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86)
몰래 아이들을 따라갔다.
녀석들은 야시장을 벗어나 골목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볼 수 없었던 그런 광경이 있었다.
‘에렌에는 그나마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들. 출처를 알 수 없는 곰팡이 냄새와, 역시 뭐가 썩는 건지 알 수 없는 고약한 악취.
집 모양이, 먹는 것이 달라도 이 세계와 저쪽 세계의 빈민가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같았다.
‘녀석들로만은 힘들 테고, 분명 성인 남자가 끼어 있을 텐데.’
동냥질이든, 도둑질이든 아이들만 모여 있는 집단이란 있을 수 없다.
아이들은 노동력이고, 노동력은 돈을 창출한다.
인성이라고는 없는 것들이 아이들을 이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있을 리 없다.
분명, 대형 내지는 두목으로 불리며 상납을 받고 있을 터.
‘여기서는 뭐라 불리려나.’
흑사회라고 부르기도 창피한 그야말로 왈패, 잡패에 불과한 녀석들일 것이다. 하지만 밑에서 조지고 올라가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리라.
“이 새끼가 어디서 삥땅을 쳐!”
놈을 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의 리더였던 소년이 마흔쯤 돼 보이는 사내에게 처맞으면서 욕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 사흘 동안 딱 네 끼밖에 못 먹었습니다. 이러다 동생들 굶어 죽습니다.”
“나 때는 사흘에 한 끼만 먹어도 멀쩡했어. 이 거리에서 나만큼 잘 먹여 주는 놈 있어?”
“동화 몇 개면 되지 않습니까? 오늘 저희 배 터지게 먹을 만큼 벌어 왔잖아요!”
“늬들이 뭘 먹을지, 또 얼마나 먹을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야. 어디서 건방지게!”
“몇 푼만 주십시오. 어차피 도박에 다 날려 버릴 돈 아닙니까!”
“이 새끼가!”
소년은 한차례 얻어맞았으면서도 자신의 할 말을 했고, 그게 사내의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또다시 소년을 때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버지라…….’
진짜 혈육은 아닐 것이다. 대형, 두목이라 부르는 것처럼 그리 부르게 하는 거겠지.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아버지란 단어는 저런 곳에 쓰는, 쓰여서는 안 되는 거니까.
걸음을 옮겼다.
물론 사내를 말린다거나, 소년의 구타를 막아 줄 생각은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쪽으로 안내해 준 길잡이긴 하지만.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지.’
은화 하나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의 동정심을 이용해서 도둑질한 녀석들이다.
내 기준에서는 대놓고 강도질하는 놈보다 나쁜 행위다.
그래서 놈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을 뿐이다.
사내가 구타를 멈추고는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소리쳤다.
“뭐야?”
친절히 대답해 줬다.
“아!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계속해. 나도 볼일이 있는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거니까.”
“뭐?”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 아이들이 날 보더니 눈이 커다래졌다. 특히나 맞고 있던 소년은 더욱더 놀랐다.
그때 사내가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외쳤다.
“너 뭐 하는 새끼야?”
“나 뭐 하는 분인지는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볼일 다 봤어? 이제 내가 볼일 봐도 돼?”
“이 새끼가!”
놈이 내 앞에서 팔을 들어 올렸다.
빠악!
“아아악!”
놈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어깨뼈 박살 난 거 가지고 엄살은. 그 깡으로 여기서 먹고살 수 있겠냐?”
놈을 잘근잘근 밟아 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볼일 보도록 기다려 주겠다는데 왜 괜히 시비를 걸어. 응?”
“아악! 살려 주십시오! 제가 감히 공자를 몰라봤습니다.”
“모르는 건 죄지.”
밟고 또 밟았다.
이런 놈은 써먹고 말 것도 없다. 죽으면 어쩔 수 없고, 살아남으면 그것대로 말 잘 듣는 개가 될 것이다. 더 흑사회다운 놈들에게 안내해 줄 그런 개.
그렇게 놈을 밟고 있을 때였다.
“잘못했습니다, 공자. 살려 주십시오.”
‘어라?’
놈의 몸 위를 덮으며 앞을 막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맞고 있던 소년이었다.
