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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87화 (87/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87)

처음에는 작은 조직 하나를 제대로 먹어 놓고 규모를 늘려 볼까 했는데, 이 정도로 규율이 잡혀 있는 곳이라면 크게 놀아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제대로 된 조직이면 바깥으로 나가는 소문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흑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흑사회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대두.”

“네, 공자.”

“여기 관리하는 놈들을 잘 아나?”

“물론입죠. 이곳을 관리하는 갱조직은 에렌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입니다. 파이브 크로우라는 조직인데,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조사해 와. 이틀 줄게.”

“대체 뭐를…….”

“수집 가능한 거 전부. 왜? 못 해? 그럼 넌 쓸모없으니까…….”

대두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는 낮추고 이야기하지?”

“네…… 공자님.”

“무슨 조직의 비밀 같은 엄청난 걸 알아 오라는 게 아니다. 두목이 다섯이라면서. 그놈들이 누군지, 라이벌 조직이 어떤 놈들인지 그런 것들. 신경 쓰면 알 수 있는 그런 것들만 알아도 돼.”

“네, 공자.”

놈에게 준비한 전낭 하나를 던졌다.

“돈 아끼지 말고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 와.”

“네!”

그렇게 대두에게 조사를 시킨 지 이틀 후.

그저 그런 놈인 줄 알았던 대두는 인맥이 꽤나 넓은 듯하다.

일단 이틀이란 시간을 던졌는데,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에렌의 흑사회의 구도와 큰 조직들의 체계를 제법 상세히 알아 왔다.

‘어떤 놈부터 시작할까?’

시작이 반이라고 처음이 중요하다. 괜히 소란이 일어나면 좋을 거 없다.

나타족이나 산적들을 굴복시켰을 때와는 다르다.

거기는 무법지대였지만 여기는 에렌이다. 보는 눈이 많았으며, 자칫하다가는 다른 귀족들까지 엮일 수 있다.

그런 건 사절이다.

놈이 가지고 온 정보를 확인하면서 하나를 골랐다.

“발란스?”

명단 중의 이름 하나를 중얼거리자 대두가 말했다.

“마창(馬槍)이라고도 부릅니다. 파이브 크로우와 같이 오대조직 중 고스트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2인자입니다. 장검도 잘 쓰지만 주 무기가 창이랍니다.”

“창?”

“군대에서 상당히 높은 직급까지 올라갔다는데, 10년 전부터 이쪽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전직이 군인이라.’

흑사회와 군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규율이 생명인 군대와 달리 흑사회는 자유롭다 못해 분방한 조직이다.

‘군인 출신으로 흑사회에서 10년을 넘게 버텼다는 건 둘 중 하나겠군. 원래 실력이 좋아서 괜찮았다거나, 아니면 군인의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거나.’

그때 대두가 설명을 덧붙였다.

“외부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부분 조직의 연무장에서 일정 시간 창만 휘두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일반인에겐 성질을 내는 법이 없어, 이 바닥에서는 평판이 좋습니다.”

그렇다는 건 후자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최소한의 기반은 마련해야 할 터.

‘첫 선택지로는 나쁘지 않군.’

그럴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 *

마을 외곽 숲을 끼고 있는 이 빈 공터는 고스트의 소유였다.

원래 조직원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실제로도 많은 조직원들이 여기서 체력단련을 했다. 하지만 특정 시간대는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몇몇 사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사내가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쌔앵애앵!

창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근육이 살아 숨 쉬듯 오르락내리락했으며, 주변에 파공음이 거세게 울려 퍼졌다.

일반인이 봤을 때는 감히 말 한번 걸어 볼 엄두가 안 날 만큼 위압감을 가졌으나 얼굴을 보며 그렇지가 않았다.

깊게 들어간 눈동자, 얼굴에 살이 없는 건 아닌데 선이 뚜렷했고, 눈가에는 나이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었으나 누가 봐도 미남이라 부를 만한 용모였다.

