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93)
“미카이라 합니다.”
자신을 미카이라 소개한 이 사내는…….
‘뭐 하는 놈이지?’
느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놈이었다.
게다가 피부 톤과 억양이 약간 어눌한 게 제국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이건 대공자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가 내놓은 건 주머니. 척 봐도 묵직한 것이 상당한 금액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열심히 수련하는 것도 좋지만, 에렌은 재미있는 것도 많으니 경험해 봐도 나쁘지 않을 거라 하셨지요.”
그렇게 말하고 데리고 간 곳은.
“호호호. 공자님.”
“근사하신 분이네.”
대두와 함께 갔던 깊고 어두운 밤이라는 유곽이었다.
속으로 미소가 나왔고, 뭘 할 생각인지 궁금하여 아무 말 없이 그의 안내를 따랐다.
지분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여인들이 따라오고.
‘이건 좀 괜찮네.’
하나의 밀실에 술상이 마련되고, 연보랏빛이 비치는 술병을 따자 알싸한 주향(酒香)이 퍼졌다.
“마지막 한 방울이란 술입니다. 제가 공자님을 뵌 기념으로 한 잔 올리겠습니다.”
술병에서 나온 연보랏빛 내용물이 잔에 담기니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술에 대해 까탈스럽지는 않지만 대충 즐기기는 한다.
‘향도 그렇지만 맛도 괜찮네.’
목 끝에 조금의 걸림도 없이 넘어가면서도, 살짝 치면서 훑는 듯한 술만의 고유 특성도 보여 준다.
‘이것 봐라.’
한 잔 마신 것만으로 몸이 나른해지며 들뜨기 시작한다.
이 몸이 술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 잔 만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게 좋은 술이구나 생각할지 모른다.
‘마약이겠지.’
하지만 몸에 이질적인 뭔가 들어오는 것을 못 느낄 내가 아니다.
미카이 놈이 웃는 얼굴로 날 보는 게 느껴진다. 마주 웃어 줬다. 정말 기분 좋다는 듯이 그렇게 주는 대로 받아 마시니 슬슬 열이 오르며 얼굴이 뜨거워진다. 기다렸다는 듯이 미녀들이 양쪽에서 안겨 온다.
“풍류를 알아야 사내인 게지요. 대공자께서 공자께 즐기는 법도 알려 드리라 하셨습니다.”
환하게 웃었다.
정말 재미있지 않느냔 말이다.
술과 마약 그리고 여자.
“어떻습니까? 오늘 이리 나오셨는데 운수를 시험하는 것은.”
얼큰하게 취했다 싶을 때 슬쩍 건네 오는 대화의 내용.
‘그래, 이게 수순이지.’
살짝 비틀거리는 척하며 밖으로 나왔다.
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박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일행이 가니 바다가 갈라지듯 길이 열렸고, 도금이라도 한 듯 황금빛이 번쩍이는 테이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드 게임이다.
“간단한 게임입니다. 저 카드를 나눠 주는 사람에게 각자 카드 두 장을 받아 9에 가까운 숫자를 맞추는 사람이 이깁니다.”
놈의 설명을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카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받았고, 조금씩 흥미를 보여 주기 시작했고, 더 시간이 흘러 열 받아 돈을 모두 거는 모습까지 모조리 보여 줬다.
무슨 수를 썼을까?
아슬아슬한 광경으로 승리가 연출되기 시작했다. 가지고 온 돈의 두 배, 네 배. 그리고 마침내 열 배까지 올랐을 때 미치기 시작했다.
‘이거 뭔 재미로 하나 몰라.’
속내는 달랐지만 일단 겉모습은 확실하게 그리 보여 줬다.
‘어차피 돈이야 많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이렇게 하다간 매일 계속 잃어 줘야 할 텐데…….’
디존슨. 큰아버지라는 작자가 무슨 시나리오를 그리는지 뻔히 보이는데, 따라 주는 게 상책이지 않을까?
먹고, 마시고,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신나게 카드를 깠다.
그리고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피곤하네.’
아침 해를 보면서 나오는 도박꾼의 심리 따위는 전혀 모르겠지만. 뭐 흥분에 잠이 오지 않는 듯한 표정은 해 줘야겠지.
