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96)
에렌성에는 손님을 위한 게스트 룸이 많다.
황성보다 더 많은 손님이 찾는다는 곳이 에렌성이니까. 그런 게스트 룸에서도 최상급의 방에서 금발의 청년이 한 중년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라스도? 역시 실력은 좀 있었나? 하지만 실버라니. 너무 어리잖아. 그 나이면 브론즈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올랜드의 말에 시종이 답했다.
“아이라 치부할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알아보니 에르페유 경과 매지스터 헤르메스가 애지중지하는 제자라고 하더군요.”
“포스와 마나를 동시에 배워?”
“그렇다고 합니다.”
시종의 대답에 올랜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크게 걱정할 게 없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양쪽 다 어중간한 재능이란 거지. 하나를 파도 모자랄 판에. 애라서 그런지 마검사 같은 그런 이야기를 꿈꾸는 거 아닌가?”
시종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에르페유 경이 어떤 사람입니까? 권신입니다. 아무나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건 매지스터 헤르메스도 마찬가지고요.”
“로라스가 아무나는 아니잖아. 공작의 성에 머물 정도로 총애받고 있는 아이니, 에르페유도 제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
올랜드의 말에 시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시종의 신분으로 올랜드 옆에 있지만 사실 그는 아마란드 가문의 시크릿 가드.
올랜드는 아마란드 가문에서 후계자 중 하나로 키우고 있는 인재. 그런 인재를 아무 준비 없이 에렌으로 보낼 리 없다.
시크릿 가드 중에서도 최고라 손꼽히는 오레인을 딸려 보냈다.
오레인은 올랜드의 경계심을 세워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스타인 가문의 시험에서 최종 합격자 중 하나라 들었습니다. 게다가 부친이 바로 그 에듀 베스타인입니다. 허투루 보시면 안 됩니다.”
“에듀 베스타인?”
“네. 후계자라 하더군요.”
“흐음. 실버 스워드 최연소 우승자라는 건 알아. 하지만 그뿐이지 않았나?”
“그건 사정이 있어서.”
“여하간 나이 스물인데 내가 그리 신경을 써야 하나?”
오레인은 바로 그걸 조심하라 말하고 싶었다.
물론 자신도 로라스가 우승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스타인 공작이 어떤 사람인가?
핏줄이라 해도 능력이 없으면 핏줄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린 손자를 대회, 그것도 공신력 있는 대회에 보냈다는 건.
‘최소 남들에게 이름을 알릴 만한 실력은 있다 생각한 거지. 젊은 무인에게 그만한 데뷔 무대는 또 없으니까. 게다가 실버 스워드라면 더더욱.’
오레인은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려고 할 때 올랜드가 먼저 말했다.
“그보다 그 숙녀분은?”
“마탑에는 없더군요. 로라스만 올라온 것 같습니다.”
“으음. 그건 매우 아쉬운데.”
‘관심이 다른 곳에 가 있으니 봐야 할 것들을 못 보고 있구나. 본가에 연락이라도 해야 하는가?’
오레인의 고민이 깊어졌다.
* * *
출발 후에는 이동 문제로 격렬하게 몸을 풀 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센터의 연무장에는 출발 전날임에도 불구하고 대회 참가자들이 모여 신나게 몸을 풀고 있었다.
테라의 수련을 봐 주려고 하는데, 의외의 인물이 다가왔다.
“로라스.”
몇 번 본 것으로 자연스레 내 이름을 부르는 그는 올랜드였다.
“올랜드 공자.”
나와 인사를 하고, 테라와 포플러를 소개하고 소개받고, 으레 하는 대화들이 오갔다. 그리고 같이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
올랜드의 성격은 파악하기 쉬웠다. 처음 봤을 때는 제법 진중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포플러과다.
적당히 잘난 체하고, 말도 많고, 그러면서 실력도 제법이다.
지금도 보라.
단 몇 시간 만에 포플러는 물론이고 테라와도 10년은 넘게 사귄 듯한 친구가 되었다.
사교성은 타고난 것 같다.
“로라스!”
그 바람에 너무 격의가 없고.
“꼭 에르자일 님을 소개시켜 줘야 한다.”
너무 달라붙는다.
“왜 대답을 안 하는데.”
