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99)
대회가 개최되었다.
‘싸워도 외부인을 배제한 상황에서 싸울 생각인가?’
흉흉한, 긴박한, 다급한, 뭐 이런 수식어를 붙어도 될 정도로 상황이 돌아간다는 소문은 계속 들리는데, 정상적으로 대회를 개최하는 걸 보면 말이다.
‘세력이 팽팽하다던데…… 그래서일지도 모르지.’
알아 온 정보에 의하면 현재 미딩의 국왕파와 왕세자파의 전력은 정확히 반반이라 했다. 그러니 어느 쪽도 먼저 나서기가 곤란한 듯했다.
‘둘 다 머리는 아프겠군.’
지금 미딩에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와 있다.
대회 참가자들은 물론이고, 참가자들의 후견인들. 그리고 흥미를 위해 구경하러 온 자들까지.
구경꾼 사이에서도 실력 출중한 무인은 많다.
원래 에르페유까지 재미있을 거라면서 따라오려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미딩의 대회는 이 세계의 무인들의 잔치다.
왕과 왕세자, 둘 다 그 무인들의 조력을 구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둘이 비등한 세력이라면.
‘시간은 왕세자의 편이지.’
나이가 늙고, 젊음에 따른 말이 아니다.
왕의 권력을 가지고도 왕세자와 비슷한 세력을 형성하였다면, 마들린에게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왕세자가 유리할 확률이 높다는 것.
‘크게 상관은 없지.’
상관없다.
내가 여기서 할 일은 우승 트로피인 검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뿐파티 내내 친밀하게 굴던 왕세자를 어찌할 필요도 없었다.
이 상황에 대해 할아버지는 내게 전권을 부여했다.
아비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아들을 상하게 하려는 상황이다. 굳이 왕세자를 건드려 현 국왕에게 도움을 줄 필요는 없다.
‘나쁘지 않아.’
정말 이대로 끝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국왕 전하 입장하십니다!”
“우아아아아아!”
대회장 중앙에서 확성기를 들고 크게 소리치는 사내의 말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시선을 일제히 대회장 중앙에 적당한 높이에 마련되어 있는 단으로 돌렸다.
‘검왕이라…….’
미딩의 국왕이자 검왕. 마들린은 상식적인 왕의 차림이 아니었다.
투구는 쓰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전장에 나서도 될 정도의 전투 복장이었다. 옆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왕세자 요단의 차림과는 완전히 상반된 느낌.
노렸다고 봐도 무방할 차림이다.
‘그나저나 수련을 게을리한 건 아니네.’
나이가 쉰이 조금 넘었다고 알고 있는데. 몸은 잘 단련된 젊은 사람의 몸과 별 차이가 없다.
‘풍겨 나오는 포스도…….’
‘검왕’이라는 거창한 칭호까지는 무리이지 않을까 싶지만, 보기 드문 고수란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다시 한 번!
‘난 놈이긴 하네.’
그 옆에 앉아 있는 요단의 능력을 높이 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왜?’
아직 부자지간의 사이가 왜 그리 악화되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그냥 내 추측을 말하자면…….
‘주화입마. 그로 인한 노망?’
포스를 익혔다고 모든 육체의 질병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무림에서도 오존 중 일인이었음에도 치매 끼가 있었던 자도 있다.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을 때 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장에 마련된 연무대는 네 개.
두 개는 참가자가 가장 많은 브론즈 참가자들이고 다른 두 개는 실버 참가자들이다.
골드는 두 대회가 모두 끝난 후 할 예정이라 했다.
사전에 발표한 일정대로 참가자들이 순서에 맞춰 연무대에 올랐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테라가 첫 출전자다.
테라의 실력은 출중하다. 하지만 센터 이외의 장소에서, 타인과 대결하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긴장 어린 표정이 역력했다.
“락의 사람이라면 알겠지. 영지의 기사들이 항상 했던 말.”
올라가려는 테라에게 입을 열자, 녀석은 즉답했다.