‘덕분에 홀가분해졌으니까.’
그래도 핏줄이라 찝찝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제 그런 기분 따위는 한 올도 남지 않았다.
‘당신의 진심 어린 선물 잘 받았습니다, 큰아버지.’
대승 어린 도박꾼들이 나올 때 그렇듯이 위풍당당하게 밖으로 나섰다.
“역시 공자님은 대단하십니다. 처음이신데 어찌 그리 운이 좋으십니까?”
“운이라니. 실력이야. 갈 때 확 가는 그 과감성. 우리 같은 것들이야 꿈도 꾸지 못하는 스킬이지.”
바람잡이들이 말라 죽고, 결국 패가망신한 머저리들이 늘 하는 익숙한 말을 들으며.
“내일 또 뭉쳐야지.”
그리 대답해 줬다.
암! 뭉쳐야지.
진심으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 * *
“일 하나 해야겠다.”
발란스 대신 대두에게 지시한 이유는 간단하다.
발란스는 존재감이 있는 인물이고, 대두는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밑바닥에서 시작해 쥐도 새도 모르게, 천에 물 스며들 듯 그리 조용히 처리해야 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미카이라는 놈이 있다. 네가 데리고 갔던 그 유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놈 같더구나.”
“미카이? 혹시 피부가 갈색 톤에 느끼한 말투를 쓰는 사내입니까?”
“아느냐?”
“알지요. 그 사람이 바로 그 유곽의 주인이니까요.”
어쩐지 카드를 섞던 놈이 신나게 장난질을 치더니 그런 이유였나 보다.
“꽤 거물이군.”
“깊고 어두운 밤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유곽이니까요, 공자님. 제 능력으로는…….”
“누가 그를 조사하라더냐.”
주인인 줄 몰랐으나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번 일은 은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아랫놈들과 친해져라. 그렇게 해서 천천히 올라가 봐.”
대두가 뚜렷하게 무슨 능력이 있는 놈은 아니지만 눈치는 빠르다. 대번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챈 듯했다.
“당분간은 내가 거기 자주 출입하고. 돈을 많이 잃을 거다. 너를 안내인 삼으면 일이 수월하겠지.”
“그러면야 식은 죽 먹기지요. 그러니까 제가 그들과 함께 공자를 벗겨 먹으란 말씀이시지요?”
저 눈치가 다른 쪽으로 발휘되었다면 분명 한자리 해 먹거나 장인까지는 올랐을 터다.
“할 수 있지?”
“공자께서 돈을 잃을수록, 제게 떨어지는 돈이 있는데 그건…….”
눈치를 보는 대두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너도 뭔가 떨어져야 열심히 하겠지. 내가 지시한 것만 명확하게 이행하면 상관없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대두에게 그리 지시하고는 발란스를 찾았다.
“이후 별일은 없나?”
“예상보다 조용합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른 조직에서도 움직이지 못했고요.”
발란스는 그리 대답하며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별거 없다. 네가 곤란해지는 것 같고, 또 하는 짓이 고약해서 찾아가서 제압했을 뿐이다.”
표정이 묘하다. 하긴 자기 딴에는 어렵게 물었는데 답이 간단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뿐이다. 그보다는 그 조직. 네 조직에서 흡수 가능하나?”
“그건…….”
“대가리의 목은 베었지만 간부로 보이는 몇 놈을 살려 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놈들을 네가 데리고 있으면 자연스레 되는 거 아닌가?”
쉬운 줄 알았는데 발란스의 표정을 보니, 생각보다는 아닌 듯했다.
“해 보겠습니다.”
“너무 어렵게는 생각하지 마.”
몇 가지 언질을 주니 발란스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조직을 흡수하는 이유가…….”
“상관없어. 이 기회에 고스트도 배경을 가지는 게 좋지 않겠어?”
“그건 그렇지만…….”
“네 전우가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면서.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해도 좋아. 하지만 떠벌리고 다니는 건 용납하지 못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 그럼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된 거지?”
“물론입니다. 조직 차원에서 지원이 가능하니까요.”