“본인 일은 스스로 해라.”
무시하며 포플러를 불렀다.
“포플러! 뭐해? 시작해야지.”
“오늘은 몸이 좀…….”
빼는 놈을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하루 종일 마차에 있을 텐데. 컨디션 조절은 그때 하고. 그 전까지는 최대한 몸을 혹사해야지. 네 근골은 완성된지라 그래도 돼.”
“아, 오늘 하루는…….”
엄살을 부리면서도 검을 잡는 포플러.
스스로도 알 것이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실력이 늘고 있는지.
녀석과의 수련은 내게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된다.
“오늘은 반드시 깬다.”
언제 엄살을 부렸냐는 듯 투지를 불태우는 포플러.
녀석과의 수련 방식은 간단하다.
녀석은 진검을 들고, 난 두 손으로 싸운다.
처음에는 기겁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며 화도 냈다.
물론 그 분기는 열과 성을 다한 내 지도 방식에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래, 오늘은 반드시 깨라.”
두 손을 들었다.
무기를 들지 않은 포플러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황금 같은 시간, 내게도 이득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나를 부르고, 모으고. 그것을 압축한다.
‘실드!’
그것을 만들어 내기 무섭게 포플러가 달려든다.
터어어어엉!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압력.
맞다. 내가 포플러와 대련에 시간을 쏟는 이유는 마법을 실전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다.
무공이야 보는 순간 손발이 나가는 경지지만 마법은 다르다.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
이리 절차가 길어질수록 반응은 늦어지고, 그럼 죽는다.
전생에도 명문대파의 제자들이 마적단, 도적들 따위에게 죽은 게 바로 이런 이유였다.
봐도 생각이 없으며, 생각이 있어도 판단이 느리고, 판단을 해도 움직이지 못한다.
‘아!’ 하면 ‘어!’ 하고 ‘야!’ 하면 ‘왜?’라고 하는 것처럼 즉각적인 반응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경험인 것이고. 내게 있어 마법은 그런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포플러는 훌륭한 파트너다.
기본에 충실하고, 타고난 힘이 있으며, 가끔 영리한 수를 구사할 줄도 안다.
파아앙!
실드가 흔들리며 소리가 난다. 호언한 것처럼 작정하고 검을 휘두르고 있다.
흙의 기운. 강화. 주입했다.
내력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은 채, 마나로만 수갑(手甲: 손을 보호하는 갑옷)의 위력을 발휘한다.
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포플러는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이제 난 경험 없는 4클래스 마법사이고, 원거리 공격을 포기하고 근거리 전투를 벌이는 중이니까.
타아아앙!
강하게 녀석의 검 면을 후려쳤지만 우뚝하니 버틴다. 버텼으니 다음 수가 나올 터.
‘이놈이!’
포플러가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충격에 서로의 손이 길을 잃은 순간, 그대로 몸통으로 박치기 해 왔다.
질량으로는, 그리고 마법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포플러의 덩치와 무게가 나보다 3할 이상 크다.
타악!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두 발을 떼었다. 넘어지는 것보다는 밀려나는 게 더 낫다. 하지만 그 순간 포플러가 기다렸다는 듯이 검병으로 옆구리를 쳐 온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몸을 틀어 그의 옆쪽으로 이동했으나, 순간 놈이 왼손으로 내 다리를 잡는다. 그리고 끌어 내린다.
균형을 잡는 순간 다시 검이 다가왔다.
‘실드!’
급히 수인을 맺었으나.
쩌어어어엉!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기어코 내 실드를 소멸시켰다.
‘젠장이로세.’
경신술(輕身術: 몸을 가볍게 하는 수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실드는 깨지고 내력을 사용해 버렸다.
“깼다, 깼어!”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포플러를 향해 손을 들었다.
“파이어…… 야! 그건 반칙이잖아!”
가볍게 불덩이를 날려 줬다.
* * *
‘이거군!’
실드가 깨졌다는 사실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너무 자신감에 찼었다.
‘마법은 분명 포스와 다른데 말이지.’
그래도 마법 응용의 부족함을 알았고, 정성을 다해서 보완했으면 됐다.
‘마법사라…….’
다시 한 번 느꼈지만 이 마법이란 거, 너무 재미있어 미칠 것 같다.
