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76)
놈들의 지휘관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가 다른 놈들의 수배는 더 커.
샤이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살덩어리가 죄다 머리로만 모인 듯 만두처럼 빵빵하게 보이는 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냥 문어 대가리와 거대 문어 대가리의 차이는 없었다. 정말 머리 크기 차이를 제외하고는 차림새까지 똑같다.
그렇게 확인한 숫자만 셋.
‘셋이면…….’
총지휘관은 아닐 터.
어쩌면 이놈들은 그냥 간부들. 중간 지휘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지휘관은 대가리가 더 크려나?’
보이지 않으니 가설을 확인할 길은 없다.
계속 숫자를 세니 대략 오천.
그리고 거대 문어 대가리의 숫자는 일곱.
놈들의 군대가 어찌 조직되었는지 모르지만 일곱이란 숫자만 기억하면 된다.
여기서 락까지의 거리는 이틀이다.
그사이 놈들의 머리만 따면 성공하는 거다.
놈들이 완전히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군량이 필요 없는 군대라…….’
문어 대가리들은 대부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게이트가 닫히면 소멸되니 아마도 거기서 어떤 방식으로든 힘을 공급받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여하간 놈들의 후속 부대가 있는지 다시 반나절을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움직였다.
놈들을 죽여야 할 시간이었다.
* * *
샤르르르르르르르!
적군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덤벼든 이들 중 반 이상이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우아아아아!”
쿠오오오오!
사람들은 물론이고 오크들 역시 괴성을 질러 대며 승리를 자축했다.
전투는 대승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로 완벽하게 락의 승리로 끝났고, 수백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토성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쓰러진 괴이한 적들을 향해 창으로 확인 사살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갑주와 무기를 벗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도.”
“마정석도 없고, 그렇다고 쇠붙이 하나 없네.”
보통 마물들은 마정석 말고도 드물게 철이나 금은 조각, 아주 낮은 확률로 보석의 원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마정석은 영지에 귀속되어 공평하게 분배되지만, 그런 쇠붙이들은 챙긴 사람이 주인.
“뭐가 이리 거지들이야.”
그런데 마정석과 원석은커녕 쇠붙이 조각 하나 나오질 않으니 아쉬운 마음들이 컸다.
“이 고쳐도 못 써먹을 갑옷하고 무기뿐이겠는데.”
1시간에 걸쳐 그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는 걸 봐서, 걸치고 있는 게 전부인 듯했다.
“너무 풀 죽지 마. 무기의 무게가 묵직한 것을 봐서, 그냥 쇠붙이로만 팔아도 돈이 좀 돼. 우리 영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전리품 분배 섭섭하게 하신 적 있나.”
사기를 돋운 건 토니였다.
“게다가 이런 게 뭐가 중요해.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없어도 좋으니 모두 무탈했으면 좋겠다.”
계속되는 말에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들도 안다. 다른 영지의 농노, 평민들은 아무 보수도 받지 못하고 무기와 갑옷 한 번 지원받지 못한 채 대부분 머릿수 채우다가 죽는다는 걸 말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락은 정말 천국 같은 곳이다. 보수까지 받는 영지민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차피 돈을 받지 않아도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얼른 수거해. 놈들이 물러갔지만 숫자는 여전히 많으니까.”
무기와 돈이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갑옷을 수거하는 손길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시간.
저택 내 회의장에서 에듀는 지휘관급의 인물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대승입니다. 부상자가 이백이 되지 않고, 사망자도 쉰이 넘지 않습니다.”
드리프의 보고에 에듀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실수를 반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뭔가를 잘못한 건 아니다.
다만 퇴각의 신호는 제때 보낸 것인지, 마법으로 혼란에 빠진 놈들을 역습할 때의 타이밍은 적절했는지, 그리고 토성을 이용한 수성전은 완벽하게 제대로 해냈는지 등.
전투가 끝나니 자신의 판단이 최선이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몰려온 것이다.