“최약체 한 마리를 잡더라도 전력을 다한다.”
“됐다. 너에겐 그거면 충분하다.”
굳었던 테라의 표정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그리고 연무대에 올랐다.
옆에 있던 포플러가 입을 열었다.
“역시 어려. 날 상대로 하는 거라면 모를까? 저리 긴장할 필요 없을 텐데.”
녀석다운 말에 웃음이 나왔다.
“너도 방심은 하지 마라. 지면 가장 창피한 게 그거니까.”
“흐흐. 그럴 일은 없다. 로라스. 너를 직접 봤는데. 하지만 설마 브론즈에서 너 같은 녀석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아. 그건 반칙이잖아.”
그래 반칙이지.
여기서 시합이 시작되는 것처럼 실버 대회의 참가자들도 연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브론즈만이 아니라 실버에서도 반칙.
“나도 앞쪽이라. 끝내고 오마.”
“내가 먼저 끝내고 구경 갈걸.”
녀석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차아앙! 차아앙!
비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무대 위의 두 무인은 벌써 격렬하게 검을 맞대고 있었다.
‘대회 수준은 높은 편이군.’
귀족, 센터의 추천을 받고 온 무인들이라 그런지. 허술해 보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각자 있는 곳에는 그래도 천재 소리는 당연히 들었을 테고, 그에 걸맞게 훈련을 했던 사람들.
‘운명인 게지.’
모두가 상위권, 그중에서 소수는 우승을 꿈꾸고 있을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승을 양보해 줄 생각은 없었다.
락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약속 때문에 이 대회의 ‘우승자’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몇몇 팀이 더 오른 후 마침내 내 이름이 불리었다.
“잘해라. 시간 끌지 마. 괜한 희망은 고문이잖아!”
“주군. 이기십시오.”
어느새 자기 대회를 끝내고 온 포플러와 테라. 그리고 응원 나온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는 걸 들으며 연무대에 올랐다.
이 비무. 그리고 예선전에 대해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특별히 알아야 할 건, 대회 나흘이 지난 지금 토너먼트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세부적으로는 검왕의 후계자란 이름 아래 16강부터 요단이 출전했다는 것. 그리고 올랜드도 진출했다는 것.
당연히 나 역시 열여섯 명 중 한 명이었고, 이때부터는 비무의 변화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수백여 명의 참가자 중 열여섯.
나름 실력자이고 누가 우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그 날의 컨디션도 승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나는…….
별개의 문제다.
양 떼들 사이의 맹수는 컨디션이 아무리 나빠도 맹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맹수에게 도전하는 양들에게 나름 예의를 갖춰 주기로 마음먹었다.
“후우! 후우!”
내 상대 크라이라 불리는 사내는 요크 공국의 무인.
인구 오만도 안 되는 작은 나라에서 토너먼트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그였지만.
‘너무 긴장했군.’
과도한 기대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까지 운도 한몫했는지. 그는 크게 긴장을 하고 있었다.
“후우욱! 후우욱!”
나름대로 긴장을 푼다고 연신 심호흡을 하고 있지만…….
‘저리 과호흡을 하면 반응이 늦을 텐데.’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이다. 호흡이 너무 기니 그 타이밍만 제대로 훔치면 크게 약점을 보일 터다.
누구 말대로 희망 고문을 하지 않기 위해, 단숨에 상대를 쓰러트리고 올라왔지만, 이제부터는 나를 상대하는 불운을 위로하기로 마음먹은 터.
그의 호흡이 가라앉길 기다려 주었다.
‘전력으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보여 봐라.’
물론 이런 선의의 마음만 가진 건 아니다.
‘조금의 의혹도, 미련도 없이 진다면 눈먼 원망은 피할 수 있을 테지.’
승패에 대해 완벽하게 인정하게 할 생각이다.
안타까운 패배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속 시원히 전력을 다하고도 패배한다면. 상대의 존중을 살 확률이 높다.
