“말씀하시지요.”
“근방의 군사지도. 그리고 세자 전하의 퇴각 경로가 필요합니다.”
“그건 무슨 이유로…….”
요단의 얼굴이 굳는다.
지도는 쉽게 손을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지형의 특성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 군사지도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퇴각 경로까지 알고자 하니 당황하는 게 이해된다.
“해가 될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난 그게 필요했다.
일을 벌인 이상 제대로 판을 깔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 아니라 요단에게도 도움이 될 터.
“내드리지요.”
요단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깨달은 것이다.
내가 그에게 뭔가 해를 끼치고자 했다면, 또는 검왕의 첩자라 했다면 결투 재판에 나서지 않았을 거라는 걸 말이다.
“일단 의논할 것이 있는데.”
요단과 라이너, 올랜드와 나젤 등 핵심 인력을 모으고 다음에 내가 무엇을 할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왜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일을 벌여야 하는지 말이다.
* * *
에렌, 베스타인 공작가의 영향력은 제국에서는 절대적이다.
황제가 발표하는 중요한 안건 대부분이 에렌과 협의를 거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그런 베스타인 공작가의 권력은 현재가 최절정이었다.
황제의 말 한마디와 손짓에 수십만 명이 운명이 달렸다면, 베스타인 공작의 말과 행동에는 제국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달렸다고 할 정도다.
그렇게 베스타인 공작이 초월자, 북부의 지배자, 제국의 방패이자 검 등 수많은 수식어를 지닌 그가 입을 열었다.
“경고나 하라고 보냈더니, 일이 커졌어.”
에렌의 최중심인 내성의 회의실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공작의 말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서 자네들의 의견을 듣고 싶네. 누구부터 이야기할 건가?”
공작은 살짝 뒤로 기대며 시선을 책상 위로 올렸다. 책상 위에는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자신의 두 손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 회의장에서 시선을 사람에게 주는 경우, 모인 이들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주군을 모욕한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습니까?”
이번에도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에르페유였다.
“이번에 제대로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절 보내 주십시오. 제가 그를 박살 내서 감히 주군의 이름을 함부로 올리면 어찌 되는지 만천하에 알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이는 많지 않았다. 에르페유의 말에 무게가 없어서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에르페유의 주장은 늘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가진 힘으로 응징을 해야 한다는 것.
“에르페유 경의 의견대로 하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병력이야 동원할 수 있지만, 미딩은 에렌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주변 소국들이야 언제든 길을 이용할 수 있겠지만, 코마, 스드림 왕국은 쉽게 길을 내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에르페유의 말이 끝나면 늘 우려를 나타내는 노귀족 드럽의 의견을 시작으로 회의장은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대세는 굳이 남의 내전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때 침묵하던 헤르메스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리고 정치적 부담이 크다면 굳이 많은 이들이 움직일 필요도 없겠지요.”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향했다.
“에르페유 경과 저만 움직이지요. 각자 정예를 데리고 움직이면 문제 될 게 있겠어요?”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
헤르메스 역시 에르페유와 성향이 비슷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물과 불처럼 사이가 좋지 않은데, 에르페유를 거론하여 둘이서 움직이겠다고 한다.
‘아!’
그러다 모인 이들 중 몇몇은 이상함을 눈치챘다.
자신들도 주군의 최측근들이라 자부하기는 하지만, 에르페유, 헤르메스. 그리고 그랑데일, 이 세 사람은 공작의 최측근을 넘어선 수족 같은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계속 싸우자고 주장하는 건!
모인 이들 중 우둔한 자들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 회의는 내전에 개입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공작의 심중을 알았으니 회의의 방향은 달라져야 했다.
내전을 어떻게 개입해야 효과적인지. 그리고 최대의 효율을 내는지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은 고민의 결과를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