에렌에서도 천재라 불리고, 무인으로서도 빠른 성장을 보인 그였으나 그도 이런 전쟁 경험은 없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기뻐하셔야 합니다, 영주님. 곧 병사들 앞에 나가셔야 합니다.”
시그탑이 조심스레 하는 말에 에듀는 그제야 표정을 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영주다.
진 싸움도 아니고 승리한 싸움에 죽을상을 지으면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친다.
에듀는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괴이한 무리에 대응하여 승리를 거뒀습니다. 락의 영주로서 감사를 표합니다.”
먼저 샤이한을 보며 말했다.
“샤이한, 오늘 내가 너에게 빚을 졌다.”
“동맹으로서 당연한 것. 우리도 이겨야 하니까 빚은 없다.”
투박한 그의 말투에 에듀는 한결 여유를 찾으며 대답했다.
“천년나무 부족의 동맹으로서 앞으로 락은 성심을 다해 도울 것이다.”
“새삼스레.”
샤이한은 또 인간들이 오버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고, 에듀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에르자일에게 말했다.
“매지스터, 오늘 매지스터의 전공을 에렌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리고 따로 마탑에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별말씀을. 스승님께서도 도우라 하신 일입니다. 마음에 두실 필요 없습니다.”
마법진으로 쉴 새 없이 마정석의 마나를 흡수했으나, 연신 쏟아 낸 마법 탓에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속이 울렁거리며 당장이라도 자리에 눕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도 좋은 분위기를 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기에 참고 있는 상황이었다.
에듀는 계속해서 스톤의 영주, 그리고 기사들을 크게 치하하며 말했다.
“아직 적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언제 다시 습격해 올지 모르니 긴장을 풀지 말고 계속 준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에듀는 기사들에게는 할 수 있는 대로 목책을 다시 만들고 토성 보수를 명령했다.
그때 스톤의 영주 베론 남작이 말했다.
“적들을 보니 수는 많으나 지휘 체계가 엉망인 것 같습니다. 대비하는 건 좋으나 일단 오늘은 쉬게 하는 게 어떨까요?”
“으음.”
“분명 대승이나 그만큼 병력들이 쉴 새 없이 움직여서 이뤄 낸 일. 이겨서 좋아라 하는데 다시 중노동으로 사기를 떨어트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목책은 충분히 늘어놓지 않으면 저지 효과가 없으니 그럼 토성 보수에만 집중하도록 하지요.”
에듀는 적절히 타협 방안을 제시했고, 샤이한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샤이한, 에르자일은 물론이고 베론 남작까지 돌아가자 회의실에는 에듀와 락의 세 기사만 남았다.
“영주님, 소영주가 성공한 거 아니겠습니까?”
브렌드가 아까는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당연하지. 오늘 대승을 거둔 이유는 적들이 너무 멍청하게 돌진을 고집해서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그 숫자를 상대로 이 정도의 적은 피해라니. 말이 되지 않지.”
드리프가 그리 말하자, 에듀는 시그탑을 보며 말했다.
“경도 로라스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적들은 전쟁을 몰라도 너무 모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오늘같이 큰 피해를 입었다면, 최소한 토성의 한 축은 무너트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적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안의 나무가 부러져 균열이 가기 시작했을 때는 저도 식겁했습니다.”
드리프가 다시 거들듯 말하자 에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왜 소식이 없는 거지.”
“적들에게 길이 막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전장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시그탑은 굳게 믿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소영주의 포스도 그렇지만 발을 움직이는 재간은 정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지 않습니까. 저런 적들에게 어찌 될 분이 아닙니다. 이건 기사인 제 안목으로 장담할 수 있습니다.”
에듀도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아비라면 당연히 말려야 할 그 작전을 허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차례 전투가 끝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사해야 한다, 로라스!’
에듀는 그렇게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예상대로였다.
큰 문어 대가리의 숨통을 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숫자를 믿는 건지, 아니면 그냥 몰랐던 건지 호위가 허술해도 너무 허술했다.
하긴 전방에 대군이 있고, 좌우로 수십 단위의 부대들이 움직여서 방심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두머리가 죽으면 치명적인 걸 알아야지.’