이건 좀 의외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한다.
“너도 잘한 거 없어. 호의는 호의로 받아야지, 그걸로 뒤통수치는 게 제일 나쁜 거야.”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살려고 한 게 죄입니까!”
그 말에 아주 잠깐 멍해졌다.
살려고 한 건 죄가 아니다.
그래, 안다. 그래서 기분이 더 안 좋아졌을 뿐이다.
저 표정과 말.
저쪽 세계의 유역후가 그의 사부에게 외쳤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지 않은가.
“용서해 주십시오, 공자.”
소년은 급히 사내의 품을 뒤집더니 내게서 받아 간, 그리고 훔쳐 간 은화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돈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십시오, 공자. 살려 주십시오.”
상념을 떨치고 물었다.
“이놈한테 그렇게 당했는데 죽여 버리고 싶진 않냐?”
소년이 답했다.
“그래도 여기 아버지가 제일 낫습니다. 다른 패거리들은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는 날이 많지만, 이 아버지는 하루 한두 끼는 줍니다. 아프면 치료도 해 주고, 약도 사다 줍니다. 그날 공을 쳐도 말입니다.”
애들이나 등쳐 먹는 저 쓰레기가 성인(聖人)이라도 되는 양 변호하는 소년을 이해했다.
생존에만 집중해서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 있다.
그래서 저러는 거다.
아마 소년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아이들의 피를 빨아먹는 사내는 아마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중에서는 나름 인정이라는 게 있는 놈일 것이다. 공을 쳐도 한 끼를 먹이고 약을 사다 준다든가 하는.
하지만 결국 쓰레기다.
애초에 착한 놈이면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저 아이들은 현재 놓인 상황에서 저 쓰레기가 최고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화가 난다.
그 말이 사실이라서,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게 더러워서 말이다.
‘분명 잊은 줄 알았는데 말이지.’
유역후도 잊었던 그 옛날 일에 로라스인 내가 영향을 받을 필요 없다.
“이거 곤란하게. 너도 벌을 받아야 하는데 말이지.”
“살려 주세요, 공자. 정말 살려고 그랬을 뿐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오래 생각하면 나만 손해다.
허리에 찬 전낭을 소년에게 던졌다. 그리고 놀란 녀석을 향해 말했다.
“이놈에게 전해. 이틀 후 다시 오겠다고. 수작 부리면 그땐 사지를 잘라내 버리겠다고.”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로라스로서 유역후라는 전생은 분명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도 전생의 기억이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원래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는 것이 세상 이치.
어차피 모든 판단과 선택은 지금의 나의 몫이다.
눈을 감았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 *
‘에렌에도 이런 곳이 있었군.’
이곳의 상류층은 우아하다. 아니, 우아하게 보이도록 최선을 다한다.
술 한잔을 마시더라도 살롱이라 불리는 그들만의 공간에 모여 술맛도 느껴지지 않는 걸, 어디어디 지역의 무슨 나무 향이 나네 하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호호호호. 거기는 안 돼요.”
“이리 와 봐! 오늘은 내가 화끈하게 쏜다!”
대놓고 돈 자랑을 하며 어떻게든 여인을 안으려는 사내들.
“그렇지! 연승이야!”
“나만 죽 쑤는 건가!”
그리고 주사위, 카드 도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내들.
한마디로 이곳은 술을 마시고, 여자를 사며, 도박까지 하는 그런 유흥 장소다.
놀라운 점은 아직 어리다 할 만한 나이의 사람들도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대두!”
대두는 며칠 전 아이들을 때렸던 그놈이다. 얼굴이 하도 커서 그리 부르기로 했다.
“네, 공자!”
곳곳에 멍이 든 부위를 숨기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은 놈에게 물었다.
“여긴 아무나 출입이 가능한가?”
“이곳은 돈만 있으면 사람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뭐든 해도 되는 곳입니다. 이것도 공부랍시고, 어린 자제들을 이곳에 보내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물론 노련한 안내인이 붙어 있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노련한 안내인이라. 너는?”
“20년을 넘게 굴렀으니까요. 몇몇 귀족가의 공자님들도 모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놈인지…… 참.”
