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88)
공터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의 머릿속에 청년이 다른 조직에서 온 암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암살자의 방식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미련하지만 말이다.
사내들은 슬그머니 무기에 손을 갖다 올렸다.
제법 강한 놈으로 보이지만 그래 봤자 애송이다. 게다가 혼자다.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 올린 순간.
“물러나라.”
발란스의 목소리가 울렸고, 사내들은 깜짝 놀랐다.
“대장.”
“내려가라. 그리고 방비를 단단히 해라.”
“대장!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명령이다! 내려가래도!”
발란스의 노성에 사내들은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공터에는 발란스와 청년만이 남았다.
발란스도 사내들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청년이 자신을 죽이러 온 암살자라고.
“어느 조직이냐?”
그래서 말투도 바꾸고 살기도 끌어올렸다. 하지만 청년의 대답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그런 거 없어. 너무 비장한데? 그럴 필요 없어. 너를 죽일 생각은 없으니.”
“지금 무슨!”
발란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급히 허리를 뒤로 젖혔다. 워낙 급작스럽게 움직인 터라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무슨 짓이냐?”
발란스는 오싹해졌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복부에 손을 갖다 대며, 시선은 청년의 손을 향했다.
‘뭐였지?’
청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느껴진 그 강렬한 기세는 분명 사실이었다. 허리를 뒤로 젖히지 않았다면 복부에 구멍이 났을 듯한 그 찌릿함.
“봤으면서도 너무 무방비하길래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
“이런 데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
“제대했다더니 포스가 그리 정돈한 걸 보면 수련을 게을리하지도 않은 것 같고.”
역시 자신을 알고 온 놈이다.
발란스는 전의를 불태웠다.
어리지만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그런데 이유가 뭘까, 도저히 싸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손 놓고 있으면 그냥 죽으리라는 걸 알지만 전의는 폭풍우 앞의 촛불처럼 불꽃이 일어나다 사그라든다.
“보는 눈도 있고 정말 제법이야. 안심해도 좋아. 죽이지 않을 거라는 말은 사실이니까.”
“…….”
“하지만 제대로 대항하지 않으면 죽고 싶어질 정도로 아플걸.”
발란스는 양손으로 창을 굳게 잡고 창끝을 청년에게 겨눴다.
왜 전의가 일어나지 않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싸우고자, 대항하고자 하는 순간 자신의 주변에 흐르는 포스가 느껴졌다.
자신이 내뿜는 기운 따위는 단숨에 집어삼킬 듯한 막대한 포스.
발란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전장에서 구른 지가 몇 년이고, 또 흑사회에 들어와서 싸운 횟수가 얼마던가.
병신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죽지는 않으리라!
‘가끔 있잖아! 혈통의 재능을 물려받아 가문의 지원하에 미친 듯이 성장하는 애송이.’
이놈도 그런 놈일 것이다.
무공을 익히고 스스로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 생각하는 놈들.
그들 중, 자신들 같은 흑사회를 토벌해 명성을 날리려는 애송이가 드물지만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좋다! 실전의 무서움을 가르쳐 준다!’
난전을 유도하고, 사람의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술 때 느껴지는 그 괴이한 감각에 휘말렸을 때 자신은 놈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하아아앗!”
발란스의 창에는 그런 각오가 담겨 있었고, 그리되리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놈이 더 강할지는 몰라도 바닥에 서 있는 건 자신이 되리라는 확신!
“그래! 일단 그렇게 덤벼들어야지!”
청년이 단창을 내밀며 소리쳤고.
타아아아앙!
두 개의 창날과 창신에서 강렬한 불꽃이 튀었다.
‘어찌 된 놈이……. 이놈, 사람 죽여 봤다. 분명히!’
발란스는 자신의 각오와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망설임 없는 움직임.
그냥 정해진 창술이 아니라, 실전에서 일어나야 하는 무궁무진한 변화들이 단 일 초식 만에 발현되기 시작했다.
‘난전으로 가면 필승이 아니라 사지로 들어가는 건가?’
발란스는 자신이 이긴다는 믿음이 흔들렸지만 그것을 부정했다.
상대의 강함을 인정해서? 그래서 뭐가 남는단 말인가?
인정해서 남는 건 자신의 죽음밖에 없었다. 강함을 부정하고 자신의 억지를 끼워 넣는 게 그가 전장에서 살아남은 비결이다.
발란스의 전신에서 살기가, 끓는 기름에 물을 부어 넣은 것처럼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곧바로 그 살기를 휘둘렀다.
“좋구나! 투지가 제일 중요한 법이지!”
청년은 이상하게 기뻐하며 단창을 휘둘렀다.
차아아앙! 차앙! 차앙! 차앙!
철의 울림이 허공에 길게 퍼지는 순간. 짧은 울림이 그 소리를 다시 찢어 놓기 시작했다.
발란스의 창술은 전직 군인다운, 그러니까 극히 실용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하게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발란스는 실전 창술뿐 아니라 한 기인으로부터 법식이 제대로 갖춰진 창술도 전수받았다.
짧은 선을 매우 빠르게 그려 대는 그의 창술은 곧바로 난전을 유도했다.
본능은 위험하다 부르짖고 있지만, 짧게 창을 마주하며 적을 찍어 내는 건 자신의 장기.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차앙! 차앙! 차앙! 차앙! 차앙!
들리는 금속음이 마치 단검 싸움처럼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한 번만! 한 번만 맞아라!’
발란스는 점점 답답해져 갔다.
이리 쉴 새 없이 창을 찌르고 휘두르는데 상대의 창은 끊임없이 원을 그렸다. 그리고 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식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창을 모두 막아 내고, 쳐 내고, 흘려버리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창이 자꾸 허공을 찌르고 휘두르는 느낌만 들자, 짜증과 동시에 화가 나기까지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냐!’
