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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82화 (82/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82)

에렌성에 도착했다.

“이틀만 빨리 왔다면 바로 공작님을 뵐 수 있었을 텐데.”

내 방문에 페컴은 반가워하고, 동시에 아쉬워했다.

“어디 가셨습니까?”

“수도에. 황제 폐하의 부름이 있으셨다.”

의외다.

할아버지의 연세가 일흔에 가깝지만, 전장에서는 현역 장수다. 그만큼 영지전, 토벌전에 자주 참전한다. 하지만 수도로 가는 일은 극히 드물다.

―너무 교활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제국의 현 황제를 대하는 할아버지 평가는 박했다. 그만큼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중한 일인가 봅니다. 직접 가신 걸 보면 말입니다.”

“하도 징징대니 말이다.”

할아버지의 영향인지 페컴은 현 황제에 대한 존중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도 황제에게 징징댄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위험한데 말이다.

그만큼 날 믿는 듯하여 나쁘지 않다 생각했을 때, 페컴이 말했다.

“네가 온다는 소식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매지스터 헤르메스나 에르페유 경도 그렇고.”

페컴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대공자께서 와 계신다. 네가 도착하면 이야기해 달라고 하시더구나.”

‘대공자?’

그의 입에서 대공자라 불리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현 베스타인 가문의 후계자 후보 중 하나인 디존슨 린 베스타인.

할아버지의 장자다.

“처음 뵙게 되겠군요.”

가문의 후계자는 셋으로 직계 둘에, 방계 쪽이 하나다. 난 아직 그 누구도 만나 보지 못했다.

“바로 인사드릴 테냐?”

“아니요. 저도 준비란 걸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오자마자 부담스러운 자리는 피하고 싶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알았다. 하지만 네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금방 알려질 테니, 너무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

“네. 준비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내가 쓰던 방을 그대로 배정받았다.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었다.

잠시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했다.

원래라면 할 것들을 정리하고 후딱 처리했을 테지만, 할아버지와 약속이 어긋난 만큼 아무래도 여기서 꽤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할 테니까.

다음 날, 마탑으로 향했다.

락의 발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곳인 만큼, 헤르메스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로라스!”

보자마자 날아오는 헤르메스의 육탄 공세를 간신히 밀어내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분명 그런 것 같은데 왜 어제도 본 것 같은 친숙함이 드는 거지?”

“마탑에서 많이 연락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였겠지요.”

“기특한 것. 이 스승을 잊지 않고 주기적으로 연락 주니 기뻤지.”

인맥 관리는 그냥 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나를 잊지 않게 해야 한다.

보통 아쉬운 쪽이 덜 아쉬운 쪽에 먼저 연락하는 법인데, 당연히 락은 전자다.

이번 마물과의 전투도 그렇지만, 마탑은 정말 락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

“선물도 마음에 드셨습니까?”

“선물? 금광?”

“네.”

“로라스, 우리 말은 바로 해야지. 마탑의 도움을 받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거 아니겠어?”

“그러기에는 금광의 생산량이 매우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것 역시 락이 함락되면 손에 넣을 수 없던 금광이지. 아니야?”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내가 착각한 거지.’

내 앞에서는 설렁설렁한 모습을 보이는 헤르메스지만, 사실 열여섯 개의 마탑을 보유하고 있는 대륙에 몇 없는 대마법사 아닌가.

마법적 재능은 물론이고 경영 능력까지 있을 것이다.

그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무슨 부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밑밥은 좋지 않아. 차라리 제자가 스승에게 정식으로 부탁하는 게 효과가 더 좋지 않을까?”

기꺼이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그럼 스승님, 락에 마법사를 더 보내 주십시오. 1~2클래스의 마법사가 아니라 3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로 말입니다.”

“거긴 에르자일이 있어.”

“평생 락에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락에서 키울 수 있는 마법사로 몇 보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락의 크기로 봤을 때 탑의 규모는 충분할 텐데?”

“더 커질 겁니다. 그래서 스승님께 이리 투자를 부탁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투자라…….”

그녀는 흥미로운 눈빛을 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부탁한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아. 그리고 있어도 락에 가고 싶어 하는 마법사가 있을지 모르고. 내가 주인이긴 하지만 일정 수준에 오른 마법사를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그건 알지?”