이 대회는 세계에 나를 알리는 데뷔전이기도 하다. 좋은 인상을 심어 줘서 나쁠 게 없다.
그 이미지를 써먹을 수 있을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는 나중 문제.
“하아앗!”
창을 든 그가 마침내 결심한 듯 기합과 함께 달려들었다.
녀석의 봉을 전력으로 상대해 줬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척해줬다.
열의 힘으로 들어오면, 같은 열의 힘으로 맞대어 주고, 여덟의 힘으로 흘려 주었으며, 다섯의 힘으로 진격을 허용해 주었다.
타아앙! 타아앙!
철음과 함께 그의 창에 힘이 점점 더해간다.
‘손맛이 꽤 짜릿하지?’
갖은 방법으로 맞대어 주니 처음의 긴장감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맹렬한 기세만 남는다.
더 신나게 받아 주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구봉이 녀석 가르칠 때는 항상 전력을 끌어내 주기 위해, 같은 힘으로 맞서 줬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아슬아슬하게 피할 여력을 줬다.
전력을 다하는 순간, 살짝 허점을 찔러 줘 움찔하게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영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도 자주 사용한 훈련법이다.
똑똑한 놈들은 빨리 깨닫는다. 지금 내가 어떤 식으로 가르침을 내려 주고 있는지 말이다.
‘네가 영리한 만큼 가져가는 거다. 많이 가져가라.’
이 지도대련이야말로 내가 생각한, 상대의 불운에 대한 위로이며, 무인으로서 예의다.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은 방식이나 사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헉. 후우우. 허억!”
예상대로 몇 분 안 돼서 상대에게서 거친 숨결이 토해져 나왔다.
당연한 반응이다.
모든 무인의 기본 훈련 중 달리는 건 필수다. 심폐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다. 수천 번씩 허수아비를 내려치는 훈련도 한다.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훈련을 해도 쉽게 지치지 않는 무인들이 왜 실전에 들어가면 몇 분 만에 숨을 헐떡이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한 시간 이상 달려도 끄떡없으며, 수천 번 칼질을 해도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들이 말이다.
이건 간단한 문제다.
집중과 살기의 문제다.
훈련에서 하나의 힘을 쓸 때, 실전에서는 열 이상의 힘을 쓰고, 또 그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거의 본능이나 다름없고.
실전에서 몇 발자국 더 움직이고, 칼 한 번 더 휘두르기 위해, 훈련에서 그리 오랜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벽을 하나 넘어 경지에 이르면, 이리 실전에서도 훈련과 같은 힘을 쓸 수 있는 거지.’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의 힘을 가진 무인 두 명이, 둘의 힘을 가진 무인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실제로는 서넛의 힘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 미묘한 관계의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여하간 결과는.
“졌습니다.”
크라이는 자세를 바로잡더니, 이내 허리를 숙였다.
의외다. 나와의 실력 차이는 진즉 눈치챈 것 같지만 이리 승복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중앙관람석의 반응이다.
‘뭔가 엄청 아쉬워하는 눈치인데?’
아니, 똥 씹은 얼굴이다.
누가?
바로 검왕 마들린이 말이다.
더 웃긴 건.
‘쟨 왜 이리 좋아하지?’
왕세자 요단은 오히려 활짝 웃는 얼굴이다.
‘얼레?’
그리고 나를 보며 기쁨을 숨기지 않고 있다.
‘뭐냐? 쟤내들.’
순간 찝찝함이 몰려왔다.
확실히 왕과 왕자, 아비와 아들 간의 반목이 있는 건 확실한데 말이다.
‘뭐가 이용당하는…… 아니 이용당하는 느낌인데.’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남을 장기판의 말로 이용하는 건 익숙하나, 내가 말이 되는 건 익숙하지. 아니 한 번도 그리되어 본 적이 없다.
‘반응이 저 정도로 노골적인데 못 알아낼 것도 없겠지.’
일단은 지켜봐야 할 일이다.
누가 누구의 말이 될지는 말이다.
그렇게 대회 다섯 번째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