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95)
대답 못 하는 페컴을 보며 공작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역으로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걱정하는 건 로라스가 아니야. 큰놈이지.”
“네?”
“로라스를 그리 봤는데도 감이 안 잡히나? 그 아이가 큰놈의 속내를 모를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로라스는 아직…….”
“애라고?”
페컴이 대답을 못 하자 공작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자네마저 속인 것인가. 그 엉큼한 놈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아, 로라스가 언제 조급해하는 거 봤나?”
“그러고 보니 그런 모습은 보인 적이……. 늘 여유가……!”
순간 페컴은 공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리고 왜 대공자를 걱정하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로라스는 아직 어린 게 분명했고 작위 또한 없다. 락의 소영주. 그게 그가 가진 전부다.
공작이 말했다.
“여유가 있는 건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가질 거라는 걸 너무나도 당연시하기 때문이지.”
“…….”
“게다가 눈치는 또 어떤가? 사람을 사귀는 방식은?”
공작의 말이 계속되어 갈수록 페컴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녀석은 선을 긋기 모호한 구역에도 선을 긋는단 말이야. 마치 모두 경험했던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처럼. 그렇게!”
공작은 귀 옆머리를 살짝 긁으며 말을 이었다.
“큰놈이 뭘 하는지 자세히 알아봐. 일이 계속 진행되면 곤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이니.”
“네, 주군.”
페컴이 급히 자리에서 나가자 공작은 미간을 찡그렸다.
‘제 아비와는 좀 다른가?’
에듀도 그랬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나쁜 곳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듀는 그런 이들에게 직설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로라스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저급한 방법으로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이제 알 때도 되었을 텐데.’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디존슨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얼마 전 로라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지나치죠. 그중에서 제가 최고니까요. 대회의 취지를 생각하면 저는 반칙입니다.
맞는 말이다. 반칙이다.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지.’
에렌에서 로라스는 전도유망한 젊은 귀족이라 알려져 있다.
당연하다.
자신도 그렇고, 에렌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에르페유와 헤르메스에게도 총애를 받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둘 다 아나 몰라. 로라스의 경지가 곧 자신들을 추월하리라는 걸.’
며칠 전 로라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그저 예상대로 훌륭하게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분위기에서 흘러넘치는 여유는 둘째 치고, 실제로 그의 포스는 제대로 개화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문제였다. 자신마저도 로라스의 경지를 착각할 뻔했다.
로라스의 경지는 개화가 아니었다.
개화를 이미 한 후 자연스레 그것이 몸에 밴 경지다.
‘말도 안 되는 속도지.’
자신도 마스터가 된 이후 그 경지가 너무 자연스러워 일반인처럼 보일 때까지 5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로라스는?
‘이 속도라면 서른 후반에는 초월자의 경지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포스란 깨달음이 대부분이긴 하나, 그 나머지 부분은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로라스는 그 시간마저 뛰어넘는 듯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속도.
‘그나마 이번에 외국으로 나가니 그때 일을 좀 처리하고.’
공작은 아들을, 그리고 손자를 위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요 며칠 에렌성은 어수선했다.
미딩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만 이동한다면 며칠씩이나 어수선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이 짐들이다.
수십여 대의 수레들.
실린 것은 다양하다.
철제 무기부터 가죽 방어구를 시작으로 식량이며 각종 생필품 등이 가득했다.
더욱 놀란 건 센터에 가서였다.
대회 출전을 위해 센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짐수레의 경계가 삼엄했다.
“저게 다 뭡니까?”
“금화와 은화지.”
대답하는 에르페유의 말투가 퉁명스럽다.
뭐에 심통이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짐수레에 실린 상자의 양이 상당하다.
“이게 전부 미딩으로 가는 겁니까?”
수레를 보면서 묻는 말에 에르페유가 대답했다.
“그래. 지금 성도 바쁘지?”
“네?”
