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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98화 (98/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98)

아무래도 우리 일행도 그 구조에서는 나름 상위인 것 같다.

한 무리가 다가오자, 눈치만 보던 귀족들이 슬슬 이쪽으로 몰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남들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데서 괜히 튈 필요도 없고, 남들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만으로 기본은 하는 법.

“로라스입니다.”

“귀 가문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리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이와 비슷한 말을 수없이 하고, 수없이 들었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다 생각했을 때 올랜드가 다가와서 말했다.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 옛날에는 영지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조상들의 활약을 설명하고는 그 후손 뭐뭐입네 하면서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었는지.”

“그런 거냐?”

“그런 거다. 표정 하나에 꼬투리 잡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니, 구설에 오르는 걸 원치 않으면 그냥 웃는 게 좋다. 포플러 봐.”

슬쩍 포플러 쪽으로 눈길을 줬다.

지치지도 않는지 그는 활짝 웃는 채로, 처음 보는 사람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저 녀석은 연기가 아니라 그냥 저런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여하간 미소를 잃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상대했다.

‘별 볼 일은 없네.’

뭔가 눈에 뜨이는 사람이 있다면 지루함도 덜했을 텐데. 젊은 사람들 중에서는 올랜드보다 나아 보이는 이가 없었다. 기준을 포플러에 맞춰도 마찬가지다.

나이 든 자들 중에서는 제법이라고 표현할 만한 사람들이 보이긴 했으나, 그런 사람들은 발이 무거운 듯 멀리 떨어져 있다.

“왕세자 전하 입장하십니다.”

그때 외침이 들리더니, 경쾌한 연주를 하던 음악단이 진중한 음을 내기 시작했다.

은발의 젊은 사내가 중앙에서 나왔다.

남자인 내가 봐도 잘생겼다는 말이 생각이 먼저 들 정도의 외모.

요단 미딩.

현 검왕 마들린의 아들로, 미딩의 다음 대 왕이 될 자. 그리고 내가 처리해야 할 사람이었다.

요단이 천천히 움직이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 뒤로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지만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음이 보였다.

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인사하고 이쪽으로 올 기회를 보고 있다.

‘의외군.’

소국이나 나라의 후계자이고 명성 높은 검왕의 자리를 차지할 자이나,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나고, 예의를 지킨다.

“소검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침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고, 포플러가 가장 먼저 예를 올린다. 나도 손을 가슴에 올리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베스타인, 아마란드 가문의 공자들이시군. 만나게 되어 기쁘네.”

요단이 정중이 예를 받았다.

‘으음!’

이상한 일이다.

배척당한다고 생각했으나 요단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호의적인 느낌이 더 강하다.

“근래 미딩과 제국 사이에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더군. 말 많은 자들이 늘 있는 모양이야.”

검왕 마들린이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요단을 보내 화해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걸까?

어쩌면 부친의 실수를 요단이 수습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방법이 잘못되었고, 타이밍도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애는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방 배정에 착오가 있다고 들었네. 내 담당자를 문책했으니, 새로 방 배정을 받을 거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곧 대회 아닙니까.”

나는 침묵했으나 포플러와 올랜드와 대화를 하는 걸 보면 내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실수였든, 의도였든 부친의 행위를 수습하고 싶어 한다.

대화는 계속됐다.

마음에 걸린다.

일반적으로 왕족의 오만함, 거들먹거림,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이런 게 보였으면 좋겠지만.

“잘 태어나서 얻은 이름. 무거워 벗어던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니 어떻게든 버텨 내려 게을리하지는 않지요. 분명 그리 생각했는데, 공자를 보니 정말 내가 열심히 한 게 맞는지 의심스럽군요.”

요단 왕자는 달랐다.

겸손하고.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하려 하고 있다.

당연히 마음에 걸리고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가문에서는 적대적 관계를 설정했지만, 생면부지의 사람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어야 하는 건 내키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여하간 왕세자와 우리가 함께 있으니 사람들이 이쪽으로 점점 몰리기 시작한다.

굴러가지 않은 눈덩이가 알아서 커진다고 할까?

제일 신난 건 포플러다.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데, 와서 추켜세워 주니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무래도 본가로 연락을 해야 할 듯싶다.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메시지를 보내는 마법 도구를 가져온 것으로 안다.

‘할아버지도 이런 분위기를 알고 계셔야 할 테니.’

그나저나 사람이 많이 모였다. 하지만 락에 도움이 될 자는 없으니 별 흥미가 일지 않는다. 차라리 에렌에서 파티가 내게 더 도움이 된다.

‘딱 내 데뷔 무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건가.’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고, 입은 웃고 있었으나 머릿속은 딴생각 중이다.

요단을 어떻게, 어디까지 처리해야 할지를 말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목적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밤은 깊어져 갔다.

* * *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군요.”

돌아오자마자 시종이 고급 정보를 전해 줬다.

“지금 급히 본가에 연락했고, 이곳에 있는 우리 쪽 사람들과 함께 사태를 알아보는 중입니다.”

계속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고급이 아닌 위급이다.

“근처에 있는 귀족들은 알고 있는 듯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멀리서 온 이들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딩에 뭔가 전쟁이라도 터질 거라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그럴 확률도 있습니다.”

시종은 굳은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사람들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내전이 일어났어도 진즉 일어났을 거라 말하는 세작도 있었습니다.”

“대책은요?”

“이미 나젤 경에게도 말한 상태입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호위 병력을 집결시켜 둔 상황입니다.”

“올랜드 쪽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은 모를 겁니다. 제국 내에서라면 모를까? 미딩에까지 세작을 심어 둘 여력은 없을 테니까요.”