잠시 둘러보는 사이, 한 사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들며 소리쳤다.
“어이, 로날드! 왔어!”
뭔 소린가 싶더니, 대두가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 잘 있었나?”
“이분은…….”
사내가 잠시 나를 훑어볼 때 대두가 말했다.
“오늘 내가 모시는 공자님이시지. 귀하신 분이니 엄청 잘 모셔야 할 거야.”
“매니저 핫팟이라 합니다. 깊고 어두운 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최상의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
대두가 눈치를 준다.
“뭐!”
“그게…….”
검지와 엄지를 말아 보이는 놈의 모습에서 뭔지 깨달았다.
‘이런 데 와 본 적이 있어야지!’
기루야 몇 번 가 보기야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서 했으니.
전낭을 대두에게 던졌다.
대두가 전낭을 확인하더니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충분치 않은 거야?’
페컴이 준 돈이니 절대 부족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대두는 핫팟이라 불리는 놈에게 뭐라 속닥이더니, 다시 내게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공자님.”
대두의 안내에 건물 내부를 훑어보며 걸음을 옮겼다.
깊고 어두운 밤이라는 유치한 작명 센스와 달리 내부의 인테리어는 훌륭하다.
복층 구조의 주루 내에서 2층으로 올라 자리에 앉았다.
대두가 점소이…… 여기서 일하는 놈에게 요리를 주문하더니, 뭐라 속닥였다.
잠시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 지분 향기가 코를 찔렀다.
“돌려보내. 놀러 온 게 아니니.”
그다음 상황이 뻔한 터라 그리 말했고, 대두는 급히 여인들을 향해 다가가 뭐라 말했다.
잠시 후 대두가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다
뒷골목 왈패에 불과한 놈이 제법 거부의 풍모까지 보였다.
“너 참 자연스럽다. 자주 오냐?”
“자주는 못 옵니다. 하지만 한번 올 때마다 있는 티를 팍팍 내 줬지요. 사실 친구들도 있고. 일단 옷이 생명 아닙니까? 지금 이 옷을 사려고 몇 달이나 걸렸습죠.”
외투 안쪽을 보니 반지르르한 실크 옷감의 겉옷이 보인다. 저게 다 애들 쥐어짜서 번 돈일 터.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웃기기도 했다.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놈이다. 그래서 일은 잘할 것이다. 사기를 칠 줄 안다는 건 똑똑하기도 하고 대담하기도 하다는 뜻이니까.
여하간 전망 좋은 곳에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정말 돈 많은 한량 같은 놈도 있고, 처음 오는지 긴장을 타는 어린애들도 보였다.
‘저놈들이군.’
무인이라 하기에는 그 분위기가 너무 허접하지만, 일반인 기준에서는 충분한 위압감을 가진 놈들. 그중 몇몇은 제대로 된 칼밥을 먹는 놈 같기도 했다.
그때 소란이 있었다.
“이 새끼들! 내가 여기에 쓴 돈이 얼만데! 나를 이리 대접해도 돼!”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니 술에 잔뜩 취한 사내 하나가, 꽤나 거구의 사내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거구가 이곳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사람들과 속닥이는 걸 보면 사업장을 관리하는 조직원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멀뚱멀뚱 뭘 쳐다봐!”
술에 취하면 용감하다고, 거구의 반쪽도 안 될 것 같은 체구의 주정뱅이가 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의외다.
한 방 먹을 줄 알았는데, 거구는 움직이질 않는다.
‘이곳을 관리하는 놈인가. 이쪽 흑사회도 저쪽과 비슷한 규율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
그건 여기를 관리하는 조직이 제대로 된 놈들이라는 것이다.
그래 봤자 왈패 놈들의 본성이야 어디 가겠느냐마는 사업적 마인드가 있는 제대로 된 놈들은 저렇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시비를 걸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몇 대 맞아도 끌고만 나갈 뿐, 손님에게 손을 대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손님이고, 다시 와서 돈을 쓸 사람들이란 걸 아니 말이다.
‘이 정도라면 좀 크게 벌려도 되겠는데?’
계획을 살짝 변경해도 무방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