“물론입니다. 보내만 주시면 그 후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는 탐욕적이지. 조건 맞춰 주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실력 있는 마법사가 탐욕적인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영광찬란한 우리 탑의 마법사라면 더더욱!”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거 마음에 드는 말이네. 고민해 볼게. 하지만 락이 어떤 곳인지 먼저 보여 줘야 할 거야. 탐욕스러운 것만큼이나 의심도 많으니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난 세 개의 손가락을 펴서 그녀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3년. 그 시간 안에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자신감은 늘 사랑스럽단 말이지. 아! 그래서 말인데 저번에 네가 만든 이론.”

“스승님과 제가 같이 만든 이론이겠지요.”

내가 정정하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짙게 어렸다.

“그래. 너와 나. 우리가 발표한 이론. 공식 회의에서 발표했다.”

“어땠습니까?”

“뒤집어졌지!”

신나 하는 헤르메스의 말은 그랬다.

마법에 마나와 더불어 포스를 접목한 이론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만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말도 안 된다고 성토―라고 느꼈지만 감히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자는 없었다고 했다―했지만, 이론을 실제로 마법으로 구현해 내는 데 성공하자 모두 얼이 빠졌다고 했다.

“일단 쉽잖아. 사실 어렸을 때 재능이란 건 거의 모든 일에 통하기도 하고. 마법사 중에 기사가 되고 싶어 포스를 깔짝거리는 이도 있고, 반대로 기사들 중에서도 마법사가 되고 싶어 마나를 배운 이들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조금의 포스를 가지고 있는 마법사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마법을 구현했다고 했다.

“난리도 아니었지. 학회에서 일반인들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있었다면 다치는 이들도 나왔을걸.”

구현 가능한 새로운 이론에 마법사들의 성토가 환호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기까지였지. 이후 중심에서 뻗어 나가는 방법은 발표하지 않았거든.”

“왜요?”

“우리 탑의 비밀이지. 그 좋은 걸 아무 대가 없이 그들과 공유할 필요 없잖아. 아마 곧 우리에게 연구 합작 제의가 쏟아질걸. 자금을 대 주겠다는 부호들도 줄을 설 거야.”

그녀가 신날 만했다.

많은 이들이 돈과 지식을 싸 들고 올 테지만, 그녀는 그 누구와도 같이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물론 대가를 준다고 해도 같이할 생각은 없지. 뭐하러? 우리 탑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게 부족하면 에렌성에서 당겨 올 수도 있는데. 굳이 남들 돈 쓸 필요가 없거든.”

그야말로 완벽한 기만.

고약하게도 헤르메스는 그 때문에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걸로 우리 마탑은 더 강해질 테고, 그럴수록 주군에게 더 큰 신뢰를 얻으면서 마탑의 지지 기반은 더욱 확고해질 테고.”

자아도취에 빠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나도 바쁘다.

저것 중에서 락에 가져오면 이득이 될 만한 게 있을지 궁리하느라 말이다.

역시 이곳을 제일 먼저 찾는 것은 현명한 듯했다.

맛있는 음식을 아꼈다가 마지막에 먹는 건 미련한 일. 원래 맛있는 건 남들이 먹기 전에, 먼저 침 발라 둬야 하는 법이다.

헤르메스에게 최대한 맛있는 걸 많이 빼먹어야 했다.

* * *

“주군!”

달려오는 녀석을 보며 잠시 눈을 의심했다.

솜털 뽀송뽀송한 얼굴이었는데, 어느새 거뭇거뭇한 수염이 보였고, 가슴에도 닿지 않았던 녀석의 정수리는 턱 부분까지 와 있었다.

“언제 오신 겁니까! 오신 걸 알았다면 제가 마중 나갔을 텐데요.”

“며칠 됐다. 빨리 오지 않았다고 탓하려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이리 절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외모만이 아니라 말투도 제법 어른스러워졌다.

“많이 컸구나.”

“커야죠. 거대해질 겁니다. 외형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말입니다.”

“…….”

“주군의 첫 번째 기사가 되기 위해 이 한 몸 불사를 겁니다.”

