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100)
“실망하지 마라. 네가 몇 살만 더 먹었어도 승자는 너였을 것이다.”
테라가 8강까지 올랐으나 떨어졌다.
상대는 서대륙에서 한 손에 손꼽히는 이글기사단의 기사였다. 체내의 기운을 발현할 수 있는 실력자인 데다, 테라보다 월등히 컸다.
그런 상대를 테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지만,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맞아, 저 나이면 실버로 가야지. 왜 이쪽으로 와서.”
포플러가 분하듯이 한마디 했고, 나도 인정했다.
“내가 말한 적이 있지?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네가 그보다 부족한 건 그뿐이었다.”
상대는 테라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다.
서른이 되기 전의 나이에서 8년이라는 시간의 유리함은 재능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시간이다.
내가 어떻게든 일단 개천지보 삼보에 이르려던 이유도, 그 시간의 문제 때문이었다.
“내가 복수해 줄게.”
포플러는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다음 상대가 테라를 이긴 이글기사단의 기사.
“좋네, 이번에는 내가 우승하고 다음에는 네가 우승하고. 이 형의 뒤를 따르는 것도 나쁘진 않지?”
포플러는 위로라고 하는 말인데……
‘테라에게 통할 리 없지.’
시뻘게진 안색이 좀처럼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번천에게까지도 조금도 지려 하지 않는 녀석이었느니.’
덩치는 물론 실력마저 몇 수 떨어졌지만, 번천에게도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던 테라다.
무인에게 승부욕은 무척 중요한 요소이나, 테라는 가끔 걱정될 정도로 그것이 지나쳤다.
물론 그 때문에 이리 빨리 발전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분해하는 건 좋다. 그것을 원동력 삼는 것도 좋지. 하지만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참 후에야 테라의 입이 열렸다.
“다음에는 어떠한 이유와 변명을 대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이길 겁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검을 잡는 건 금지다.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포스 수련만 하는 거다.”
격전이었던지라 테라의 몸에는 잔상처가 많다. 게다가 무리하게 포스를 끌어 올렸던지 내상의 흔적도 있다.
가만히 두면,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악화시킬 게 뻔하기에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너는? 문제없지?”
그때 포플러가 날 보며 묻는 말에 대답해 줬다.
“봐야지.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오늘 토너먼트에서 재미있는 놈을 봤다.
운이었는지, 진짜 실력인지 내일 다시 보면 확실해질 터.
기대되었다.
* * *
“우아아아아!”
큰 함성과 함께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확실히 이 대회의 수준은 높다. 실력은 물론이고 인성들도 괜찮다.
“잘 배웠습니다.”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고, 힘껏 잡으며 일어나 검례를 취하는 상대 역시 그렇다.
크레므 왕국에 사는 ‘폴리시스’라는 기사다.
승부에 승복할 줄 알고, 겸손한 자세만큼이나 실력 있는 기사였다. 나를 상대로 하지 않았다면 결승에 올라갔어도 이상하지 않을 실력자였다.
기특한 구석이 있어 특별히 허리가 비는 약점을 세 번이나 지적해 줬다. 실력이 있으니 금방 보완할 것이다.
비무대를 내려오고 곧바로 시선을 위로 돌렸다.
눈여겨봤던 놈이 다음 차례였다.
“이나마 제국의 검사 나인마운틴 라이너.”
비무를 진행시키는 사내의 호명에 거구의 사내가, 커다란 검을 들고 비무대에 올라왔다.
정말 큰 체구지만, 얼굴은 순하게 생긴 게 전혀 위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실력만큼은 압도적이다. 그리고 곧 그의 상대가 올라왔다.
라이너에 밀리지 않는 체구에 양손 도끼를 쓰는 사내였다.
‘보자고. 운인지, 실력인지.’
라이너의 실력을 자세히 살폈다. 예상이 맞는다면 그가 내 결승 상대다.
까아아앙!
“우아아아!”
대검과 대부의 격돌에 관중들의 함성은 더더욱 커졌다. 그리고…….
‘반칙이네.’
라이너의 실력을 확인했다.
그의 무력은 그 정도의 표현을 쓸 정도로 압도적인 게 맞았다.