분명 청년이 창을 맞대고 있음에도, 자신이 휘두른 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발란스의 머릿속에 순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게 혹시 마스터들이 사용한다는 늦게 출발하여 먼저 도착한다는 무리인가?’
들은 적이 있다.
마스터들은 그 무공이 하늘에 닿아 상대의 힘을 이용해 적을 상대하고, 상대보다 늦게 출수하여 상대를 제압한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눈으로 보고 있었다. 먼저 공격했는데, 청년의 창이 먼저 앞에 있는 현상을 말이다.
‘헛!’
그때 손에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허공을 치는 것 같던 공격이 마침내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래, 무슨 수를 쓰는지 몰라도 그 수를 계속 쓰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발란스는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창.
짧은 금속음이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퍼지니 마치 하나의 금속음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발란스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절초인 벌들의 비행이란 초식을 전개해 냈다.
벌들의 비행은 팔방으로 몰아친다.
적이 막거나 뒤로 물러날 수는 있지만, 좌우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오로지 힘과 속도로 승부를 보는 초식.
자신이 당해 쓰러지거나, 또는 적이 쓰러지기 전까진 멈추지 않는다.
한마디로 서로의 전력을 겨루어, 약한 놈이 먼저 쓰러지는 초식이다.
차차차차차창. 차차차차창.
상대의 창은 움직임이 묘했다. 창을 작게 흔드는 것뿐이지만, 진격이 쉽지 않았다. 마치 제자리에서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오냐! 누가 이기나 보자!’
발란스는 이를 악무는 힘까지 동원하여 계속 청년을 몰아쳤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상대의 창이 그리는 원이 커지며 벌들을 만들어 내는 자신의 창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청년은 고작 두 걸음 뒤로 물러났을 뿐이다.
“젠장!”
발란스는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참으로 화가 나고, 억울하고, 또 창피한 일이지만 어차피 창에 찔려 죽거나 또는 불구가 될 바에는 발악이라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함께 죽으려는 수로 최소한의 방어마저 무시하고 창을 뻗어 냈다. 어느 순간, 손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자신의 창이 청년의 팔뚝에 꽤 깊은 상처를 냈다는 걸 깨닫고는 스스로 크게 놀랐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너무 일렀다.
옆구리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창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발란스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결론은 금세 났다.
청년은 이리 급하게 승부를 낼 이유가 없었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자신의 창을 맞고, 또 자신을 창으로 찔렀다는 건!
자신은 같이 죽으려고 휘둘렀지만, 소년은 그런 게 아닌 모든 게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저 나이에 어떻게!’
무공 익힐 시간도 모자랄 터인데, 이런 방식으로 싸움을 끝낸다는 건 자신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무엇보다!
‘대체 왜?’
실력 차는 확연했다. 그럼에도 청년이 자신의 창에 맞은 이유는 하나뿐이다.
발란스는 창을 거두고 물러났다. 그리고 소리쳤다.
“대체 왜!”
“…….”
“왜 날 살려 두는 거지? 왜 살리기 위해 상처까지 입었느냔 말이다!”
* * *
‘포스의 부족함을 근력으로 보충한단 말이지?’
군인다운 판단이다.
그가 나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 딱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외공의 차이다.
그의 신체는 완성되어 있다.
체구가 엄청 큰 건 아니다. 근육 자체가 오밀조밀하면서도 꽉 찬 느낌이 수련은 물론, 식단까지 절제하는 게 분명했다.
‘왈패 주제에.’
분위기도 그렇고, 왈패들을 보는 시선이 약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발란스라는 개인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죽이지 않고, 큰 상처 없이 제압하리라는 제약을 스스로 걸었다.
그래서였다.
사기종인(舍己從人: 나를 버리고 상대를 따른다는 무리)의 묘리까지 써 가면서 놈의 초식을 죄다 받아 준 이유는 말이다.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야 승복도 빠를 테니.’
완벽하게 굴복시킬 것이다.
그의 눈빛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유역후 시절 참으로 많이 보았던 저 눈빛.
저건 악의를 가지고 분통을 터트릴 때 나온다.
자신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분을 풀고자 하는 동귀어진 직전의 눈빛.
‘이거 이거 좀 위험한걸!’
내가 위험한 게 아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저렇게 발악이라도 해 보려는 자의 눈빛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약한 자들. 자기만 죽는다는 걸 모른 채 손쉽게 숨통을 내준다.
‘하긴 그걸 알았으면.’
애초에 저리 덤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살짝 문제다.
저런 놈을 죽이는 건 손바닥 뒤집듯 쉽지만, 살리고자 할 때는 까다롭기 이를 데 없다.
여지가 없기에, 활로를 열어 주려 해도 열어 줄 수가 없다.
‘그래,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각오해야지.’
발란스를 처음 찾아온 이유.
흑사회 조직의 규율이 간단한데 놈들은 복잡했고, 무엇보다 그것을 충실히 지킨다는 것이 놀라웠다. 실제로 보니 더더욱 그렇다.
‘키워서 써먹는 것보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놈이 좋지.’
한칼 맞아 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그냥 맞아 주면 자기 잘나서 그런 줄 알지도 모르니,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한 창 찔러 주고 말이다.
그 과정은 순간적이었다.
팔뚝에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첨으로 느끼는 자상의 통증은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놈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혹시 못 깨달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그건 기우였다.
불신이 가득한 눈빛.
“대체 왜!”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래서 대답, 아니 반문해 줬다.
“그것밖에 없냐?”
“…….”
“나하고 생사를 두고 싸웠으면서 궁금한 게 고작 그거냔 말이다.”
놈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