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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92화 (92/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92)

‘으음.’

테라를 센터에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은 채로 로라스는 생각에 잠겼다.

더블엑스라는 조직의 뒤를 봐주는 귀족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했다. 하지만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은 솔직히 굉장히 껄끄러웠다.

‘굳이 흑사회까지 손을 댈 필요가 있었나?’

물론 그게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자신처럼 통째로 먹으려는 귀족들은 없어도, 그냥 슬그머니 한 발 걸치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귀족 입장에서도 꽤나 짭짤한 수익이 나는데 그걸 안 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그것도 웬만한 귀족 입장이지, 어떠한 귀족에게는 그야말로 푼돈이다.

그만큼 로한슨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로라스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돈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

사교 파티에서 독성이 약한 마약이 서로 교환되는 사실을 말이다.

‘마약이라. 그런 걸 만들 정도면 독약도 가능할 테고.’

귀족들 사이의 다툼에서 독약이 사용되는 건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다.

‘계속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보지는 못했는데…….’

한 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로라스도 잘 아는 그 귀족.

디존슨 린 베스타인.

할아버지의 장자다.

그리 고민하던 사이 마차는 어느새 성에 도착했다.

“로라스! 큰공자께서 널 언제 볼 수 있느냐고 하시던데. 시간이 되느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페컴이 디존슨의 말을 전했다.

‘꼭 만나 보라는 흐름인 게지.’

로라스는 그리 생각하며 대답했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페컴 님.”

“그럼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으로 준비해 두겠다.”

“네. 감사합니다.”

로라스는 방으로 들어와 씻고는 옷을 갈아입으며 생각했다.

‘어떤 자일까, 디존슨은?’

“케인.”

로라스는 자신에게 옷을 입혀 주는 어린 하인을 불렀다.

“네, 공자님.”

“디존슨 대공자 알지?”

“물론입죠. 제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독립하시긴 했지만요.”

“어떤 분이지?”

로라스의 물음에 케인은 별로 고민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지체 높은 귀족이십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그게…….”

로라스가 뭔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하는 말에 케인은 잠시 당황하다 말했다.

“저, 공자님.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분을 보면 정말 귀족이라는 생각밖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평가는?”

“대공자께서는 저희 같은 것들하고 교류하지 않으시지요. 시종, 시녀 들과는 대화를 하시지만…….”

“그래도 소문이 전혀 없지는 않을 거 아냐?”

“그냥 해야 할 일만 하면 모시는 데는 문제가 없다 들었습니다.”

케인은 별로 할 말이 없었지만 사실 충분한 정보를 전해 줬다.

‘선을 지키지만 오만하다는 뜻이군.’

이 성에서 시종, 시녀 들과만 대화를 한다는 건, 평민과는 상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종과 하인. 시녀와 하녀는 그 신분이 다르다.

시종과 시녀는 정식 작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나 귀족의 핏줄 또는 그 안사람이 담당한다.

어렸을 때부터 유력한 대귀족가의 자제들과 어울리라고 하는 것도 있지만, 귀족의 문화라는 게 평민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뭔가 하나를 하려고 해도 귀족의 문화를 아는 이가 필요한 것이다.

백작 위를 가졌으면서도 집사라 불리면서 에렌성을 관리하는 페컴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단하다.

하인인 케인은 감히라는 형용사를 써 가면서 자신들과는 교류가 없고, 시종과 시녀와만 대화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건 귀족에 대한 프라이드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그럼 일반적인 귀족처럼 오만할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이다. 하지만 또 선만 지키면 모시는 데 불편함이 없다 하니 선을 지킨다는 뜻일 테고.

‘망나니는 아니라는 뜻이군.’

락에 있을 때는 귀족과 평민이 뭔 차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격의 없이 지냈지만, 에렌은 매우 다르다.

신분의 격차가 크고, 그것을 굉장히 따지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도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이해할 수 없는 귀족, 또는 그 핏줄들이 많았다.

‘저 세계나 이 세계나.’

무림에서도 고관대작 또는 한 지역 패자들의 거들먹거림을 생각하면 크게 이상할 게 없긴 했다.

