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91)
“무슨 생각인 거야!”
고스트의 수장 요르크의 외침에 주변의 사내들은 깜짝 놀랐다.
다른 조직이야 일인자와 이인자 간의 알력이 존재한다지만, 고스트에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인자인 요르크가 이인자 발란스의 의견을 늘 존중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발란스가 요르크의 말에 이견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그런 요르크가 발란스에게 화를 내듯이, 그것도 자신들이 있는 데서 그러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있다.”
발란스의 무뚝뚝한 대답에 요르크는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사정이라는 것 좀 같이 알자고. 네가 이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면 언제든지 줄 수 있다는 거 알지?”
“…….”
“목숨 걸고 함께해 온 너와 나 사이에 숨겨야 하는 비밀이 뭐냐고.”
요르크가 재촉했지만 발란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말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자신의 자리를 내놓으라 하면 내준다는 요르크의 말은 거짓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뭐든 내주는 전우이니까.
하지만 타인에게는 아니다.
고스트가 고스트일 수 있는 이유는 애초에 요르크의 자신의 것에 대한 애착으로 시작됐다.
자신의 것을 건드리면 목숨 걸고 덤빈다는 것.
수많은 조직과 그리 싸워서 이겨 왔고 세를 불렸다.
‘로라스 공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무슨 개소리냐고 할 게 분명할 터.’
그리고 덤빌 것이다.
자신이 말려도 듣지 않을 것이다. 요르크에게 로라스는 자신의 것을 침해하는 적에 불과하니까.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생각한 게 일단 입을 다무는 것이다.
자신이 본 로라스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그의 배경은 알 수 없지만, 가지고 있는 무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 무공을 배제해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로라스라는 자의 기질은 분명 절대 권력자의 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단순히 본능만 믿고 섣불리 판단하는 거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란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그런 기질의 사람을 직접 본 일이 있었다.
제국의 검이자 초월자 베스타인 공작.
먼발치에서 봤을 뿐이지만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에 충격을 받았었다.
로라스가 딱 그랬다. 아직은 손색이 있다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년 후며 그리될 것이다.
우선은 그때까지 시간을 끌기로 했다.
자연스레 그 존재감이 드러날 때, 요르크가 알아도 감히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할 때. 그때 밝힐 생각이었다.
“발란스!”
“고스트에 욕심 낸 적 없다. 어차피 이 조직을 키운 건 너지. 나야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고.”
“야! 그런 말이 어딨어!”
“사실이야. 하지만 나도 애정은 가지고 있어. 그러니 그냥 따라 줘.”
발란스의 대답에 요르크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뭐든 네 말대로 해 줄 테니까 이유나 알자고. 애들 왜 그리 모은 건데? 그 탓에 더블엑스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단 말이야.”
“……불쌍해서.”
“뭐?”
“옛날 생각이 나서. 거둬서 밥 좀 먹이는 게 그리 어려운 건 아니잖아.”
“고아원이라도 차릴 생각인 거야?”
요르크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란 뜻으로 물은 것이나, 발란스 입장에서는 오히려 답을 찾아 준 것과 같았다.
“그래. 그거 할 거다.”
“뭐?”
“고아원. 오랜 꿈이었다.”
“야!”
“꿈이었다고.”
발란스의 짧은 대답에 요르크는 속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가 이인자로 존재하지만 그와 자신의 사이는 주종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목숨을 맡겼던 전우. 그건 이 흑사회에 투신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도 서로에게 충실한 관계 아니던가?
차라리 발란스가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의심이라도 했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사실 그가 조금만 욕심을 부렸어도 현재 위치가 열 번은 바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늘 한결같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고아원 타령을 한다.
“정말이지?”
요르크가 확인하듯이 묻는 말에 발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꿈. 맞아!”
“씨벌!”
요르크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전우가 고아원 차리는 게 꿈이었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애들 불러 모아서 전해. 타 지역. 특히 더블엑스 영역 쪽으로는 넘어가지 말고, 아니, 오줌도 그쪽으로 갈기지 말라고 해.”
요르크는 간부들을 불러 모아 그리 지시했다.
“먼저 시비를 걸면 어떻게 합니까?”
한 간부가 묻는 말에 요르크가 대답했다.
“몰라서 물어! 그러면 전쟁이지. 하지만 절대 먼저 시비 걸지는 말라고 해. 독기가 바짝 오른 모양이니.”
“네, 보스.”
그때 한 사내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발란스를 향해 소리쳤다.
“대장, 애들 십여 명이 납치당했습니다.”
묵묵히 요르크의 말을 듣고 있던 발란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한 건 그때였다.
* * *
고스트와 더블엑스 간의 전쟁.
처음에는 그저 서로의 구역 내에 몰려가 위압을 가하거나 작은 주먹다짐을 벌이는 데 불과했다.
하지만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흑사회에서 조직 간의 전쟁은 작은 싸움으로 시작하더라도 어떤 계기가 있는 순간 총력전으로 바뀐다.
게다가 전쟁 당사자 중 하나가, 일단 전쟁이 나면 상대가 죽든 전멸을 당하든 끝장을 내는 고스트였다.
작은 조직들은 두 거대 조직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않고 지냈다. 그건 큰 조직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유는 달랐다.
작은 조직들은 전쟁에 휘말려 조직이 사라질 것을 걱정했지만, 거대 조직은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했기에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흘.
