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89)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좌절하는 것일까? 아니면 분노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내가 누군지만 궁금해하고 있는 걸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놈이 알았느냐, 몰랐느냐다.
“어찌한 거였지?”
“전장에서 쓰는 창을 그대로 쓰더군. 창의 기세를 보니 일반병은 아닐 텐데. 그런데도 선봉에 선 기세였어.”
“…….”
“또한 묻는 방향은 맞지만 그것 역시 물을 필요가 없다. 말해도 못 알아들을 테니.”
“…….”
“조직의 이인자라고 하더군. 의외야. 수준이 높은 건가? 아니면 네가 야망이 없는 거냐? 그것도 아니면 네 위에 있는 놈이 너보다 강하냐?”
“그건…….”
“뭘 어찌하려는 건 아니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원하는 게 뭐지?”
“전부.”
놈은 아무 말 하지 못했고.
‘시작이 아주 좋아.’
난 즐거워졌다.
* * *
대두는 자신의 거처에 나타난 사람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저 미친놈이 한 말이 정말이었구나. 정말이었어.’
미친 애송이가 자신을 줘 팼을 때만 해도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자신은 일개 왈패일 뿐이고, 상대는 제대로 무공을 수련한 귀족가의 자제이니까.
물론 억울하고 화도 났다.
이 복마전 같은 흑사회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자신이 저런 애송이에게 반죽음을 당했으니까.
―여길 먹어 보려고.
그 미친 애송이가 그런 미친 말을 지껄였을 때, 대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애송이가 자신에게 한 것처럼 거기서도 분탕질을 쳐 볼 생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건방진 놈, 너도 당해 봐라.’라는 심보로 애송이가 부탁, 아니 명령한 것들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 성실히 임한 것은 말이다.
죽을 거라 생각했다.
발란스는 에렌의 오대조직 중 하나의 2인자이지만, 가진 무력만으로는 첫째를 다투는 고수였다.
자신의 복수는 발란스가 해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펼쳐진 광경은 그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애송이 뒤로 나타낸 사내.
오만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경멸 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발란스였다.
대두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정말 발란스를 이긴 거야?’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두의 정신이 혼미해지려 할 때, 로라스가 그런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이다. 내게 네 정보를 알려 준 놈이.”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기에 대두는 몸을 움츠려야 했다.
“제가 이쪽만 책임지면 되는 겁니까?”
그사이 발란스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의 물음에 로라스가 대답했다.
“에이! 요 정도 책임지게 하려고 칼 맞아 준 건 아니지. 몸값에 자부심을 가져. 당신은 그래도 돼.”
“…….”
“책임질 수 있지?”
로라스의 물음에 발란스는 반문했다.
“어느 정도 규모까지 늘립니까?”
“한계라고 생각할 때까지.”
발란스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공자의 생각 이상으로 고아는 많습니다. 모두 거둔다면 한계는 금방 찾아옵니다.”
“크게 키울 생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무슨 계획이든 하다 보면 엄청 커져 있단 말이지. 그래도 기왕 하는 거면 최선을 다해야지.”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로라스와 발란스의 대화를 들으며 대두는 뭔가 싶었다.
‘발란스를 이긴 건 알겠는데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하고 있잖아. 그를 완벽하게 굴복시킨 건가?’
이야기 속에는 흑사회에서 서로 힘을 겨루고, 지면 그 사람 밑에 들어가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많으나 실제는 아니다.
경쟁 파벌의 강자를 이길 힘이 있으면, 이기고 바로 죽인다.
뭘 믿고 자신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실력자를 살려 둔 단 말인가?
한데 지금 두 사람을 보니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대두가 숨을 죽이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로라스가 그를 불렀다.
“대두.”
“네, 공자.”
“너도 할 일이 있다.”
“네. 말씀만 하십시오.”
“애들을 모아라.”
“애들이라 하시면?”
“너 같은 놈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애들 말이다. 알아들었으면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네! 공자.”
뭔가 서늘한 느낌에 대두가 긴장하고 있을 때, 로라스가 다시 말했다.
“그나마 네가 인간성이란 게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는 걸 감안하여 널 죽이지 않은 거야. 큰 행운이라 생각하고, 시키는 것만 확실히 해내.”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대두는 절대 잊지 않기로 했다.
* * *
에렌의 뒷골목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이 거리는 하층민들이 지붕 있는 곳에서 자기 위해 모이는 장소다.
그 어떠한 유흥, 편의 시설도 없는 곳이라 흑사회에서조차 관심을 주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대두같이 아이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쓰레기들도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으아악!”
“대체 고스트에서 우릴 왜!”
곳곳에서 비명이 울리고, 억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을 만들어 낸 건 발란스와 몇몇 사내들이었다.
“씨발! 이대로는 못 죽어!”
“같이 죽어! 개새끼들아!”
몇 명 쓰레기가 반항을 했지만, 사실 반항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발란스가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수하 하나만 나서도 그런 놈들은 안면이 박살 나고, 신체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 나갔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딱 하루.
고스트에서 이 거리를 장악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 한곳에 모여 지낸다.”
고스트가 거리를 장악하자, 그 거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마법사들이 인체 실험을 위해 노예를 산다던데.”
“우리를 팔려고?”
흉흉한 소문이 퍼지는 것도 빨랐다. 게다가 실제로 그들은 쓰레기들 밑에 있던 아이들을 전부 모아 어디론가 데려간 것이다.
거리는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반면 그들과 함께 간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었다.
“흰 빵이다!”
“우유…… 저 귀한 것도 있어.”
백에 가까운 아이들. 그들은 눈앞에 놓인 먹을 걸 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양껏 먹어라.”
