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80)
“집사님, 아니 백작님.”
“잘 지냈는가?”
“여기는…….”
“오랜만에 보는 늙은이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을 셈인가?”
에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안으로 들였다.
잠시 후 시녀가 따라 놓은 찻잔을 앞에 두고 에듀가 입을 열었다.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아직도 이 늙은이가 원망스러운가?”
노인의 반문에 에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도 이제 마흔이 넘었습니다. 저를 위한 판단이었다는 것쯤은 압니다.”
에듀와 노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찻잔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렇게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에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어쩐 일이십니까? 평생 에렌에 계실 줄 알았는데.”
“그 난리가 났는데 그냥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여기 분위기는 활기차구먼. 다른 곳은 난리 통인데.”
몬스터 대군의 출현 소식은 에렌에서까지 소동이 있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피난민과 그 틈을 타서 난리치는 도둑들과 마적들로 인해 북부는 그야말로 난리 통이었다.
몬스터가 퇴치되었다지만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기에는 시간도 필요했다.
하지만 락은 달랐다. 원래의 자리에서 더 활기차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호구수를 한 달에 한 번씩 새로 작성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노인이 계속 말했다.
“많이도 발전시켰더군. 기본은 하리라 생각했는데, 정말 많이 발전했어.”
“에렌에서의 지원 덕분이지요.”
“에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여기의 발전은 이곳 사람들, 그리고 자네가 이뤄 낸 것이지.”
“…….”
“에르페유 경이 여기에 센터 지부를 낸다고 하더군. 알고 있나?”
“에르페유 경이 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매지스터 헤르메스가 이곳에 마탑을 건설하려 할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 다른 곳에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력이 없었던 것뿐.”
“…….”
“모르지. 자네 아들이 한 번 더 에렌으로 오면 당장이라도 센터를 만들지도.”
타악!
노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로라스는 어디 있는가?”
“일이 있어 영지에 없습니다.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에렌에 그리 있었는데 보지 못했을까?”
자신의 반문에 에듀의 눈빛이 변하자 그는 다시 말했다.
“제대로 된 대화는 해 본 적이 없지만. 자네 아들이니 오죽 뛰어날까? 실제로 공작님도 성에 계실 때는 로라스를 항상 옆에 두려 하셨지. 대단한 아이야.”
“과찬이십니다.”
“내가 언제 거짓을 말한 적이 있는가. 자네 말은 겸손이 아니라 기만일세.”
에듀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눈앞의 노인은 보통 노인이 아니었다.
백작 위를 가졌음에도 에렌성에서 제1집사로 지내고 있는 독특한 경력. 베스타인 공작의 오른팔, 왼팔이란 수식어를 뛰어넘는 심복 중의 심복.
무엇보다 심안의 눈을 가져, 다른 이의 속내를 훔쳐 읽는 데 능숙한 사람.
이 모든 소문의 주인공이 눈앞의 노인이었다.
자신을 에렌에서 추방시킬 때 가장 큰 지지를 보냈던 사람이었으나, 에듀는 그에게 조금의 악감정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알았다.
그때 자신의 추방으로 목숨을 살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자! 그럼 옛날이야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심안의 눈 트아이가 에듀를 직시하며 물었다.
“몬스터들 어떻게 된 일인가?”
* * *
“전사는 짐꾼이 아니다.”
“전사도 먹어야지요. 그리고 무구도 갖춰야 합니다.”
렘의 대답에 샤이한은 툭 튀어나온 눈살을 찌푸리며 날 봤다.
“왜?”
“뭐라고 말해야 하지. 우리는 전사다. 적과 싸우기만 한다.”
“그래서 렘이 전사도 먹고 입어야 한다고 대답했잖아.”
“하지만! 이건 아니지!”
1시간이 넘도록 같은 문제로 실랑이하고 있다.
캐낸 원석을 금으로 가공하려면 마을로 옮겨야 한다. 나중에 금광 사업이 안정화되면, 주변에 바로 금을 정제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락은 그 일을 할 일꾼이 부족했다.
10톤에 가까운 원석.
한 명이 20킬로그램을 들고 한 달을 걸어야 하는데, 그러면 최소 오백 명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락의 인구가 늘어났다 하나 그만한 일을 할 사내는 반도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래서 오크들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샤이한은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서 렘을 데리고 온 거지. 협상을 많이 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샤이한이, 그리고 렘이 도움을 청해도 모른 체하거나 상대의 답변을 반복하는 듯이 말하며 지켜보았다.
같은 말의 번복.
그것도 렘의 계획이었나 보다. 그가 강력한 훅을 날렸다.
“샤이한 대장님, 금을 파는 일에 있어 천년나무 부족도 의무를 져야 합니다. 지분을 3할이나 가지고 계시니까요. 아닙니까?”
“그건 맞지만!”
“에듀 영주님께서 동맹의 관계 때문에 금 판매에 대한 중개 수수료는 받지 않겠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판매 자체가 락의 의무는 아닙니다. 3할의 지분. 그냥 원석으로 가져가시지요.”
“그런 돌덩어리를 어디다 써!”
“원래라면 그걸 캐내는 것에 대장님 부족도 참여하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일에 개의치 않는 영주님의 호의에 이번 일은 인간들. 락과 베론 영지의 사람들만 참여했습니다.”
“…….”
“이미 캐낸 원석의 대가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캐낸 원석의 3할을 놔둘 테니 알아서 쓰시길 바랍니다.”
샤이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크는 제련 기술이 없다.
