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79)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락이 시기에 맞춰 토벌을 하는 것처럼, 너도 그렇게 해 달라는 거야. 그 정도면 돼!”
프라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이 ‘다닐 수 있게’가 아니라 ‘다닐 만하게’라는 미묘한 차이가 명확하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때마다 그쪽을 정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갸우뚱거리던 프라일의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토벌이라면 늘 하는 것이니까.”
“맞아. 그 시기만 알려 주면 돼.”
“그렇게 하지. 그거면 되는 건가?”
프라일은 환하게 웃으면 대답했다.
“딱 그거면 된다.”
그렇게 협상이 끝났고, 프라일이 돌아갔다.
로라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사람을 끌어들일 미끼가 준비되었고, 그 사람들이 오갈 길을 확보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어차피 20년 앞을 보고 준비한 계획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리되었다면 벌써 반 이상이 끝났다.
락은 비상할 것이다. 아주 높이 말이다.
* * *
집중했다. 그리고 봤다.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보고자 하는 건 실체가 없다.
의지를 담아 다시 보았다.
보려고 하면 보인다.
그리고 보았다.
실체는 거대한 벽과 같았다.
‘대체 무엇일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 시그탑은 눈앞의 청년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처음에는 안 그랬다.
자신의 주군이 그랬듯, 주군의 아들인 이 청년도 재능을 타고났다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재능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건 불변의 진리고, 여기에 이견이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한데 그 진리가 깨지고 있었다.
“연환(連環).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시그탑 경.”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 어린 이 천재에게 이제는 공포감까지 느껴졌다.
그의 말은 자신이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다.
문제는 자신이 그냥 알기만 한다는 것이다.
아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의 차이는 대륙과 섬의 차이만큼 크다.
그런데 이 천재는 알기만 하는 것을 실제로 행한다.
“속근을 단련하는 방법과 비슷합니다. 아니,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검을 맞대면서 느껴지는 이질감.
포스의 양은 자신과 비슷할지 모르나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는 어른과 아이의 차이.
“밀고 당기면서 호흡을 훔치세요. 처음에는 하나. 그다음에는 둘. 그리 숫자가 늘어나면 수십의 적이라도 하나의 호흡이 될 것이고, 그러면 대응하는 데 크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면서도 말이 끊이지 않는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태산.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속근이네, 뭐네 하는 이야기도 경청했을 것이다.
“시그탑 경.”
너무 깊은 생각에 빠졌던 걸까?
어느 순간 로라스가 맞대었던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자신을 직시하며 말했다.
“왜 그리 위축되어 있으십니까?”
“소영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운이…….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속도 꿰뚫나 보다.
성인이라 하나 자신에게는 어린아이로 보이는 청년의 눈을 마주하기도 힘들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십시오. 잡념은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
“보이는 것이 명확할 텐데요? 그리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말입니다.”
순간 몸이 부르르 떨렸고, 머릿속에 천둥벼락이 치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모든 것이 명확한데 왜 고민하십니까?”
로라스의 물음에, 굳어진 시그탑의 표정이 풀리고 어느새 미소가 어렸다.
* * *
“그래. 그리 애쓰는데 진도가 나가야지.”
영지에서 자신의 경지를 아는 이는 몇 없다.
번천과 에르자일은 보았기에 알았고, 부친과 에듀는 그 경지가 높아서 알아봤다.
근래 시그탑과 대련을 하면서 그가 위축됨을 느끼고 있었다.
‘알아본 거지.’
촉천의 경지도 어느새 극상에 이르고 있었다. 육보 승천을 시도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에듀가 알아봤다.
개천지보의 경지로 생각했을 때 에듀는 지금 사보의 경지 앙망세계(仰望世界: 세상을 바라보다)에 이르렀을 터.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면 모든 것에 의구심을 품는다.
원래 알고 있던 것이 긴가민가하고, 생각 없이 봤던 것들이 제대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의문을 품게 된다. 내가 보아 왔던 것들이 원래 봤던 것들이 맞는 건지 말이다.
“스스로 서게 되는 과정인 거지. 그리 노력하더니만.”
시그탑은 재능 가득한 기사. 거기에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의 경지는 날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였다.
제대로 개천지보를 가르친 건 아니나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무리(武理)는 부지런히 전수했다.
그런 그의 재능이 만개하기 시작하니 뿌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문제로군.’
게이트, 아니 금광 문제로 정신없이 이곳저곳 뛰어다닌 탓에 근래 마음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신의 경지는 충분히를 넘어 과도하게 빠르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
아는 것에 의심을 품는 것.
무인이라면 평생을 달고 가야 하는 숙제다.
하지만 난 그 숙제를 풀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에는 결국 극도(極道: 모든 것을 통한 경지)에 이르러 거침이 없지 않았는가?
커터를 잡았다.
창해출언(蒼海出言: 넓은 바다에서 말이 나왔다).
커터의 주변에서 풍압이 일어났다.
언지도(言知道: 말은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고 커터를 바닥에 찍는 순간.
만물흔적(萬物痕迹: 만물에 흔적을 남긴다).
풍압이 사방의 대지를 할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절로 패기가 일어났다.
딱 거기에서 멈췄다.
‘이제는 되는구나.’
만족스러웠다.
절로 일어나는 패기에 끌려다니지 않고 손에 잡아 둘 수가 있었다.
별거 하지 않았음에도 그리되었다.
개천지보 제육보.
승천의 경지가 된 것이다.
‘한 번 더 시작해야겠지.’
그 경지에 이르면 환골탈태가 시작된다. 하지만 내게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난 이미 그걸 여러 번 겪은 몸.