몇몇 사내들이 하는 말에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 양손에 빵을 쥐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첫날이라 아흔 명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보름 내로 이백은 더 모을 수 있습니다.”
대두의 말에 발란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너무 많다.’
흰 빵과 우유는 비싸다. 하루 세끼는 아니더라도 두 끼만 저리 먹여도 들어가는 돈이 엄청나다.
―잘 먹여. 그게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효율적이야.
돈 한 푼 내놓지 않으면서도 요구는 많았다.
돈 쓸 곳이 없어 꽤 모아 뒀지만 삼백에 가까운 아이들을 먹이면 금세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얼마 안 가 조직의 돈이 필요할 것이다.
‘알려지면 요르크가 난리 칠 텐데.’
자신의 전우이자 고스트의 책임자인 요르크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요르크는 자신과 다르다.
수하들에게는 괜찮은 리더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반드시 로라스와 대항하려 할 것이고.
‘부딪치면 죽는다.’
결과는 뻔하다.
확실하다.
기습이든 뭐든 그와 자신들의 격차는 하늘과 땅, 그 이상이다.
“딱 이백이다. 그 이상은 무리다.”
“이백 명요? 하지만 공자께서는…….”
“이백이 한계다. 공자께는 내가 말씀드리도록 하지.”
“네, 발란스 님.”
대두의 대답에 발란스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로라스가 뭐라 하기 전에 요르크를 어찌 설득할 것인가!
* * *
차아아앙!
긴 검음과 함께 기합성이 울렸다.
“하아아아아아!”
얼굴이 붉어진 채 앞으로, 계속 앞으로 밀어내려는 테라.
보통 검과 검이 힘겨루기 할 때는 힘의 균형에 미동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이 깨졌을 때 어느 한쪽의 검이 앞으로 밀고 나갈 것이다.
이번에는 그런 미동이 조금도 없었다.
마치 태산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테라는 머리카락 한 올의 틈만큼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고, 반대로 태산 역시 앞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했다. 아니.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구나.”
태산이 되어 버린 로라스가 미소를 띠며 하는 말에 테라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알면서도 괜히 울컥하여.”
“무인에게 평정심이란 게 이래서 중한 법이다. 알면서 그리하는 거.”
“…….”
“마치 도박꾼들의 심리와도 같은 법이지. 해서 안 된다, 안 된다 그리 다짐을 하는데 어느새 도박장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심리라고 할까?”
로라스의 비유에 테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한 번에 알아듣겠어요.”
“이 비유를 알아들으면 곤란한데. 너 도박하냐?”
“이따금 센터의 수련생들에게 에르페유 경이 용돈을 주십니다. 그걸로……. 물론 그냥 동전 몇 개 걸어 보는 것뿐이지요.”
“다 그리 시작하는 거니까 아예 손도 안 대는 게 좋아. 여하간, 아니 이야기해 주기가 쉽겠구나. 무인들의 심리가 도박하는 이들의 심리와 비슷한 면이 있어 늘 경계해야 한다.”
테라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들었고, 로라스는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원초적 폭력의 쾌감. 상대를 제압할 때의 우월감. 그런 것들이 무인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방금도 마찬가지다. 힘의 격차를 깨달았으면서도 계속 밀어 댔지.”
“분명 그랬습니다. 괜한 오기……였습니다.”
“그 오기가 너의 목숨을 해친다. 그러고도 의아함이 남지. 알면서 왜 그랬을까?”
“그건…….”
“그건 상대의 검을 넘기는 순간 승리, 적을 굴복시켰을 때의 쾌감을 네 몸이 알고 있어서다. 순간 이성을 마비시키는 거다.”
“아…… 주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말했지 않느냐. 몸이 기억한다고. 사람은 간사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기억한다. 도박꾼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이긴 기억만 있거든. 돈을 다 잃었을 때의 절망감 따위는 뒤덮고도 남을!”
테라는 순간 자신이 그랬나 고민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데…… 정말 그런 건가?’
의문.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과 확인.
테라는 말이 없어졌고, 로라스도 그런 그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인지 아는 탓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답을 찾아라.’
자신의 말은 그저 미리 답을 알려 주어 그것을 맞춰 보는 과정이다.
보통 잘 써먹는 가르침의 방식은 아니다.
자칫하면 생각만 할 뿐 몸으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라스는 테라를 믿었다.
‘주는 것은 단 하나도 흘림 없이 받아먹는 아이니.’
테라는 생각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는 아이다. 아니, 오히려 생각보다 더 많이 행동한다.
에르페유는 무식할 정도로 기본 훈련을 반복시키는 스승이었고, 거기에는 로라스도 약간의 이견은 있지만 대부분 동조하는 방식이다.
테라에게 이 정도의 선행 방식은 도움이 될 거라 믿었다.
‘잘 자라 줬어.’
로라스는 고민하고 있는 테라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꼬맹이 주제에 주군 주군 하며 달라붙던 게 꼭 어제 일만 같다.
‘녀석들 중에 테라의 반만 닮은 애들이 몇만 있어도 이번 투자는 실패하는 게 아닐 터.’
대두에게 고아들을 모으라 하고, 발란스에게 뒤를 부탁한 이유.
충성심이 강한 무력 집단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들을 이용해 흑사회를 완전히 장악할 생각이었다.
물론 동정심, 연민 그런 게 전혀 없다면 거짓이다.
‘그렇다고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기만할 생각도 없다.’
결국 자신의 목표 때문에 이용하겠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이게 그래도 제일 나은 방법이라고는 생각했다.
‘자리를 잡은 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을 가질 수는 있을 테니!’
그 계획에 테라는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테라 역시 고아다. 아니, 락의 주민들 모두를 부모로 알고 자란 아이다.
로라스의 지론은 강해질수록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는 일단 테라를 무조건 강해지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