작은 다툼이 본격적으로 전쟁으로 확산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나흘이었다.
경비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작은 무기만을 휴대하던 조직원들이 보기에도 흉흉한 대도, 도끼 따위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 탓에 경비대의 순찰이 대폭 강화됐다.
그건 낮의 이야기.
밤은 달랐다.
낮에는 생색내듯이 순찰을 돌며 각 상점으로부터 보호비를 뜯어내던 경비대원들이 밤이면 눈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정작 보호는 밤에 필요한데 말이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두 조직 모두 오대조직으로 꼽힐 정도의 거대 세력.
거리에 피가 흐르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얼마만큼의 피가 흐를지가 관건일 뿐.
모두가 빨리 끝내기를 바랐지만 전쟁은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어쩌면 한 달 이상 갈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했었다.
사람들은 분명 그리 생각했다.
* * *
“그랬단 말이지.”
발란스의 보고에 로라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흑사회 조직끼리 충돌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이들 때문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어쩔 생각이야?”
“싸워야죠.”
로라스의 말투만큼이나 무덤덤한 발란스의 말투.
“괜찮겠어? 네 입장이 곤란하지 않아?”
발란스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제 책임하에 있는 거니까요. 다른 문제는 이 일을 해결한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습니다.”
로라스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군인 출신이라 그런 걸까? 의무와 책임. 그런 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네.’
마음에 들었다.
발란스의 생각이 저렇다면, 그 의무와 책임에 걸맞은 권한과 권리만 준다면 앞으로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을 테니까.
‘굳이 테라를 쓰지 않아도 될 테고. 어찌 됐든 사람이야 상황에 맞춰 가며 쓰면 되니까.’
지금 고민할 건 어찌 처리하느냐다.
로라스는 고민했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단순하게 가자.’
상대는 흑사회다.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움직이면 그뿐이다.
단순하게.
로라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발란스가 급히 물었다.
“어쩔 생각이십니까?”
“어쩔 것도 없어. 그냥 알면 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마 저에게 했던…….”
발란스가 말끝을 흐렸고, 로라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좀 특별 취급한 거지. 원래 내 모습은 그게 아니지.”
발란스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 * *
“이놈!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느냐?”
더블엑스의 수장 로한슨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웬 간 큰 애송이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가끔 그런 놈이 있다.
조직에서 위로 올라갈 목적으로, 또는 제 실력을 과신해서 홀로 간부들을 암살하기 위해 움직이는 그런 새파란 애송이가.
그런 놈들은 열이면 열 다 뒈진다.
꼬맹이들 중에서는 실력이 뛰어날지 모르지만, 10년 이상 이 바닥에서 칼밥 먹는 자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전쟁 중이다. 평상시에도 수하들을 데리고 다니는데 전쟁 중에 홀로 다닌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물론 그중 열의 하나 정도는 습격에 성공도 한다. 그래도 뒈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오늘 그런 미친 애송이 중에서도 상미친놈이 나타났다.
그냥 간부를 습격한 게 아니라 본거지에 홀로 들이닥친 것이다.
아! 혼자는 아니었다.
애송이보다 더 어린, 그야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를 하나 달고 왔다.
―방심은 하지 마. 고수도 종종 눈먼 칼에 죽을 수도 있으니까.
애송이가 더 애송이에게 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뭔 개소린가 싶었다.
―이런 놈들을 상대로 실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지만, 그래도 다수에 대한 압박은 존재하는 법이니까. 크게 다치지 않는 선에서 그걸 충분히 느껴 봐라.
참으로 참신한 개소리에 웃음까지 나왔었다.
더 애송이가 수하 몇을 박살 낼 때만 해도 그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뭐, 싸움에 도가 튼 놈들이 가끔 저리 이길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3구역 행동대장인 톰의 어금니 두 개가 날아갔을 때부터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톰은 건들건들 제대로 상대하지 않는 감이 있었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어금니 두 개가 날아갈 정도의 정타를 허용한 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일대일의 낭만 따위는 없었다.
우르르 몰려갔고, 더 애송이를 압박했다.
다른 애송이가 나선 건 그때였다.
경악의 순간이었다.
애송이의 싸움 방식은…….
그래, 다수를 상대하면서도 그 검고 긴 머리카락이 전혀 휘날리지 않았다라고 설명하면 금방 이해가 될까?
정적인 움직임.
수하의 움직임에 맞춰 좌우로, 그 전후로 나아갔을 뿐인데 놈의 한 초식을 버티는 놈이 없었다.
―다수일 때는 좀 더 강하게. 한 방에 하나씩 보내는 게 제일 깔끔하지.
둘러싸인 와중에도 마치 스승이 제자 가르치듯이 평온한 표정으로 입까지 여는 애송이.
그런 애송이에게 간부라고 불리는 모든 수하가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로한슨은 자신이 왜 바닥에 이리 누웠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가슴을 누르는 애송이의 발의 압력에 죽는다는 기분만 느꼈을 뿐.
“날 건드리면 넌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발의 압력이 풀렸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누군데? 네 배경이?”
애송이가 직설적으로 그걸 물어보니 또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보는 눈이 많았다.
“으으윽!”
애송이는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가슴에 거대한 압력이 몰려오고,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놈, 반드시…….”
로한슨은 반항해 보았지만 굴복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