“하아!”

사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숨결을 토해 냈다.

마흔다섯의 나이.

몸은 여전히 통제하에 있고, 그러기 위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할 때의 충족감이 마음에 든 것이다.

“발란스 님, 여기.”

지켜보던 사내 중 하나가 그에게 긴 수건을 건넸고, 사내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땀을 훔쳤다.

정적.

발란스라 불린 사내의 주변은 항상 그랬다.

발란스는 많은 수하를 거느리고 있을뿐더러, 흑사회에 몸담고 있는 놈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직했다. 하지만 그와 대화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많은 이들이 발란스를 과묵한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틀렸다.

발란스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러 면에서 재능이 있었고 관심도 있었다. 외국을 경험해 봤으며, 세 개 지역의 언어를 구사할 줄도 알았다. 게다가 그는 학문에도 관심이 있었다.

대부분 군에 필요한 조직력, 전술에 관련된 부분이긴 했으나 귀족들이나 읽는 문학작품이란 것도 구해서 읽고는 했다.

그만한 지적 욕구가 왕성한 사람이 말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된 건, 10여 년 전 군을 제대한 이후부터였다.

발란스가 원해서 한 제대는 아니었다.

그는 할 수 있다면 군대에서 은퇴를 바라기도 했다. 스스로 군 생활이 몸에 맞다고 느낀 만큼 막연하지만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다.

군무에 게으름을 피운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전장에서는 명령에 복종하고, 수하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솔선수범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가 안 한 것이 있었다. 아니, 못 한 것이 있었다.

그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정치에 너무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하다못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써 주는 상관을 가지는 행운도 없었다.

결국 전쟁이 끝난 직후 다른 퇴역 군인들처럼 제대를 해야 했다.

바깥세상은 암담했다.

나이 열여덟에 입대해 서른다섯까지 군에만 있던 발란스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라곤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군에서도 융통성 없음으로 유명했던 그였던지라, 이럴 때 도와줄 친구도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그건 그의 고향 친구인 요르크.

요르크는 발란스보다 5년을 먼저 제대하여 세상 바깥으로 나갔다.

발란스가 오랜 방랑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누구보다 그를 반긴 사람이 요르크였다.

요르크는 발란스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 일자리가 없어 용병 시장을 기웃거리는 발란스를 흑사회로 끌고 왔다.

당시 요르크는 작은 갱단의 중간 두목급이었고, 블랙나이프라는 멋들어진 이름도 없었다.

하지만 발란스와 함께한 이후부터 그는 흑사회에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요르크는 발란스보다 지식이 없지만 정치는 잘했고, 가진 무력도 비슷했다.

그렇게 요르크가 발란스와 이 바닥을 구른 지 10년.

그는 에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조직 고스트의 두목이 되어 있었고, 발란스는 2인자가 되었던 것이다.

발란스는 조직의 2인자가 되었으나 삶이 점점 무료해졌다.

에렌의 흑사회는 나름 균형이 잘 잡혀 있는 곳이었기에 조직 간에 큰 다툼이 없었으며, 그런 자잘한 다툼에서 자신이 할 일도 없었다.

그나마 이렇게 몸을 단련하여 성취감을 얻는 것만이 유일한 즐거움.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그 즐거움은 금방 사라지고, 다시 무료함이 찾아들어 왔다.

수하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고 있지만, 발란스 본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차라리 군대에서 졸병 생활을 했던 때가 더 좋았다.

‘그때는 나라를 지킨다는 자부심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자부심, 아니 욕이라도 안 먹으면 다행인 삶을 살고 있다.

‘다시 군으로 갔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었을 뿐이지, 실력만으로는 어느 대대급의 대장을 데리고 와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무력이든, 전술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한참을 상념에 잡혀 있던 발란스는 수하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정신을 차렸다. 날이 저무니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가려던 순간이었다.

“발란스?”

