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02)
―여기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다.
세자 요단에게 그렇게 전음을 보냈다.
요단이 흠칫하며 주변을 살폈다.
전음이라는 기술을 처음 접했을 터.
전음이란 말이 아닌 공기의 파동으로 뜻을 전하는 기술이다. 진동은 소리와는 달라 원하는 자에게 정확히 뜻을 전하려면 꽤나 내력을 소모하는 기술이다.
―당황한 표정 지우고, 일단 탈출로부터 열어.
당황한 다시 전음을 보내고 반응을 지켜봤다.
‘알아듣겠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논란을 만든 요단이다. 알아들을 터다. 그리고 방법을 찾을 것이다.
‘내가 알았으면 알려 줬겠으나…….’
사실 나도 그 방법은 모른다.
다만 한방에 판세를 뒤집기 어렵다는 것만 안다. 그렇다면 일단 여기서 벗어날 기회를 잡아야 한다.
그것을 조언했을 뿐이고.
‘못 찾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로서도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다. 도와준다고 해도 요단이 그 은혜를 갚을지 확신도 없다. 하지만 제대로 되면 미딩이라는 상징적인 국가의 힘을 빌려 쓸 수도 있다.
‘도박인 거지. 그리고 기왕이면 똑똑한 놈이어야지 이후 거래하기도 편할 테고.’
그뿐이다.
마들린 측과 요단 측의 언쟁은 심화되었다.
세자를 역적이라 주장하는 국왕 측의 인사들. 그 증거를 내놓으라는 세자 측의 사람들.
결국, 힘의 논리로 이어질 것이고. 그때 침묵을 지키던 요단이 외쳤다.
“지금은 정식으로 재판을 열지 못하는 상황! 저 요단은 부왕께 결투 재판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순간 공간은 정적에 휩싸였다.
‘결투 재판?’
단순하게 생각하면 참으로 무식한 단어다. 당연히 들어 본 적도 없는 단어인데 말이다.
“미딩은 기사의 나라. 역사적으로 증거가 모호하고, 있어도 정황상의 증거뿐이라면 결투 재판으로 그 유무죄를 가렸습니다.”
요단의 말에 사람들이 놀랐다. 그리고 일제히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옆에 있는 포플러에게 물었다.
“결투 재판? 그게 뭐냐?”
“말 그대로 유무죄를 결투로써 가르는 재판이야.”
“그게 말이 돼?”
“당연히 말이 되지. 근래는 없었지만 옛날! 특히 미딩에서는 종종 열렸을걸.”
포플러의 말은 이랬다.
미딩은 기사, 포스의 나라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머리보다는 단순하게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했다. 당연히 뭔가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공평하게 판단하는 현자가 부족했다고 했다.
그래서 생긴 게 결투 재판이라 했다.
“하지만 국왕이 허락하지 않을걸?”
“다 차린 밥상을 엎는 거라서?”
“그렇지. 국왕이 그걸 승인해 버리면 결투 한 번에 지금 준비 한 모든 게 무산될 텐데. 척 봐도 작정하고 일을 벌인 거잖아.”
포플러를 단순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녀석도 귀족이다. 미리 알아차리는 건 힘들더라도, 벌어진 일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세자 말이 말은 된다는 거지?”
“응, 말은 되지. 검왕은 난처하겠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세자를 증거도 없이, 그것도 역모로 몰아 죽이는 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일 테니.”
포플러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죽이려면 은밀하게 처리했어야지. 지금 보는 눈이 몇인데.”
곁에 있던 나젤도 한마디 거들었다.
“강제로 세자를 죽이면 이후 그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에렌의 입장에서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검왕 마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이거 약간 위험하겠는걸?’
권력이란 요물이라 천륜도 끊게 만든다. 천륜도 무시하는데 자신의 권위가 떨어지는 걸 무시하겠는가?
요단을 보니 그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마들린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외쳤다.
“그리고 그 결투 방식은 대리인을 내세우기를 원합니다.”
판단 실수라도 한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 그런 조건까지 붙이면 국왕은 죽었다 깨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요단보다 강한 무인들이 많은 상황이다. 요단이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대리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때 요단이 다시 외쳤다.
“그 결투 방식은 이 자리에 부왕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무인들과 저 요단이 무죄라 생각하는 무인들이 승패를 가리지요.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저마다의 잣대로 판단하고 있을 터.”
요단은 마들린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러니 이 방식이 제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난 놈이다.
현재 이 장소에서 국왕의 세력이 8할에 가까운 상황. 편을 갈라 결투로 대결하자면 국왕의 승률이 8할. 아니 그 이상이다.
이거야말로 국왕을 안심시키면서도, 자신에게는 한 가지 도망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찰떡같이 알아들었네.’
내가 한 조언을 정확히 실현한 요단이었다.
비록 죽을 확률이 여전히 높은 방법이긴 하나, 반드시 죽는 상황에서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겠는가?
침묵하던 검왕 마들린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무인의 명예도 몰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식을 둔 죄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들린에게 쏠렸고, 그는 계속 말했다.
“좋다. 그래도 내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 주마. 하지만 대신 패배한 후에는 스스로 죄를 만방에 고하고 자결하라!”
“그리하지요. 부왕!”
그렇게 결투 재판이 시작되었다.
* * *
무인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국왕 편이 높다고 해도 좋았다.
현재 이 파티. 아니 결투장에 모여 있는 미딩 무인들의 숫자의 숫자는 대략 이백여 명.
비율상 그렇다면 세자 쪽에 사십여 명은 넘어야 정상이었으나, 실제로 그러지 못했다.
실제로는 고작 삼십여 명.
명예 재판인 만큼 일반적인 비무와는 다르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결투이고.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상황이다.
그래서 세자 편을 배신하고 슬그머니 국왕 쪽에 선 것이다.
