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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94화 (94/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94)

할아버지는 웃음을 지우며 말했다.

“그 대답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도 제법 하는 놈이다. 그 꼼생이의 핏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

할아버지는 그리 말하며 실눈을 뜨고 물었다.

“어떠냐?”

“뭐가 말씀이십니까?”

“너랑 붙는다면 말이다.”

노친네. 또 무슨 약을 치려고.

“진심이십니까?”

“자신 없냐?”

“그 뜻이 아니라는 거 아실 텐데요. 에르페유 경이나 헤르메스 경에게 보고받지 않으십니까?”

할아버지에게 신뢰를 받기 위해 경쟁하는 두 사람이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리 없다.

잘난 손자 이야기를 싫어하는 할아버지는 없으니 말이다.

예상대로 할아버지가 피식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보면 오만이라 할 수도 있겠구나.”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이지요. 그걸 아시니 할아버지가 절 곁에 두려는 거 아니셨습니까?”

“건방진 놈. 누가 누굴 옆에 둬. 나랑 이리 얼굴 한번 맞대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는데. 이 엄청난 특혜를 받는 넌 고마워해야 한다.”

할아버지와 비슷한 표정으로 답해 줬다.

“저만 한 손자를 찾는 분들도 많지요. 아무리 줄을 세워도 찾지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한마디도 안 지는구나.”

“대신 기쁨을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나름 밥값이라 생각하는데요.”

“부족하지. 너 먹이려면 그냥 식탁에 밥그릇 하나 더 올리는 게 아니란 것쯤은 네가 잘 알지 않느냐?”

순간 조손간의 농이 아닌,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혹시 제대로 밥값을 해야 할 때가 온 겁니까?”

“밥값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너 어디 좀 갔다 와야겠다.”

“어디를 말입니까?”

“미딩.”

“미딩이면…….”

그제야 할아버지가 뭘 원하는지 알았다.

“알겠습니다. 가야지요.”

“이번엔 별말 안 하는구나?”

“기회가 닿으면 가려고 했습니다. 제가 거기서 가져와야 할 게 있으니까요.”

할아버지는 허리를 살짝 뒤로 젖히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가져와야 할 게 있다?”

“실버 스워드. 그것 때문에 가라고 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 하지만 마치 네 것처럼 말하는 건 지나치지 않을까? 네가 잘난 건 맞다만, 세상에 잘난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지나치죠. 그중에서 제가 최고니까요. 대회의 취지를 생각하면 저는 반칙입니다.”

“전혀 지나치지 않았다.”

순간 할아버지의 미소가 싹 사라졌다.

뭐가 잘못됐나 싶을 때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 하나 죽여야 할지도 모를 테니.”

“…….”

“겁나느냐?”

아! 순간 당황해서 말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필요하면 죽여야지요. 누굽니까?”

이번엔 할아버지가 당황할 차례였다.

미딩.

마법사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그 작은 나라는 오로지 무만 숭상한다.

크기는 작은 도시급이나 그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포스를 지난 자들의 성지 같은 곳이라 아무도 적대시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신국과 비슷한 포지션이나, 그 어떤 나라도 미딩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이유는 미딩이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무를 수행하는 곳.

건국부터 미딩은 그것을 모토로 하였고, 그 탓에 정치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라가 돌아갈 수 있는 건, 수많은 무인들의 기부금과 순례자의 성격을 띤 사람들이 도시에서 쓰는 돈 때문이다.

법도 필요 없다.

기사라면 누구나 알 만한 기사도가 그들의 법이었으니까.

그렇게 돌아가는 게 신기한 나라를 점령하는 건 아무 이득이 없다. 결국 소도시 하나 손에 넣는 꼴인데, 그 누가 탐을 내고 신경을 쓰느냔 말이다.

실제로 지난 400년 역사 동안 미딩은 단 한 번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할아버지. 그것을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손자.

그 이상한 조합에 할아버지는 확인하듯 물었고.

“하겠다고?”

난 반문했다.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죽이진 않더라도 최소한 팔 하나는 잘라서 불구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농이 섞일 수 없는 표정도, 내용도 아니다.

“이름만 말씀하십시오.”

묻지 않아서 의외였을까?

“왜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할아버지가 오히려 물었지만 묻지 않는 결정은 변함이 없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실 테니까요.”

내 속 편하려고 묻지 않는 게 아니다. 이래야 할아버지에게 빚을 지울 수 있고, 그것으로 락을 발전시킬 테니까.

“날 웃게 만드는 녀석은 너밖에 없구나. 실력도 없이 이름만 내세우며 으스대는 녀석들이 천지인데.”

할아버지가 표정을 풀며 말을 이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넌 날 실망시키지 않았지. 그리고 깊게 생각할 줄도 아니까. 알았다. 열흘 후 미딩으로 출발하는 사절단이 있다. 그때 같이 출발하거라.”

“네, 할아버님.”

그제야 할아버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 * *

“패해서 죽었다는 거 아닌가.”

“네, 대공자.”

“그래서 내게 문제가 생기는 게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 고스트란 조직도 눈치가 있는지, 더블엑스가 해 왔던 것들을 그대로 계승하고 싶어 합니다.”

디존슨은 술잔을 들며 말했다.

“그럼 됐잖아. 굳이 그따위 문제를 내게 보고하는 이유가 있어?”

미카이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혹시라도 알고 계셔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 버러지 같은 놈들의 일을 내가 왜 알아야 하나?”