발란스는 길을 막고 서 있는, 아이라 하기에는 좀 성숙하고 청년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앳된 자를 보며 의아해했다.

‘내가 아는 아이던가?’

그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발란스 맞아?”

‘귀족인가?’

귀족이라 하기에는 인적도 드문 이 외곽에 호위병 하나 없이 서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건 있다.

자기소개도 없이 대뜸 자신의 이름을 묻는 그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냐, 넌?”

발란스는 의아함을 풀기 위해 그리 물었다.

대수롭지 않은 물음이었다.

넌 누구냐?

그럼 대수롭지 않게 누구누구라고 대답하면 되는데, 청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렇지 못했다.

“질문은 내가. 대답은 네가.”

발란스는 다시 한 번 청년을 훑어보았다.

건방진 말투와 고급 옷감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차림새. 하지만 철딱서니 없는 귀족가의 공자님이라 하기에는 저 허리에 달린 단창이 걸렸다.

보통 그런 놈들은 실전에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장식용 검을 차고 다녔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창이다. 그것도 보석 하나 박힌 것 없이 그냥 거무튀튀한 철창.

그 창에 눈이 가니, 그걸 잡은 손도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표정이 굳었다.

‘창을 잡은 근육이다. 그것도 무서울 정도로 독하게!’

자신도 창을 써서 안다.

일단 무기를 잡아 본 손과 아닌 손은 다르고, 그 무기 중에서도 검과 창은 또 다르다. 기본적인 엄지와 검지 사이의 굳은살은 같으나, 창은 손바닥 전체에 굳은살이 더 박인다.

저 외모에 자신과 비슷한 손을 가졌다는 건 청년이 그만큼 고련을 해 왔다는 증거.

그런 발란스의 시선을 느낀 듯 청년도 순간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손바닥을 펴 발란스 앞으로 내밀었다.

“자세히 봐. 너와는 다른 점이 있을 테니.”

그때 발란스의 수하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넌 누군데 길을 막고…….”

사내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발란스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기 때문이다.

수하들은 의아해했지만, 의아함을 넘어 경악한 건 그다음 일이었다.

발란스가 청년의 앞으로 조금 다가가더니 고개까지 빼 밀며 손바닥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손바닥과 비교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둔해서는 곤란하지. 아까 보니 움직임은 가볍고, 창은 무거워서 기대했는데.”

청년의 목소리에 발란스는 뒤로 물러났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뭐라 말하기에는 이 청년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차이가 크다.’

일반인이 봤을 때는 그의 손이나 자신의 손은 차이가 없을 터. 하지만 자신은 안다.

굳은살의 차이가 엄청났다.

막무가내로 창을 휘둘러서 생긴 게 아니라, 창을 컨트롤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조각처럼 말이다.

“공자는 누구십니까? 이곳은 엄연한 사유지이고, 지키는 이들도 있었을 텐데 여기까지 어찌 오신 겁니까?”

“그보다 여기는 어린애들이 없어 보기가 좋군.”

청년의 엉뚱한 대답에 발란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시비인지 아니면 감탄인지 청년의 진의가 판단되지 않았다.

사실 고스트에는 어린 조직원이 없다.

흑사회라 하지만 고스트는 선이란 게 있었다.

미성년을 받지 않고, 성인이라 하더라도 길거리에 흔한 왈패들도 받지를 않는다. 조직원들 대부분이 최소 10년은 칼밥을 먹으며 이 바닥의 무서움을 아는 놈들이다.

대부분의 조직은 그들에게 멍청하다고 손가락질했지만, 여태 그 선을 지켰다.

오대조직에서 가장 규모가 작지만 하나하나가 강한 소수 정예 집단, 그게 고스트였다.

그때 입을 열지 않은 발란스를 향해 청년이 말했다.

“내가 잘 골랐다는 생각도 드는군. 창 들어.”

“…….”

“궁금하지 않아? 이 손이 어떤 창술을 구사할지?”

발란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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