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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75화 (75/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75)

콰콰콰과아아앙!

천둥과 함께 부슬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으으.

나무와 나무 사이를 헤집는 바람 소리가 기이하게 울려 퍼졌다.

여기다 잡귀 하나 풀어 두면 딱 걸맞은 장소지만 말이다.

이런 날을 싫어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낮이 저녁인 양 먹구름 잔뜩 끼고, 비가 내리기 직전 강풍이 부는 그런 날씨를 좋아한다.

이유?

세상 모든 좋아하는 것은 이유를 알 수 없고, 이것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 비만 좀 아닐 뿐이지.’

산속에서의 비는 체력을 앗아 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비는 체력을 앗아 가나 내가 내는 소리도 앗아 간다. 규칙적인 빗소리에 끼어들기도 좋다.

사실 추종술이나 잠입술, 암살 등의 잡스러운 것들은 익혀 본 적이 없다.

옛날 그 세계에서 천하제일인이 되기 전에도 그런 것을 익히지 않았다.

정면으로 들어가도 막는 것들이 거의 존재치 않았는데 그런 것들을 배울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리고 경지에 이른 후에는 그런 것들을 그냥 알게 되었다.

눈이 좋아지고, 모든 것에 쉽게 동화할 수 있으며, 의지만으로 내상을 입힐 수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언제 배웠겠는가?

물론 지금은 그때와 다르긴 하지만.

‘목 하나 따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아무려면 천황성 시절 황실에 들어가 황제와 독대를 했던 것보다 어렵겠는가?

그나저나 비가 계속 내린다.

지금의 이 수고가 헛수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놈들이 다른 쪽부터 거치고 오는 게 락으로서는 절대 유리하다.

샤이한의 말이 맞다면, 그리고 락으로 향한다면 오늘 내일 문어 대가리들이 보일 터.

―이쪽으로 온다면 네가. 너희 쪽으로 간다면 내가.

프라일이 한 말이 떠올랐다.

하늘 산맥에서 이런 대규모 마물의 출현은 몇 년에 한 번씩 일어났다고 했다.

그걸 인간들이 모르고, 유사 인종들이 몰랐던 이유는 지킴이, 또는 선택받은 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빠르게 게이트를 닫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초인들의 집단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같은 소속은 아니었다. 서로 필요해서 그냥 하는 일이라고 했다.

숫자도 많지 않았다.

열도 안 되는 숫자로 만이 넘어가는 마물들을 막아 낼 수 있는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 방법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숫자가 얼마가 나오더라도 게이트를 닫으면 그냥 사라진다고 했다. 그걸 이용하여 마물의 게이트가 초기에 생성되는 순간 닫아 버리거나, 아니면 놈들이 빠졌을 때 뒤를 쳐서 게이트를 닫는다.

이번처럼 산에 광범위하게 퍼지는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프라일은 그 이유를 이쪽 구역을 담당하던 지킴이가 자리를 비웠을 거라고 추측했다.

‘종의 교체라니, 무슨 동화책도 아니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졌으나, 실제로 문어 대가리들의 숫자를 보며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내가 이 세계에 있는 것부터 동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니.’

그 생각을 하면 납득이 빨리 갔다.

여하간 프라일과 약속한 것이 있다.

놈들이 이쪽으로 향하면 프라일이 게이트를 닫고, 그쪽으로 향하면 내가 게이트를 닫기로.

닫는 방법은 간단하다.

던전을 닫는 것처럼 핵을 파괴하면 된다.

계속 기다리고 기다렸다.

헛수고이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그리고 바람은 대부분 그렇듯이 헛되게 끝난다.

문어 대가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젠장!’

수많은 문어 대가리들이 내가 있는 나무 밑을 지나쳐 갔다.

위장은 완벽하니 내 존재를 눈치챈 놈들이 없긴 한데.

‘많긴 많구나.’

시야가 확 트였다면 금방 파악했겠으나, 아쉽게도 수많은 나무와 수풀에 가려져 시야가 좁다.

시간을 들여 일일이 세야 할 것 같다.

여러 시간 동안 놈들의 숫자를 파악하는 건 지루한 일. 하지만 긴장은 풀 수가 없었다.

적의 규모를 아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응?’

뭔가 잘못됐다.

놈들은 많이 지나갔지만 만 명의 대군이라 하기에는 턱도 없는 숫자였다.

‘군을 나눴는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하긴 천씩 쪼개도 오크들이 와 있는 락을 제외하고 주변을 다 쓸어버릴 수 있는 규모인데, 굳이 만 명이 한 곳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어찌 됐든 싸워야 한단 말이지?’

최고의 시나리오는 사라졌으나, 어차피 전쟁은 각오했으니 큰 실망은 없다. 게다가 만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부담도 사라졌다.

어쩌면 이게 더 나은 시나리오가 될지도 몰랐다.

이제는 내가 할 일. 큰 문어 대가리만 따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샤르르르르르.

“우아아아아아!”

괴성과 함성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흐앗!”

기합과 함께 커다란 도끼를 휘둘러 문어 대가리를 그대로 반쪽 내는 그의 이름은 토니.

“다 죽어!”

다시 도끼를 휘두르는 그의 나이 쉰 중반에 가깝다. 보통 그 나이면 진작 은퇴하여 손자나 볼 텐데.

“이제 시작인데! 빠릿빠릿하게 굴어!”