“여기서도 이제 시작이다. 아직 준비할 게 산더미야. 이번에는 상단 몇 개도 따라붙을 것이다. 당연히 호위 병력도 따라붙을 테니, 그들이 쓸 것도 준비해야 할 테고.”
“그런데 저 상자들은…… 여비로 하기엔 좀 그런데요.”
“원조 자금이다.”
“원조 자금요?”
“주군께서도 포스를 숭배하시는 분이니까. 대회 때마다 미딩에 거액을 기부하시지. 금액 순으로 줄을 세우면 맨 앞자리이실걸.”
‘그런데 왜?’
순간 의문이 들었다.
에렌에서 이만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왜 할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말이다.
‘대체 어쩌다 심기를 건드린 거지?’
할아버지는 한 사람을 실버 스워드 대회에서 죽이거나, 최소 불구를 만들라고 했다.
그 사람은 바로 검왕이라 불리는 미딩의 왕의 후계자다.
그때 에르페유가 한마디 했다.
“간땡이가 부었지. 주군께서 지원을 끊으면 당장 곤란해질 것들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나도 어제 알았다. 몇 달 전 미딩의 왕이 망언을 했다더구나. 생각하니 욕이 나오는구나.”
할아버지의 일 때문인지, 에르페유는 보기 드물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가 날 보며 물었다.
“지금의 검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 알고 있느냐?”
“몇 년 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원래 전대 검왕. 그러니까 미딩의 전대 왕과 주군은 막역한 사이였다. 아니, 검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에르페유의 말은 이랬다.
현재 할아버지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초월자라 불리는 존재이나, 몇 년 전에는 둘이라 했다.
파라일 린 베스타인 공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한 사람.
그건 전대 검왕 가일렌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와 딱 세 번 마주했다고 했다. 처음 만난 후에 미딩의 지원을 두 배 늘렸다고 했다.
“처음이었다. 주군이 아무 계산 없이 누군가를 그리 돕고 싶어 한 건.”
에르페유는 계속 말했다.
“8년 전 그분께서 세상을 떠났을 때, 주군께서 직접 조문을 갈 정도였지. 그런데 지금 검왕인 마들린. 이 미친놈이 헛소리를 했다.”
“어떤…….”
“자신의 부친이었던 가일렌만이 유일한 초월자였으며, 주군께서 부친에게 패했다고. 그래서 그 대가로 미딩에 막대한 지원을 하는 거라고.”
“미쳤군요.”
“미친 수준이 아니지. 그건 그냥 뭐랄까? 생각이 없는 놈이지. 사람들이 검왕 검왕 하니까 자신이 정말 주군과 비슷한 줄 알아. 나와 붙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놈이.”
“그래도 실력은 있군요. 스승님과 견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실력이야 있지. 하지만 그 실력이 어디서 나온 건데. 전대 검왕께서도 주군을 깍듯이 예우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후계자인 마들린을 이곳으로 수련 보냈을까?”
잠깐. 그렇다는 건…….
내 의문을 읽었는지 에르페유도 기가 찬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거 맞다. 마들린 그놈은 주군께 무공을 배웠다. 그것도 엄청난 지원을 받아 가면서. 젠장! 그런 지원은 나도 받지 못했는데.”
에르페유의 말에 따르면 마들린이 받은 각종 혜택은 지금 내가 받는 것을 상회했다고 했다.
‘그만큼 할아버지가 신경을 썼다는 것인데 그런 망발을……. 모자란 건가?’
마들린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권력자는, 특히 할아버지 같은 최상위 권력자는 자신의 명성, 위엄에 금이 가는 일을 절대 용납지 않는다.
그게 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두고 보지 않는데 하물며 타인이야.
철옹성 같은 권력이라 해도 어디 하나 금이 가고, 구멍이 나는 순간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게다가 그 타인이 한때 애지중지했던 사람이라면 배신감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막대한 기부금을 보내냐고?