옷을 챙겨 입고 시간에 맞춰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앉아라.”

페컴의 건너편에 앉자 그가 말을 건넸다.

“요새 많이 바쁜가 보더구나. 외박도 종종 한다던데.”

묻는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린다.

“그냥 이것저것 하고 있습니다. 센터와 마탑에도 숙소는 있고요.”

“흐흐흐. 그러냐?”

페컴이 뭔 상상을 하는 건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흘렸다.

말해 뭐하랴?

어차피 흑사회 일에 개입했다는 말을 할 처지도 안 되니, 오히려 저런 오해가 득이지 싶다.

페컴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느라 시간이 흘렀는데, 대공자가 오지 않는다.

‘어째 이런 예상은 벗어나지 않는 거지?’

그가 늦을 거라 예상은 했다. 권위 의식이 높은 이들은 으레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니까.

미리 기다리기라도 했으면 오히려 놀랐을 것이다. 일단 난 그의 조카이니 말이다.

‘더 이상 늦으면 이건 권위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가볍고 멍청한 건데.’

멍멍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대공자가 나타난 건 슬쩍 식당의 입구를 볼 때였다.

“허허허. 이거 조금 늦었네.”

웃으면서 페컴에게 먼저 시선을 던지는 대공자.

“아닙니다. 에렌에서의 업무가 너무 많으신 거지요.”

“오랜만에 오니 손 벌리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버님은 매일 그런 자들을 상대하는 건가?”

디존슨은 거들먹거렸다. 마치 자신이 에렌의 주인인 양 말이다.

크게 틀리지는 않다. 그가 동부 국경에서 돌아온 이유는 할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니까.

에렌의 공식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피곤한 일.

‘하지만 느끼고 맛봤겠지.’

에렌의 주인이라는 권력의 최정점을 말이다.

“네가 로라스로구나.”

“로라스. 대공자님께 인사드립니다.”

“하하하. 대공자는 무슨. 우린 혈육인데. 그냥 백부라 부르면 되지.”

뭐라 대답할까?

본신의 능력이 어떻든 공식적으로는 에렌의 2인자.

“평상시라면 그리하겠지만 지금 대공자께서는 공작님을 대신하고 계시니 그리 부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소문보다 고지식하구나. 화끈하고 거침없는 성격이라 들었는데.”

그는 크게 기꺼워하며 말했다.

예상이 맞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대리라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인들이 식탁 위로 요리들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특별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백부가 조카에게 으레 물어볼 수 있는 것들을 물었고, 조카는 백부에게 공경심을 보이며 답하는 수준이다.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를 살폈다.

‘백부란 말이지.’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좋은 백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권위 아래에 있는, 그리고 그것을 침범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박하지 않았다.

“에렌의 물가가 네가 있던…… 어디였더라. 락이라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그곳과는 물가가 엄청 차이 날 텐데. 남자가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될 것도 안 된다. 돈은 좀 가지고 있느냐?”

“페컴 님이 챙겨 주셨습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지. 내 사람을 시켜 용돈 좀 주마.”

“감사합니다, 백부.”

인사하는 나를 보며 그의 눈이 휘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 왔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너를 아끼신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손자 용돈도 안 주셨어?”

제법 훌륭한 타이밍이다.

‘방심을 유도하고, 당연히 할 수 있는 물음을 던져 왔단 말이지?’

정말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는 좋은 사람일 것이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만으로 밥값 하라 하셨습니다. 으음. 눈치가 조금 보이네요.”

“하하하핫! 아버지가 늘 하시는 말씀이지. 밥값. 너에게까지 그 말씀을 하셨다니, 조금 심하신걸.”

“백부님께서 말씀 좀 해 주세요. 손자 용돈이나 듬뿍 주시라고요.”

철딱서니 없는 귀족 자제 연기는 닭살 돋는다. 이 정도 대답이 적당할 것 같다.

“그래, 에듀는 잘 있고?”

“잘 계십니다.”