‘저 정도면 삼 푼이 아니라, 삼 할의 실력을 숨긴 거지.’
그건 곧 그가 마스터의 경지에 있다고 봐야 했다.
의아했다. 골드대회에 나가도 우승 가능성이 있는 자가 굳이 실버에 나올 이유가 뭐가 있을까?
‘나 같은 사정일지도. 여하간 재미는 있겠네.’
그렇게 대회는 계속되었다.
그간의 상황을 짤막하게 정리하면 포플러는 브론즈 대회에서 우승했다.
실버대회에 참가했던 왕자 요단은 8강에서 패배했다. 그 상대는 올랜드.
“아쉬웠다.”
“정말 간발의 승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올랜드는 준결승에서 올랜드가 떨어졌다. 상대는 바로 라이너였다.
사람들의 위로에도 올랜드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승부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라 봤는데, 은근히 우승을 노리고 있었나 보다.
은근슬쩍 날 쳐다보는 걸 보니 나와의 결승을 기대한 것 같은데 말이다.
‘이래저래 잘됐지.’
미딩의 내전이 감지된 덕분에 왕자 요단을 어찌하지 않아도 되긴 했지만, 그래도 껄끄러운 걸 올랜드가 상대해 줬다. 그리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친한 척 달라붙는 올랜드를 상대로 이기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알아서 다 떨어져 나가 주니 말이지.’
부담스럽지 않게 흥미가 있었던 라이너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 * *
이틀 후.
실버대회 결승전 당일.
“로라스. 이길 거지?”
“주군! 당연히 이기시겠지만, 봐주지 마시고 그냥 단번에.”
“센터의 명예가 너에게 달렸다.”
아침부터 포플러와 테라는 물론이고, 안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찾아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결승전이니 흥분할 수도 있다 생각은 하는데. 좀 지나친 것 같다. 그리고 몇몇은 매우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또 몇몇은 얼굴에 똥 씹는 듯한 표정을 짓고도 있었다.
“테라, 뭐냐?”
“주군 그게…….”
테라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듣다 보니 웃음이 나온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 전부?”
“네, 주군.”
테라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답하니 그제야 저 표정들이 이해가 갔다.
이 사람들은 모두 승자를 점치는 도박을 한 것이다. 몰랐는데 오가는 금액도 꽤나 큰 듯했다.
그리고 얼굴에 똥 씹은 이들은 모두 내가 아닌 상대. 라이너에게 걸고 싶었으나, 모두의 눈총을 받고 내게 걸 수밖에 없어 저런 거고 말이다.
“하핫. 포플러 때도 했겠네?”
물음에 당사자인 포플러가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한몫 단단히 잡았지.”
테라 역시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니, 재미 좀 본 듯싶다.
“그래서 배당이 어찌 되는데?”
“삼 대 일.”
“내가 삼이겠네?”
포플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몫 단단히 잡을 기회지. 이기면 세 배. 이럴 줄 알았으면 있는 돈을 싹싹 긁어 왔을 텐데 말이지.”
포플러도, 테라도 모두 내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좀 아닌 듯싶다.
‘삼이라…….’
사실 의외다.
나와 라이너의 체구의 차이. 그리고 그간 보여 왔던 비무 내용을 생각하면, 일반인들이라면 열의 아홉은 라이너의 승리를 점쳐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다.
여하간 나도 나에게 걸까 하다 관두기로 했다.
돈은 좋지만, 혹시라도 구설수에 오르면 곤란하다.
돈 몇 푼보다 우승으로서 얻는 명예. 할아버지의 신뢰와 락에 아이언 센터 지부가 생기는 일이다.
“거지는 만들지 않아야겠군.”
그렇게 말해 주고 가볍게 몸을 풀 때 진행자가 결승을 알렸다.
“우아아아아!”
관중석의 함성과 함께 비무대 위로 올랐고, 건너편에서도 라이너가 대검을 들고 올라왔다.
간단한 목례 후 바로 대결은 시작되었는데 말이다.
‘으음.’
오른손으로 대검을 쥐고, 검병 아래쪽 검신에 왼손을 대고 받치는 기수식을 취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티가 나는가?’
실력이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의외다.