다 성장했는데, 저런 낯간지러운 말 하는 성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긴 꼬맹이 때부터 싹수가 있었지.’

뭐, 자신이 하는 말은 지키려 하니 그것도 하나의 매력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다른 건 많이 성장했고?”

녀석이 날 직시하며 말했다.

“이제는 그 작은 원을 더 크게 그리게 하실 정도는 됩니다.”

작은 원이라는 건, 녀석과 대련할 때 발밑에 그리는 걸 말한다, 이제 발을 쓸 수 있게 할 자신이 있다는 것.

센터에 온 이유는 에르페유를 만나기 위함이지만, 테라의 성취를 확인하기 위해서기도 하다.

계속 여기 맡겨야 할지 필요성도 알아보고 말이다.

“내가 알려 준 포스 서클레이션은?”

“그것 역시 자연스럽게 호흡할 정도로 익숙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주군께 여쭤볼 것도 있습니다.”

테라는 말을 가볍게 해도 확실치 않은 말은 하지 않는 녀석이다. 그 성취에 기대감이 들 때였다.

“로라스!”

“스승님.”

에르페유가 게스트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연락이 그렇게 한 번도 없을 수가 있느냐.”

“분기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안부를 전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혹시 받지 못하셨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맥이란 건 관리, 접촉을 해야 유지가 된다. 락에서 헤르메스와 더불어 가장 큰 인맥 중 하나인 에르페유에게도 렘을 통해 꼬박꼬박 서신을 보내고 있었다.

“무인은 검으로 말해야지. 편지 쪼가리로 뭘 알 수가 있겠느냐.”

“그렇군요.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락이 워낙 외지에 있어 찾아뵙지 못함을 이해해 주세요.”

에르페유의 억지에 유하게 대처했다.

저 억지도 반가움에 기인하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흐흐흐. 그래도 이쯤 되면 올라올 거라 생각했다.”

에르페유가 웃음을 흘리며 하는 말에 잠시 생각했다.

‘이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네 부친의 뒤를 이어야 할 거 아니냐. 네게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있는 것하고 없는 것하고는 다르지.”

“…….”

“실버에서 네 적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또 아느냐? 제법 괜찮은 호적수를 만날지도.”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실버 스워드 대회.

마흔 살 이하의 무인만이 참여할 수 있는 그 대회는, 일반 귀족들이 주최하는 것과는 확실히 무게감이 다르다.

기사의 나라라 불리는 미딩의 국왕이 주최하는 대회이고, 그 역사도 오래됐다. 당연히 수많은 나라에서 무인들이 몰렸다.

대륙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무인의 입지를 다지는 데 이만한 대회가 없는 것이다.

에르페유가 날 보며 물었다.

“준비는 다 하고 온 것이지?”

“아! 그게, 올해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아니, 왜!”

에르페유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회다. 올라왔다고 해서 난 네 부친의 최연소 기록을 깨려고 하는지 알았지.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그 타이틀은 가지고 가지 못해.”

“아버님이 계속 가지고 가시는 것도 하나의 효겠지요.”

“답답한 소리 한다. 너 같은 아들이 있으면 난 매일 춤을 추고 다니겠다. 자신을 능가하는 아들이란 아비의 꿈같은 거야.”

고민해 보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말했다.

“그러면 우리 센터에서도 참가 인원을 선출하고 있습니까?”

에르페유 대신 테라가 대답했다.

“네. 골드, 실버, 브론즈 모든 대회에 출전할 사람을 고르고 있습니다. 며칠 후면 예선 대회가 시작될 겁니다.”

“몇 명이나?”

테라는 에르페유를 슬쩍 보고는 대답했다.

“각 급별로 세 명을 선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센터 분위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모두 나가고 싶어 하니까요.”

미딩의 무투회는 센터나 유명한 무인의 추천권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모르는 이까지 몰려 대회가 혼잡해지고, 무엇보다 유혈 사태가 너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보통 센터마다 한 명을 추천할 수 있으나, 아이언센터는 권신 에르페유의 명성 때문에 각 등급별로 세 명까지 가능했다.

그때 뭔가 따끔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그의 눈이 주문을 외우듯이 불타고 있었다.

대회에 참가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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