집단의 싸움이란 건 그렇다.
그 크기를 떠나 우두머리의 존재 유무가 대단하다.
지존의 자리를 하루라도 비워 놓을 수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하물며 전장에서야.
내 눈에 띄었던 일곱의 큰 문어 대가리는 모조리 숨통을 끊었다.
큰 놈 하나당 수백의 병력을 통솔하는 것 같은데, 호위는 열밖에 되지 않았기에 속도도 빨랐다.
전방의 적군의 눈만 피하고 후방으로 접근해 들어가면 쉬웠다. 아주 허무할 정도로.
‘이리 멍청하니 계속 출현했음에도 게이트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지. 보이지 않던 놈들은 메타린 평야로 몰려갔을 텐데…….’
이제 선택의 문제가 남았다.
서로의 힘을 알아봤기에 가능했던 약속.
쳐들어오지 않은 쪽이 게이트를 닫는다.
현재 양쪽으로 진군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지만, 일단 이쪽은 위기를 넘겼다.
여기에 의심은 없었다.
아버지도, 다른 기사들도 뛰어난 사람들이고 오크의 부대가 있으며 에르자일과 마법사들도 있다.
그리 준비했는데 지휘관이 몇 남지 않은 문어들을 처리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러면 내가 게이트를 닫으러 가는 게 맞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락의 전투는 지켜봐야 할 듯싶어, 놈들의 뒤를 급히 쫓았다.
‘겁먹지 말아야 할 텐데.’
산 위에서 락의 사람들과 오크들이 보였다. 제법 진형을 갖춘 문어 대가리들도 말이다.
‘숫자에 현혹되지 마라. 어지간히 차이가 나지 않으면 준비한 쪽은 필승이다.’
오합지졸이란 말과 강병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게다가 지휘관도 없으니 겁을 먹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샤르르르르르르.
문어 대가리들이 움직였다.
목책을 향해 아무 생각 없이 진격하는 모양새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놈들이 있네.’
조금이라도 도울 방법이 있을까 고심하다가 큰 문어 대가리 하나를 발견했다. 전장을 둘러보니 두 마리가 더 발견했다.
문어 대가리들이 진격했지만 큰 대가리들은 샤르르르 소리를 내며 지켜만 봤다. 난 그놈들을 향해 움직였다.
할 수 있는 걸 했다.
투욱.
마지막 떨어진 놈의 머리를 차 내고 전장을 향했다.
나름 그대로 열을 맞춰 진격하던 놈들의 진형이 헝클어져 있다. 삼삼오오 목책으로 달려들기도 했다.
확실했다. 이 큰 대가리 놈들이 다른 모든 문어 대가리들을 통솔하고 있는 것이 말이다.
‘필승이다!’
그리 생각했고, 그렇게 되었고, 놈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뒤로 빠졌다.
‘이제 가야지!’
곧바로 프라일이 예측했던 지역으로 이동했다.
―산 위, 그리고 더 안쪽은 아니야.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이야. 양 떼에 양들이 천 마리가 있어도 감히 사자 한 마리에게 덤벼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 산맥 안쪽의 몬스터는…… 말 그대로 몬스터라 놈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해. 게이트도 그쪽에 절대 형성되지 않고.
게이트의 위치는 여기서 멀지 않았다.
길을 모른다면 한 달도 충분히 헤맬 수 있겠지만, 프라일은 놀랍게도 산맥의 지리를 알고 있었고, 난 이런 공간을 기억하는 데 아주 익숙했다.
그 시절에 수십 년을 전장에서 살아왔으니까.
산맥이 공간 왜곡, 착시 현상을 일으켰지만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안력만 키우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그렇게 이동했다.
‘게이트의 핵이란 게 토벌전 때 봤던 그런 마나석이었으면 좋겠네.’
사람 마음 간사하다더니, 마음에 여유를 찾으니 그런 생각까지 든다.
닷새 걸렸다.
놈들의 게이트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