시작부터 전력으로 포스를 발하는 것을 보니 내 실력을 눈치챈 것 같다.
‘여태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내 경지를 예측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라이너는 눈치챘다.
여태 비무에서도 늘 여유가 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그 여유를 남기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나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거지?’
그에 비해 내 무위가 어느 정도의 우위를 점할지 확신할 수 없다.
‘지도대련 따위를 해 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니.’
검을 잡고 숨을 골랐다.
‘먼저 올 것이냐?’
그런 의미의 시선을 건네자마자 그가 움직였다.
실버대회에서 이런 상대를 만날지 예상 못 했으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즐겨 주기로 마음먹었다.
스르르릉!
그렇게 부딪친 일초.
‘흘려?’
철음의 충돌음 대신, 서로의 검신을 타는 음이 들렸다. 볼 것 없다.
마스터 경지의 포스를 가진 이가 대검으로 내 검의 힘을 흘렸다는 건.
‘기습이겠지.’
두 검이 떨어지자마자 커다란 검면을 내보이며 그대로 밀어 왔다.
타아앙!
대검의 검면에 손을 대는 순간 거력이 몰려 들어왔다.
‘뭐가 그리 급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탐색전을 제한, 이기겠다는 의지가 담긴 기세에 몸의 무게 축을 뒤로 둬야 했다.
두 발이 떨어지며 몸이 쭉 뒤로 밀려났다.
‘이거 즐길 수 있는 수준도 넘어섰나?’
머릿속에 상대의 다음 그리고 또 다음 움직임까지 예측하면서 상대해야 할 듯싶다.
‘어디 밑천 좀 보자.’
이나마 제국이 서대륙에서 강국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이제 스물아홉.
저 나이에 이 정도의 경지라는 건 보통 기연이 없이 쉽지 않다. 내가 아는 이 세계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다.
그래서 궁금하다.
라이너가 어디까지 힘을 뽑아낼 수 있을지. 그리고 그만한 실력의 무인을 내가 어디까지 압박할 수 있을지가 말이다.
한마디로 비교 대상을 제대로 만난 것이기에 진력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십여 합이 지나갔고. 대검을 흘리고, 튕겨 내는 것으로는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
제왕검 제 1초식. 제왕기립帝王起立.
이 세계에서 사람을 상대로 제왕검을 펼쳤다.
피이이이잉!
검에서 하나의 기운이 형성되었고. 홀로 우뚝 섰다.
제왕검에 허초와 변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립은 그런 뜻이고, 그 의지가 대검의 기세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말이다.
‘뭐지? 이건!’
제왕의 의지에 대검은 굴복하지 않았다. 발악하듯이 버티는 것도 아니다.
대검에 담긴 사나운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절제된 기운만이 남아 제왕의 기운에 버텼다.
아니, 버텼다고 하는 건 맞지 않은 표현이다.
그래, 라이너의 기운은 주인의 정중한 초대에 응한 손님 같다.
‘이걸 어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은연중에 이 세계의 무인을. 그리고 그들의 근간이 되는 포스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초월자라 불리는 할아버지는 둘째치고, 권신이라 불리는 에르페유만 보더라도 무림에서도 손꼽을 만한 강자 아닌가?
그뿐인가?
영지의 시그탑만 봐도 이 세계의 포스는 특성은 저마다 다르다.
그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라이너의 기운에 당황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이 세계에도 이런 포스가 있단 거지?’
그건 라이너의 대검이 뿜어내는 기운이 나와 닮았기 때문이다.
제왕의 초대에 응한 손님임이 분명한데, 그 손님이 또 다른 제왕이라 설명하면 쉽게 이해가 될까?
‘누구냐? 어디서 배운 것이지?’
미칠 듯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만큼 재미있어졌다.
이 세계.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우글거리는 것인가? 게다가 마법이란 힘도 있는 세계.
전생, 유역후의 말년처럼 고독해지지는 않지 않겠는가?
“좋구나!”
나도 모르게 그리 소리를 질렀고. 촉천을 넘어 육보 승천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상대의 기세를 끌어내기 위해, 주인이 아닌 객이 되기로 했다.
제왕검 2초식. 제왕보행帝王步行.
그대로 검을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