확실히 재미는 무공보다 마법이다.
‘주객이 전도될 판이네.’
며칠 포플러를 상대하면서 마법 쪽만 수련한 것 같다.
‘어차피 마차 안에서는 운기조식만 해야 할 테니.’
곧 동이 틀 시간인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괜히 부모님이 생각났고, 중원이란 세계에 두고 온 제자들이 생각났다.
‘그나저나 백부가 매우 아쉬워하겠군. 이제 막 중독됐다 여길 텐데.’
놈들이 복용시킨 마약은 아주 효과가 좋았다.
알면서도 마약이 투입되었는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약하게 시작되기도 했다.
가벼운 흥분감과 더불어 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가볍게 봤다면 살짝 위험했을 정도다.
‘다른 백부들도 중독당했으려나?’
돈 때문이 아니라 독약과 마약 때문에 더블엑스의 뒤를 봐줬다는 게 확실해진 상황에서, 이 정도 의심은 당연했다.
‘다른 분들도 내게 이러면 곤란해질 텐데 말이지.’
그래도 핏줄이니 웬만하면 좋게 좋게 해결하고 싶은데 말이다.
‘권력이라는 게 늘 그런 법이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예측 가능했다. 날 라이벌로 인식하면 끊임없이 공격을 시도할 것이다.
당해 주는 척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인데, 할아버지가 그 경각심을 다시 일깨웠다.
‘귀한 손자지만 아들이 더 중할지도.’
이해 가능한 범위다.
그보다는 어제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게 더 걸린다.
―너를 완전히 모른 채로 게임에 임하면 너무 불리하지 않겠느냐?
‘게임이라…….’
정말 날 의식하고 계신 건지도 모른다.
‘참가할 생각은 없는데.’
그런 거 안 해도 원하면 다 가질 수 있다. 이미 더한 것도 가져 봤다.
적당히 무시당하지 못할 수준으로만 락을 키우는 게 목적.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또 모르지. 아버지가 거기에 관심을 가진다면.’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단순하게. 그리 결론 내렸다.
* * *
“다녀오겠습니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보여 줘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구나.”
“제대로 안 보여 줘도 원하시는 건 다 가지실 겁니다.”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원하는 것을 가져와라. 상을 주지.”
“그 말씀 꼭 기억할 겁니다.”
“겸손해져라. 잘난 걸 잘났다 하면 적이 많아진다.”
“적당히 잘났을 때 얘기죠. 압도적으로 잘나면 오히려 친구가 되고 싶어 할 겁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할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비롯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딩으로 가는 긴 행렬이 출발했다.
미리 페컴에게 부탁해 내 마차에는 테라와 포플러를 태웠다.
“주군. 주군께서도 외국은 나가 보지 않으셨지요?”
테라는 생전 처음 외국으로 가는 것이 신났는지, 흥분된 표정으로 물어 왔다.
“처음이지. 하지만 에렌과 크게 다를 게 없어. 오히려 에렌보다 볼 건 더 없을걸.”
“맞아. 왜 사람들이 에렌에 한번 여행 오길 그리 바라는데. 다 시시해 보여.”
옆에서 포플러가 거드는 말에 테라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외국이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와는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요?”
“다른 거야 있지. 크크크크.”
포플러가 음흉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여자. 남부 여자는 제국의 여자들에 비해 작거든. 그러고 보니 테라, 너 아담한 여자가 취향이라고 하지 않았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언제!”
“유곽도 한번 가 보고 싶다 했잖아. 모아 둔 돈 좀 있지 않아? 이번에 미딩에 가면 같이 한번 갈까?”
“자꾸 이상한 말 하지 마십쇼. 제가 언제!”
얼굴을 붉히며 내 눈치를 보는 테라. 포플러가 날 보며 말했다.
“로라스, 넌 테라 용돈 좀 챙겨 주고 그래야지. 이 녀석이 얼마나 짠돌인지 알아? 몇 년 동안이 녀석에게 술 한 잔 얻어먹어 본 게 한 손에 꼽을걸.”
“그거야 형은 매일 고오오오오오급 하면서 비싼 술만 찾으시니.”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가는 동안 심심할 일은 절대 없겠군.’
모처럼 나들이 나온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