‘결국 마음공부가 주가 돼야겠지.’
패기를 잡아 두었다 하나, 굳건한 마음이 없으면 다시 풀려 나간다.
물론 문제가 될 건 없다.
새로운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뿐, 난 그것마저 이미 잡은 몸이다.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여!’
잊기 쉬운 말을 떠올리며 다시 커터를 쥐었다. 그걸 그대로 허공에 어 올렸다.
점(點).
모든 움직임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선(線)을 그리고 면(面)을 그렸다.
어떠한 기교도 없이 그냥 단순히 그 동작 등을 반복하였다.
이건 정성을 다해 집중하여 움직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작업이다.
점과 선 그리고 면에 익숙해지면 공간의 영역이 된다.
‘안다고 하여 게을리하지 말고, 해 봤다고 하여 자만하면 안 된다.’
공간의 세계는 무궁무진하여 언제나 그 영역에 들어가면 새로운 것을 볼 테니.
어느 순간 처음 검을 잡은 무사처럼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뛰는 마음을 부여잡고 계속, 계속 그리고 다시 계속 휘둘렀고.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간이 열렸다.
신검합일. 아니 신창합일이라 하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 새로운 세계에서 유아독존(唯我獨尊)하기 시작했다.
* * *
락에 기다리던 렘이 도착했다.
그는 락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다.
물자가 항상 부족한 이 영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상인이니까. 게다가 영주의 가문에서 일을 하니 신용도 높았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스무 수레의 물자를 끌고 락에 당도했다.
가격은 싸지 않다. 그렇다고 폭리도 아니다.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지 않는 가격, 딱 그 수준.
락은 그거면 충분했다.
“소영주님.”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나중에 이야기하지.”
“네.”
렘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를 알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
락은 렘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긴장하는 순간은 많지 않다는 소리다.
가끔 그런 것도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은 스스로 깨닫게 될 테니까.
아버지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렘, 당신의 공로가 컸다. 쉽지 않았을 텐데 훌륭하게 해내 주었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렘이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에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셨다.
“상을 바라도 충분하다. 너는 제 몫을 다했다.”
전쟁은 보급이 반이다.
그것을 책임진 것이 렘.
비록 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거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완벽하게 준비해 주었고, 그로 인해 락의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해야 할 일이 또 있으니까.’
아버지는 논공행상에도 참여하지 못한 그에게 10골드 코인의 상을 내렸고, 렘은 적지 않게 기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인정받았음을 기뻐하는 것이리라.
“렘, 당신이 필요하다.”
그런 그를 그 말 한마디로 데리고 왔다.
“락의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거뜬해야지. 정말 체력 단련을 해야겠는데?”
하늘 산맥을 오르며,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진 그에게 말했다.
“상단에 엄청 도움이 되지 않겠어? 이거 관리 다른 사람에게 맡길까? 필요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 찾고.”
“제가 합니다!”
렘이 크게 소리치며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바로 세웠다. 이득에 목숨을 건 그는 상인이다.
업고 가야 할지 잠시 고민할 정도로 느릿느릿했던 움직임이 빠릿빠릿해졌다.
그를 하늘 산맥으로 데리고 가는 이유는 하나다.
금광을 보여 줘야 했고, 또 협상이 필요했다.
금광에 대한 지식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래도 광업을 조금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터. 게다가 협상에 그는 반드시 필요했다.
“이건…….”
금광이라 말했지만 생김새는 게이트. 그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듯했다.
“놀라기는 일러. 들어가 보면 더 놀랄걸.”
그와 함께 게이트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곳이…….”
렘은 주변의 환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휘황찬란한 금빛에 눈빛을 쉴 새 없이 번득이고 있었다.
“금광에 대해 아는 게 좀 있어? 일단 작업은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기술자가 필요할 것 같아서.”
“필요합니다. 다음에 올 때는 기술자를 찾아오겠습니다.”
렘은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손을 들어 금맥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거 전부 제게 맡기시는 겁니까?”
“락의 재정 책임자가 렘, 당신 아닌가? 외부인에게 맡길 수는 없잖아.”
“물론이지요!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산을 넘으면서 죽을 것 같던 그의 표정은 어느새 생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안으로 들어가 그 크기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열흘 굶은 사람이 눈앞에 산해진미를 둔 것처럼 탐욕이 가득한 것이 느껴졌다.
문제 될 것은 없다.
저 탐욕이 렘이 가진 능력의 원천일 테고, 그럴수록 락은 더 부유해질 터.
렘에게 말했다.
“문제가 하나 있어. 이거 마을로 수송해야 해서 당분간은 작업 속도가 매우 더딜 거야. 또 그리되면 이득이…….”
“나지 않겠지요. 아니, 오히려 적자겠지요.”
말하기 전에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 같았다.
“길이 필요하겠군요. 호위 병력도 필요할 테고 말입니다.”
“돈이 많이 들겠지?”
렘은 어느새 진지함이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서 적자가 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금광이라면……. 소영주님, 이 금광 정말 사라지지 않는 겁니까? 이게 확실해야 합니다.”
“이미 에르자일이 마법진 작업을 끝냈어. 이후 추가로 보강하는 작업이 진행될 거야.”
“에르자일 님의 클래스라면, 관리만 잘하면 문제 될 건 전혀 없겠군요.”
“그러니 그 문제는 접고. 어떻게 생각해?”
그는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담으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 노다지지요. 사업성은 차고 넘칩니다. 물론 전문가가 와서 다시 확인해야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겠군.”
“문제요?”
“이거 100% 우리 게 아니거든.”
그의 미소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