“네 부친은 대체 언제까지 거기에 있을 생각이라더냐. 국격엔 그 같은 인재가 많이 필요한데.”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북부를 개척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공자님.”

페컴이 옆에서 대신 대답하자 디존슨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거기가 어디 개척할 수 있는 곳인가. 하늘 산맥과 메타린 평야도 모자라 무법자들의 지역까지.”

“그래도 잘 버텨 오고 있으니까요.”

디존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날 보며 말했다.

“네 부친에게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해라. 쓸 만한 아우가 그런 변방에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지.”

그는 제법 연기도 잘한다.

아버지가 에렌에 올라오면 전전긍긍할 사람 중 하나일 텐데 말이다.

이윽고 식사가 끝났다.

“로라스.”

“네.”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도록 해라.”

“물론입니다.”

디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나갔다.

“어떠냐, 대공자는?”

“어쩔 게 있습니까? 제 백부인데요.”

“나쁜 사람은 아니다. 가장 유력한 가주 후보자이기도 하고.”

“다른 백부님들은 어떻습니까?”

“저마다 색이 다르다. 둘째 공자께서는 신중하시고 모든 일들을 조용히 처리하시는 분이지.”

이건 음흉하다는 뜻일 테고.

“셋째 공자님은 떠들썩하시다.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사람 사귀는 것을 즐기신다.”

저건 야망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셋째 백부님은 할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시지요?”

“주군의 아우님이셨던 토아르 백작님의 아들이시지. 그분이 일찍 떠난 후 주군께서 거두셔서 두 분 공자님들과 함께 키우셨다.”

눈치 좀 봤을 텐데 말이다.

세 사람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페컴은 입이 무겁다.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할 터.

‘이 정도 힌트를 준 것만 해도 나를 생각한 거겠지.’

오늘 저녁은 나름 의미 있다고 해도 된다.

* * *

디존슨은 자신의 방 앞에 기다리고 있던 여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거기서 뭐 하는 것이냐?”

풍성한 갈색 머릿결과 매끈해 보이는 하얀 피부.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미인상의 여인이 반문했다.

“어떠셨어요?”

“어떻기는, 그냥 조카 얼굴 한번 봤을 뿐인데.”

“조카라……. 그렇게 표현하시는 걸 보니 정말 궁금은 하셨나 보네요.”

“뭔 소리냐?”

“먼 방계까지 조카라면 수백은 될 텐데요. 작은아버지들의 자식들을 제외하고 아버님이 아는 이름이 있어요?”

디존슨은 인상을 찌푸렸다.

‘조카는 무슨…….’

실제로 방계의 핏줄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로라스는 달랐다.

자신이 비록 동부 국경에 나가 있지만, 성에는 자신의 눈과 귀가 많았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이름을 거론했다.

로라스 베스타인.

아버지가 아끼던 컬렉션인 커터를 내줄 정도로 총애한다는 아이.

물론 그때까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도 사람이고, 초인도 나이가 들면 약해진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늙은 조부가 어린 손자를 귀애하는 것쯤은 늘 있었던 일 아닌가.

그 애정을 자신의 아들이 아닌 다른 이가 받은 게 좀 아쉬울 뿐이었다.

로라스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하나뿐이다.

에듀 베스타인.

직계도 아닌 방계임에도 그 재능에 아버지가 양자로까지 거두려 했던 그놈.

로라스는 바로 그놈의 아들이었다.

직접 본 그 아이는…… 총기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러니 에르페유와 헤르메스가 동시에 제자로 거둬들였을 테고.’

찝찝했다.

‘아직은 뭘 모르는 건 분명하지만…….’

식사 시간에 슬쩍 떠봤으나 그 나이 또래가 할 만한 말을 했을 뿐이다. 보니 자신과 에듀의 관계도 모르는 것 같다.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공작이 노발대발하며 그 일을 언급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선언했으니까.

“아버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돌아가서 선볼 준비나 잘해. 나티앙 후작은 꽤 쓸 만한 사람이니까.”

디존슨은 그리 말하며 딸을 방문 앞에 둔 채로 그냥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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