개인적으로 바보 같은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왕이 위기에서 국왕의 편을 들었다면, 그 가치가 있었겠으나 애초에 마들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재판.
배신자로 이미 낙인 찍힌 상황에서 편을 바꿔도 달라지는 건 없을 터다.
아! 있긴 있겠다. 싸우다 죽는 것 대신, 싸움 한 번 제대로 못 해 보고 죽을 거라는 것.
가뜩이나 불리한 상황에서 배신자까지 나오니 요단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래서 오기가 났던 것일까?
어느 순간 굳었던 표정을 풀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상황이야 어찌 됐든 그에게서 자신감이 풍기자, 그의 수족들로 보이는 이들도 사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일단 자세는 좋네.’
사기로 전세를 뒤집기에는 숫자의 차이가 압도적이다. 게다가 무인의 질도 세자 쪽이 불리하다.
‘할아버지가 총애한 적도 있다고 하니.’
국왕 마들린. 그의 검왕이라는 칭호가 허명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건 확실하다.
그런 검왕의 수족들이 약할 리 없다. 그에 반면 세자는 골드대회는 출전할 클래스도 아니고, 실버대회에서도 최고 실력자가 아니다.
‘물론 상대가 대단하긴 했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으로라도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요단이 평범한 사내는 아닐 테니까.
그런데 말이다.
외부인.
그러니까 상을 받기 위해 초대받았던 대회 참가자들이 검왕의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예상한 상황이었지만, 그 숫자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기에, 요단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효막심하고 천륜을 저버리려 했던 아들놈을 단죄하려는 무인들이 이리 많다니! 포스의 가호가 그대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네.”
검왕은 감탄한 척하며 무인들에게 감사 아닌 감사의 말을 했다. 그리고는 요단을 보면서도 말을 이었다.
“마지막 기회다. 지금 자결하라. 그러면 서서 죽을 기회를 주도록 하마. 그리고 목을 베는 이는 명예로운 나의 로열가드가 될 것이다.”
이 세계에서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게 이런 거다.
서서 죽으나, 앉아서 죽으나, 기사에게 죽으나 망나니에게 죽으나, 죽는 건 똑같은 건데 말이다.
‘하긴 관에서도 죄인의 목을 벨 때, 용 작두, 개 작두를 따지니까. 이런 건 똑같은 건가?’
하지만 유역후 때도 개소리라 했던 것이, 지금이라고 변할 리 없다. 그냥 개소리는 개소리인 거다.
“저 요단. 반드시 결백을 증명할 것입니다!”
주변 심복들과 같이 결의 어린 표정으로 외치는 요단.
곧 실내 중앙에 자연스레 공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의외로 세자 측의 무인이 먼저 나섰다.
“기사 베복! 세자 전하의 결백을 증명하려 합니다.”
수염이 북슬북슬한 사내가 기다란 장검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차마 검왕에게는 시선을 주지는 못하고 그 주변의 무인들에게 소리쳤다.
“누가 나오시겠습니까?”
국왕 쪽에서도 한 기사가 나섰고 이내 두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자가 계속 상대의 무인과 싸우는 이 결투 재판은 확실히 많은 피를 일으켰다.
세자 측 무인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어차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싸움이다.
배수진을 친 병력처럼 그들은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왕자와 수하.
죽어서라도 충성을 다하겠다는 기사의 맹세. 그런 기사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왕자. 그들로서는 꽤나 드라마틱한 광경이 연출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 탓일까?
남의 일임에도 가슴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 남의 일도 아니지. 내 일이지.’
하지만 무턱대고 나설 수 없다.
계산해야 했다.
내가 검왕의 무인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의 위력을 보여 줄 수 있을지 말이다.
‘집단을 상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크게 문제는 될 것 같지 않지만.’
문제는 검왕 측에 개인적으로 상대해도 쉽지 않은 고수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골드대회의 우승자와 준우승자 모두 국왕의 편에 선 것과.
‘저 쌍둥이들이 제일 문제지.’
갈색 머리카락에 얼굴에서 코밖에 안 보일 정도의 코쟁이 두 명.
‘한 놈은 좌검을 쓰고, 또 한 놈은 우검이다. 저건 분명 협공을 따로 단련한 것일 텐데.’
하지만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세자 측에 무인이 몇 남지 않은 상황이다.
“나젤 경.”
“네, 공자.”
“이 싸움에 절대 나서지 마십시오.”
“당연하지요. 굳이 나설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의 대답에 포플러와 타라에게도 주의하라고 했다.
“센터의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절대 나서지 마!”
“그래야지. 국왕 편을 드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세자 편에 섰다가는 우리도 위험해질 텐데.”
포플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걸음을 움직였다.
“어디 가십니까?”
“어디 가?”
나젤과 포플러가 급히 입을 열었지만, 이미 계산을 끝낸 뒤다.
절망 어린 시선으로 결투를 지켜보느라, 내가 다가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요단.
요단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나의 존재를 눈치챈 건, 또 한 명의 세자 측 무인이 쓰러진 이후였다.
“로라스 공자.”
설마? 하는 눈빛으로 날 보는 요단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잘 판단하셨습니다. 세자 전하.”
“그게 무슨…….”
요단은 말을 하다 말고 순간 흠칫했다.
눈치챈 것이다. 자신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 나란 걸 말이다.
하지만 이내 의심의 눈빛으로 변했다.
내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돕는 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일이란 게 가끔 이상한 이유로 시작하거든.’
내가 세자 편을 들기로 한 이유 중 하나.
아주 적은 부분이긴 했지만, 요단이 내게 보였던 그 깍듯한 예의가 마음에 들어서였으니까.
“락의 로라스. 세자 전하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주변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진정한 데뷔전이지.’
난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