“죄송합니다, 대공자.”

디존슨은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고는 말했다.

“그런 거 잘하라고 네 뒤를 봐주는 거다. 앞으로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놈은? 그놈은 어찌 됐어?”

“계획대로 잘되어 가고 있습니다. 요새는 대낮부터 출입하고 있습니다.”

“모자람 없이, 원하는 건 다 해 줘. 돈은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무엇보다 그거! 제대로 해 놔야 해!”

“물론입니다. 이미 중독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유심히 살펴. 어리지만 분명 보통 놈이 아닐 테니.”

“알겠습니다!”

“나가 봐!”

미카이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좌우의 서 있던 여인들에게 눈짓했다.

“대공자님!”

대기하고 있던 여인들이 우르르 달려가고, 미카이는 뒷걸음질 치며 방을 나왔다.

‘뭔가 이상한데.’

더블엑스는 작은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제일 크다고 봐야 했다.

재정적으로는 다른 조직을 압도할 만큼 돈이 풍부하여 인원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자는 많지 않고, 조직원들의 독기도 떨어지는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놈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곳이 흑사회.

그런 곳에서 소수 정예라 알려진 고스트가 가장 비대한 조직인 더블엑스를 흡수했다. 그것도 순식간에 말이다.

찝찝하고, 이상하고, 뭔가 있었다.

‘흡수해 놓고서 바로 상납을 하겠다는 것도 이상하고.’

잡초같이 억센 놈들이 흑사회다. 싸워 보지도 않고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드는 것도 이상하다.

‘어쩌면…….’

답은 하나뿐이다.

‘고스트 놈들이 배경을 가지고 싶어 했을지도.’

고스트의 배경에는 귀족이 없다. 가장 높은 줄이 아마 수도 경비대의 부대장일 것이다.

‘그것밖에 없어. 고스트 수장이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하지 않던가.’

해답을 찾은 미카이의 표정이 편해졌다.

* * *

“아버님 얼굴을 이리 뵈니 기분이 좋습니다.”

디존슨의 말에 베스타인 공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보고는 받았지만 그쪽 요새 꽤나 시끄럽다지?”

“그냥 자신들을 봐 달라고 하는 수준입니다.”

“그리 가볍게 보기만 할 일이 아니다. 저력이 있는 나라다. 게다가 국민들이 단합하는 능력만큼은 최강이고.”

“분기마다 그들의 여론을 취합하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간자들을 보내 귀족들에 대한 여론을 약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 잘하고 있다. 바쁜 너를 괜히 부른 게 아닌가 싶구나.”

디존슨이 살짝 정색하며 말했다.

“괜히라니요. 제가 아버님을 돕지 않는다면 누가 아버님을 돕겠습니까?”

“지금처럼만 행동하거라. 옛날처럼 사고는 치지 말고.”

“아버님도 참. 너무 옛날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디존슨은 그리 말하며 슬쩍 로라스를 한 번 보고 말을 이었다.

“조카도 있는 자리 아닙니까?”

“쟤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판단력은 너희보다 나을 테니까.”

공작의 대답에 디존슨은 표정이 굳었다. 그 모습을 본 로라스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왜 이러실까? 열심히 경각심을 떨구고 있는데.’

공작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던진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디존슨은 다시 한 번 로라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거기서도 로라스의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님뿐 아니라 에르페유 경이나 매지스터 헤르메스 귀애한다고 말입니다.”

“과장된 소문입니다.”

로라스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 디존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조카님이 훌륭한 건 나도 잘 알고 있지. 얼른 성장해서 이 백부를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제가 언제 성장해서 백부님을 조금이라도 도울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공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로라스를 보았다.

“하하하. 아버님도 너를 좋게 평가하시지 않느냐.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식사 시간이 끝났다.

공작은 디존슨과 로라스를 돌려보낸 뒤, 시중을 들고 있던 페컴을 보며 물었다.

“어땠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으나 페컴의 답변은 즉각 나왔다.

“대공자가 로라스를 많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자기도 귀가 있을 테니까.”

“그게…… 좀 과한 관심인 듯싶습니다.”

“다른 일이라도 있었나?”

“로라스가 깊고 어두운 밤에 출입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공작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것도 잠시.

“혈기 왕성한 나이니까. 알 때도 되었지.”

“그렇긴 합니다.”

“큰놈이 뭐라도 했나?”

“유곽의 주인을 옆에 붙여 주더군요.”

공작은 침묵했다.

‘못난 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던 것이다.

‘아비가 에듀라는 것을 알았으니 민감해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위치를 생각해야지.’

공작은 입을 열었다.

“그릇이 너무 작아. 크게 만들려고 국경에 보냈거늘. 나름 잘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조카에게 위협을 느껴? 헛키웠어.”

페컴은 괜한 말을 꺼냈나 싶었다.

철두철미한 공작도 자식들 일에는 약한 구석이 있다. 괜히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일이다. 자신이 말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들었다면, 공작은 오히려 화를 냈을 것이다.

“걱정이군.”

공작의 말에 페컴이 조심스레 말했다.

“심각한 건 아닙니다.”

페컴이 로라스가 근래 술과 여자, 도박을 하는 내용 등을 보고하자 공작의 골이 더더욱 깊게 파였다.

공작이 물었다.

“로라스가 정말 그랬단 말이지? 정신없이?”

“네. 푹 빠진 것 같습니다. 약간 견제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공작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물었다.

“견제? 누가 누굴?”

“그거야…….”

페컴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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