혹시 오해할까 봐 정확히 이야기해 줬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그 아이들은 조직의 예비 전력 같은 거 아니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내가 데리고 갈 거니까. 그쪽 기질이 있는 애들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밝은 세상에서 살게 해 줘야지.”
밝은 세상이라는 말에 발란스의 안면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다.
‘이런 조직에 있기에는 아까운 사람이긴 한데.’
상명하복에 익숙한 듯 지시를 내리면 군말이 없는 데다 그것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전형적인 군인의 모습이다. 그 덕분에 흑사회에서 노는 놈들치고 처음으로 호감이 가기도 했고.
‘봐서. 그의 쓰임새를 달리할 수 있겠지.’
당근 하나를 주기로 했다.
“바쁘더라도 그 수련 잊지 마. 병법서를 읽는 것도 게을리하지 말고.”
그의 눈이 커지고, 나는 계속 말했다.
“언젠가는 쓸 수 있지 않겠나?”
발란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리고 입꼬리가 꿈틀거린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잘 처리해 주길 바라. 당분간은 널 찾지 못할 테니, 내게 전할 말이 있으면 테라를 통하고.”
“네, 공자님.”
힘차게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니 미소가 나왔다.
* * *
“젠장!”
돈을 쓸어 가는 놈을 노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오늘은 운이 좋지 않으시군요.”
“사기 치는 거 아니지?”
“제가 감히 어찌…….”
“그런데 어떻게 계속 같은 숫자만 나와! 젠장! 아까 연승하고 있을 때 베팅을 올렸어야 하는데.”
짜증, 분노, 아쉬움 등 도박꾼들이 보이는 모든 감정을 표출한 뒤 도박장을 나왔다.
‘계속 보고가 올라가겠지?’
미카이 놈에게 돈도 좀 빌려야겠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빌려줄 것이다. 원하는 만큼 언제든지. 어차피 자신의 주머니로 회수될 돈이니 말이다.
‘그럼 안심하겠지.’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백부와 부딪칠 생각은 없다. 어쩌면 내 약점을 쥐었다는 생각에 락에 투자를 할지도 모르지.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락이 에렌처럼 자체적으로 힘을 갖추는 게 우선이다. 그가 방해라도 놓으면 대응하기가 쉽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성으로 돌아가니 페컴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께서 돌아오셨다.”
“어디 계세요?”
“연무장에 계신다. 그리고 손님도 함께 있다.”
“손님요?”
“가 봐라. 너도 보면 알 거다.”
페컴의 말에 급히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휘이이잉. 쿠웅.
들어서자마자 방패와 검에서 나는 파공음에 충실한 진각. 한 금발의 청년이 할아버지 앞에서 검과 방패를 휘두르고 있었다.
“로라스.”
금발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내게 손짓했다.
“로라스 인사드립니다, 할아버님.”
“불러 놓고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래도 볼일이 많았던가 보더구나.”
“네.”
대답하면서 힐끔 금발을 보았다.
아는 얼굴이다. 예전 살롱에서 에르자일과 있을 때 엮였던 그놈이다.
‘이름이 올랜드였던가?’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금발도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쯤 하면 됐다.”
할아버지의 말에 금발이 움직임을 멈췄고, 그제야 날 보고 웃으며 말했다.
“또 보는군.”
“아마란드 영감의 손자다. 듣자니 이미 만난 적이 있다고?”
“마탑 부근에서요.”
굳이 살롱에서 일어났던 그 소동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안면은 있는데 뭐라 불러야 할까요?”
내가 뭐라 하기 전에 할아버지가 먼저 입을 여셨다.
“그냥 편히 이름을 부르거라. 그리고 씻고 오너라. 이야기는 밥 먹으면서 하자꾸나.”
“네, 공작님.”
금발이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날 보며 물었다.
“어떠냐? 제법이지?”
“네. 제법입니다.”
“그 영감탱이가 저놈 자랑을 엄청 하더구나. 다다음 대에 제국 제일 가문은 자신의 가문이 될 거라면서.”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바라는 대답을 해 줬다.
“산을 보기만 한 자는, 산을 오르기 전까지 얼마나 높은지 모르는 법이지요.”
“껄껄껄.”
소리 내어 웃으신다.
제대로 대답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