정확히는 부족 내에 대장간이 있긴 하지만 그건 기존의 무기를 수리하는 수준이다.
그들의 터전에 가 보지는 않았지만 사실이다. 그들 부족에 무기를 공급하는 게 바로 락이기 때문이다.
샤이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약점을 빌미로 협박을 하는군!”
잔뜩 일그러진 인상에 살짝 자리에서 일어난 모습이 허리에 찬 검을 뽑으려는 듯한 자세.
“영주님의 여러 배려를 감안치 않고 원하는 것만 주장한 건 대장님이시지요.”
일반인들이라면 오줌을 지려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분이란 건 권리를 뜻하지만 의무도 포함됩니다. 대장님의 부족은 안 그렇습니까?”
“다른 걸 한다니까! 락에 적이 쳐들어오면 우리가 가서 적을 도륙 내 준다고!”
“그건 동맹의 의무지요. 대장의 부족에 적이 쳐들어오면, 락은 금광의 문제를 해 주고 있으니 손가락 빨고 지켜만 볼까요?”
“…….”
“이걸 협박이라고 하시니 다른 방법을 제안할 수도 있습니다. 가져가신 3할의 지분을 반납하고 1할만 가져가십시오. 금광의 모든 처리는 락이 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렘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상인이네.’
이건 결정타다. 좀 고되더라도 지분을 일정 부분 되찾아 오는 게 장기적으로는 훨씬 이득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리될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안 돼! 금의 가치는 우리도 안다! 마정석을 가진 놈들이 많지도 않은데, 여기 금이라면 무기가 부족해질 일은 없다!”
“그러니까 참여하셔야지요.”
지분 재조정이란 무기는 샤이한의 고집을 무너트렸다.
원석 운송이 시작되었다.
한 달을 예상했지만, 오크들이 수송과 함께 호위에도 협조하여 기간이 닷새 정도 단축되었다.
그렇게 모두의 기대와 함께 락에 도착했고, 제련이 시작되었다.
락의 유일한 대장장이 율터는 새로운 일거리에 기뻐하면서도, 그 엄청난 양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 모든 걸 그에게만 맡겨 둘 수 없기에, 평소 율터와 어울리며 제련 일이 눈에라도 익은 영지민들도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니 새로운 손님이 와 있었다.
눈에 익은 얼굴.
생각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트아이 집사님.”
에렌에서 페컴과는 여러모로 친하게 어울렸지만, 눈앞의 늙은 집사와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마법도 아니고, 주술 같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마치 그가 내 속을 훑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긴장하지 않으면 정말 그럴 것 같기에, 대정심법을 운용하며 그와 상대해야 했다.
뭔 소리냐고?
한마디로 그와 마주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구나. 에렌의 많은 사람들이 네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내려오셨습니까?”
“몬스터 문제도 있고, 네 부친도 보고. 내가 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럴 리가요. 오신 김에 하늘 산맥의 절경을 충분히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오래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기에, 그리 말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가 미소를 짓는 걸 보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에렌에서도 목례 정도만 했건만.’
유역후라면 자신의 눈에 띄지 말라고 했거나, 그냥 목을 베었을 터.
‘나중에 우회적으로 경고라도 해야지. 저 눈빛, 분명 무슨 힘을 쓰는 것 같은데 말이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할 건 그것 말고도 너무 많았다.
* * *
1,000킬로그램의 원석에서 채취된 금이 70그램 넘게 나왔다.
보통 원석 1톤에 금이 4그램 정도가 나오는 걸 생각하면 거의 스무 배 가까운 양 아닌가.
물론 앞으로 모든 원석에서 그 정도로 나올지는 모르나, 일단 첫 채취가 이 정도 함유량이면 정말 성공적이다. 게다가 눈으로 확인한 바가 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금빛이 더 많았었다.
여하간 성공적인 결과에 모두가 고무되기 시작했다.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돈도 돈이지만 많은 인력이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사업이기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논의조차 되지 않았던 일.
그건 바로 락과 광산의 수송로 개척이다.
“그냥 이번처럼 옮기면…….”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옮기는 인원만 오백여 명에, 그들의 호위 병력까지 총 육백여 명. 이번에야 시험 삼아 직접 옮겼지만, 계속 그만한 인원을 동원할 상황이 되지 않습니다.”
“아예 광산에 제련할 곳을 만드는 게 가장 현실적이지 않겠습니까?”
“나중에는 그래야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기술자들도 없고, 그 정도로 규모가 커지면 백여 명의 호위 병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아직은 무리입니다.”
열띤 논의들.
다 한 번쯤은 고민해 봤던 것이고, 론은 수송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모일 것이다.
만만한 공사가 아니다.
그나마 오크들의 협조가 있고 렘이 모든 물자를 공급하니,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참 후 예상대로 수송로를 개척하자는 결론에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다.
‘당분간은 거기로 움직여야겠네.’
이 공사에는 인부도 그렇지만, 호위 병력도 엄청 필요할 터.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방에는 에듀와 로라스만이 남았다.
“계속 거래를 하고 있는 용병대만으로는 인원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용병대를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로라스는 에듀의 표정이 어두운 걸 보며, 용병들 문제로 걱정하고 있다 생각하고 다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옛날의 락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그탑 경. 그리고 저와 에르자일도 있습니다. 치안의 구멍은 크게 염려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에듀가 로라스를 보며 말했다.
“로라스.”
“네, 아버님.”
“에렌에 다녀와야 할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