당연하다. 당장 지원을 끊어 버리면, 사람들의 눈에 할아버지는 속이 좁아 보일 테니.
‘그래서 날 선택하신 건가?’
이제 모든 게 이해가 갔다. 나를 내세워 그들에게 벌을 주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려는 것을.
자신을 건드렸을 경우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게 말이다.
‘그런데 굳이 나를 보낼 이유가 있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할아버지는 분명 내게 일정 부분에서 기대를 걸고 있고, 그래서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일에 손에 피를 묻히게 한다?
약간 납득하기 어려웠는데, 여기에 대한 해답도 에르페유가 알려 줬다.
“네 부친과도 친분이 있다. 마들린이 여기 오는 날. 네 부친도 미딩에 갔었으니까.”
“아버지께서요?”
“그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주군께서 네 부친에게 거는 기대가 막대했다. 마들린이 에렌으로 오는 날, 네 부친은 미딩으로 갔었다.”
이해했다.
체면에 에르페유나 헤르메스 같은 수족을 동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베스타인 가문의 핏줄이 아니었으니까.
나를 보냄으로써 완벽하지 않은가?
당신도 아래 배분이나 다름없는 자에게 당했으니 돌려주는 것도 그래야 했고, 배분상 난 검왕의 아래이니까.
에르페유가 계속 말했다.
“그런 의미로 반드시 실버 스워드를 가져와. 그렇게 되면 부자가 전부 실버 스워드 우승자가 되겠구나.”
“가져올 건 가져와야겠지요. 그럼 이제 슬슬 스승님과도 거래를 해야 할 때가 됐군요.”
“거래?”
“가져오는 건 가져오는 거고, 센터와 스승님의 이름을 천하에 올릴 기회 아닙니까? 우승하고 오면 동상이라도 세워 주시는 겁니까?”
“흐흐흐흐.”
“웃음으로 때우시면 곤란합니다.”
“내가 뻔히 아는데 그냥 달라는 거 아니냐?”
“그냥 주시면 또 어떻습니까?”
“대체 어그런 뻔뻔함은 어디서 배워 오는 것이냐?”
그는 정색했지만, 그냥 속아 넘어가기에는…… 그의 연기가 너무 어색하다.
“당연한 요구지요. 아이언 센터를 세계 십대센터 따위가 아닌 오롯이 홀로 빛낼 센터로 올릴 건데요.”
“그렇게만 되면 금으로라도 동상을 만들어 주지.”
“동상은 그리 영양가가 없는 것 같은데요.”
“원하는 게 있구나. 말해 봐라.”
“락에 훈련소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훈련소?”
“네.”
“거기는…….”
에르페유는 잠시 머뭇거렸다.
센터는 마탑과 다르다. 마탑은 대부분 연구 시설이지만, 센터는 매일 쉴 새 없이 가르치고 수련해야 한다. 그냥 훈련소라 하나더라도 딸려 가야 할 교관이 필요하다.
그의 고민을 덜어 주기로 했다.
“센터도 지부를 하나 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수련생은 필요 없습니다. 교관 몇과 스승님의 이름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만 주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에르페유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 기다리지는 않았다.
“알겠다. 단, 너도 반드시 신경 써야 한다.”
“물론입니다. 결국 센터는 스승님의 명성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준비하마. 원숭이 나무에 떨어지듯이 우승해서 오지 못하면 날벼락 맞을 줄 알아.”
“그런 일은 길 가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적을 겁니다.”
그렇게 에렌에 온 목적 중 하나를 달성했다.
락에 센터가 생기면 발전 속도가 더 빠를 터.
‘개발이 번잡해지면 문제도 생길 테지만…… 일단 그것도 사람이 늘고 난 후에 고민할 문제다.’
고민해야 할 건 이번 대회 참가자들이지 내가 아니다.
반칙이긴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리 공평했던가.
강자존의 세상.
그 익숙한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을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