하긴 할아버지니까 이 미딩에까지 사람을 심어 뒀고, 덕분에 너무 늦지 않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언질은 해 두세요.”

“공자님, 아마란드 가문은 우리 가문과 정적 관계입니다. 굳이…….”

“올랜드는 할아버지의 손님으로, 우리 일행들과 함께 왔습니다. 언질을 해 두세요.”

“네, 알겠습니다.”

급히 나가는 시종을 보며 생각했다.

‘페컴의 아랫사람이라더니 잘 모르는군.’

세상은 아마란드 가문이 베스타인 가문의 정적이라 알고 있겠지만.

‘황제도 한 수 접어주는 상황에서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할아버지는 아마란드 공작을 영감탱이라 칭하고, 그 영감탱이는 자신이 귀애하는 손자를 할아버지에게 맡겼다.

정적과는 거리가 멀다.

‘그나저나 정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지금 상황은 할아버지도 잘 모르셨던 게 틀림없다.

‘연락을 했다니 곧 답이 오겠지.’

집안싸움은 원래 피하는 게 상책. 특별히 뭔가 문제가 되지 않는 한 이 일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침상에 눕지 않고 가부좌를 틀었다.

중한 일이니 오늘 내로 답변이 올 확률이 높을 터.

그래서 운기조식을 시작했고, 예상대로 몇 시간 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문을 열어 보니 호위대장과 시종, 그리고 몇몇의 마법사가 와 있었다.

마법 통신을 위한 이들이다.

마법 통신은 특별한 마법이다. 마정석과 마법 도구의 소모는 둘째 치고, 메시지를 받는 곳은 마탑이어야 한다.

사실 이것도 할아버지가 만에 하나 내게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보냈을 확률이 높다.

“연결됐습니다. 짧게 메시지를 보내셔야 실패 확률도 낮습니다.”

잠시 후 에렌의 마탑과 연결되었다 했고, 난 매직펜을 들었다.

물어볼 건 이미 생각해 둔 상황이다.

[문서]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요?[문서]

옆에서 지켜보던 나젤 경, 그리고 시종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당연히 미딩에서 철수할지를 물을 거라 생각했겠지.’

하긴 에렌에서 온 전력은 상당하나, 남의 나라 내전에 낄 수준은 되지 못했으니까. 그게 아무리 소국 미딩이라 해도 말이다.

할아버지라면 이해할 것이다.

잠시 후 메시지 도구가 빛을 발휘했고 주변의 사람들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모든 이는 로라스의 판단에 따른다.

그리고 난 미소 지었다.

* * *

미딩의 내전은 제국 입장에서는 물 건너 불구경만큼의 흥미로운 일. 딱 그 수준이었다.

제국에 뭔가 타격이 올 일은 없다는 것이다.

승자가 누가 되든 제국의 이득을 따지며 외교 관계만 정립하면 될 일.

하지만 에렌은 그냥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대회 참가자는 물론이고 에렌의 주축 상단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괜히 휩쓸려 문제가 생긴다면 체면 때문에라도 움직여야 했다.

문제는 거리고, 또 그사이에 있는 나라들에 협조를 구해야 하니 시간도 필요하다.

일이 꼬이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는 상황임에도 베스타인 공작은 여유가 있었다.

“왜 그리 보나?”

“너무 과감한 판단이 아닐까요?”

그랑데일의 반문에 공작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데뷔 무대이지. 녀석을 제대로 파악해 볼 기회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랑데일은 지금의 공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번 믿으면 큰 실수 없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주군이었으나, 그 대상자가 손자다.

‘나이가 드셨는가.’

듣고는 있다.

로라스가 공작에게 엄청난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말이다. 그럼에도 이번 결정은 지나침이 있었다.

‘뛰어나다 하나 아직 어리다. 에르페유와 헤르메스도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일 터. 즉각 철수도 아닌 판단이라니!’

그 말뜻은 내전에 관여하라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군대니 뭐니 동원하면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회의에 참여했던 에르페유가 하는 말에 헤르메스도 나섰다.

“제가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로라스를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말에 그랑데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주군이야 사랑하는 손자에게 콩깍지가 씌었다 치더라도, 이 사람들은 뭔 말을 하는가?

‘말려도 모자랄 판에.’

걱정은커녕 판을 키우겠다는 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총애가 아닌 사지로 등 떠미는 격이 아닌가.

“됐어. 자네들도 궁금했잖아.”

그때 공작이 하는 말에 그랑데일이 혼란을 느낄 때 헤르메스가 말했다.

“궁금이야 했지만 의심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 기왕 남의 일에 참견해야 한다면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현 미딩의 왕이 검왕이니 뭐니 하는 건 그러려니 해도, 감히 주군을 모욕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기회에게 확실히 손을 보시지요.”

에르페유도 한마디 하자 회의장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공작은 그 모두의 말을 들은 이후 입을 열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어쩌면 양쪽 다 대회가 끝난 이후 일을 시작할지도 모르고. 지금은 무슨 결론을 내려도 바뀌게 될 확률이 높다.”

“…….”

“기본적으로 기다리되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준비만 하면 되겠군.”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내뱉던 사람들이었으나, 공작이 결론 내린 후 입을 연 이는 없었다.

준비하라는 명령만 생각하며 그리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을 뿐.

회의실에 홀로 남은 공작은 턱 끝을 쓸며 생각했다.

‘설마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기특한 손자였다.

누가 가르쳐 줬을 리 없을 텐데 본능적으로 사람 관리를 하고, 사람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것을 조절한다.

제 아비의 영향에다 제 능력에 비해 조그만 것에 만족하려는 성향을 보였으나 자신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원했다면 무섭게 자신의 것을 만들어 갈 것이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공작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생각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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