하지만 혈관이 터져 나올 듯한 그의 팔 근육은 그가 쉰 중반의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게 만들었고, 그 함성 가운데 똑바로 전달되는 그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토니는 이를 악물며 도끼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찌 배운 건데! 왜 배운 건데!’

지금 이 순간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당시 나이 마흔다섯의 헌터.

소영주도 아닌 그냥 도련님이라 불렸던 작은 소년이 깨달음을 전해 줬다.

포스라는 것.

그 신비로운 힘을 처음으로 경험했을 때 느껴졌던 그 가슴 벅찬 떨림.

그때부터였다.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했다.

평생을 바라 왔던 그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는데, 어찌 썩히겠는가?

좋았다. 즐거웠다.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 노력이 통했던 걸까?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전진을 보였고, 토벌대에 참여할 때마다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언젠가 그 시그탑 경이 자신에게 너무 늦은 나이에 포스를 깨달아서 애석하다는 말을 슬쩍 흘렸을 때.

토니 본인에게는 그건 아쉬움이 아니라 엄청난 칭찬이었다.

살 만큼 산 그였다.

그랬었다면? 진작 뭐 했더라면? 그런 과거를 한탄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게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여하간 원래 솔선수범하여 자경단원들 사이에서 중심 중 하나였던 그가 이제는 완벽한 하나의 중심이 되었다.

원래라면 슬슬 뒷방 늙은이 취급받아야 했던 자신이 말이다.

왜 배웠는가?

왜 그리 재미있어 했던가?

왜 죽도록 노력했던가?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되는 질문이나 토니는 오늘 그 답변을 내놓을 수 있었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였다.

‘나도 어쩌면!’

나이 쉰이 훨씬 넘은 지금 야망이라는 게 생겼다.

‘될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사내들이 품는 그 로망. 그리고 현실에 부딪쳐 까맣게 잊어버리는 그 단어.

기사(騎士).

자신이 강해지는 걸 체감할수록, 토벌대에서 활약이 늘어 갈수록 토니에게 잊혔던,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그 단어가 자꾸 가슴에 맺히기 시작했다.

모든 의문의 해답은 그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안다.

많이 늦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안다.

이루기에 힘든 꿈이라는 것을.

하지만 예전에 불가능했었던 것보다는 힘든 수준이 훨씬 낫지 않느냔 말이다.

“우아아아아!”

그래서였다.

그야말로 혈기가 치솟아, 휘두르고 휘둘러도 지치지 않은 이유는. 죽음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앞에 나서서 위기에 처한 동료를 구하고, 거침없이 적을 반으로 쪼개는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은 말이다.

“힘이 남아돌아도 앞으로 나가지 마. 그냥 여기만 지키라고 했잖아!”

“옆쪽이 무너지고 있잖아! 같이 빠져나가기로 하지 않았어!”

토니 쪽이 미리 세워 둔 구덩이와 목책의 힘을 빌려 완벽하게 적을 막아 내고 있을 때 다른 쪽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전술의 이해도도 떨어지고, 훈련 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경험이 너무 없었다.

언제까지 싸워야 할지, 생각 이상으로 기세 좋게 적을 밀어내고 있는데 나아가야 할지, 물러나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럴 때 소규모 집단에서 지휘관의 필요성이 절실하나, 락에는 그걸 할 사람이 없었다.

그냥 훈련한 대로 싸우고 북소리에 다음 목책으로 후퇴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뚫고 들어오잖아! 일단 최대한 막으란 말이야!”

누군가가 기겁하며 소리쳤고, 실제로 목책을 넘어오며 인간을 베는 문어 대가리들이 있었다.

“물러나랏!”

그때 뛰어드는 사내가 있었다.

마스터 시그탑.

무리한 전술임에도 로라스가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

그건 락이 적의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무인을 보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대집단에서는 그 활약이 미미하나, 이렇게 잘게 전장을 분리시켰을 때 그들의 위력은 최대치의 효율을 발휘한다.

말 그대로 일당백이다.

그가 한 번 휘두르고, 찌르는 검을 막아 낼 적이 없으니 수십 단위의 적은 순식간에 쓸려 나간다.

아쉬운 게 있다면 뚫리는 곳이 많아 쉴 새 없이 움직여 진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일 뿐.

적이 최소 두세 배는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하나, 시그탑 정도의 무인을 이렇게 써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쉽긴 했다.

“북을 쳐라!”

그 모든 것을 성 위에서 보던 에듀의 목소리가 울렸다.

두우웅! 두우웅! 두우웅!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병력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진군보다 더 어려운 것이 후퇴다.

난전에 가까운 상황에서 적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쉽지 않다.

쿠오오오오오!

그 간격을 뒤에 서 있던 오크들이 전장에 끼어들어 메우기 시작했다.

인간보다 훨씬 좋은 신체와 힘을 보유한 그들에게 한 번 치고 물러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

‘대군이긴 하나 예상보다는 많지 않은데.’

일만에 가깝다고 했었다. 그런데 적의 숫자는 딱 그 절반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라스가 잘못 봤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건 사실.

‘뭐가 됐든 다행인 일이지.’

여전히 적이 훨씬 많았으나 만의 병력과 오천의 병력은 천지 차이.

에듀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려라!”

두우웅! 두우우우우우웅!

북소리가 길게 울리기 시작하자 오크들도 재빠르게 전장을 이탈했다.

그렇게 버티던 병력이 빠지니, 힘들게 만들었던 목책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단 한 번의 돌격을 막기 위한 용도다.

순식간에 목책을 파괴시킨 적들이 달려왔다.

락의 토성과 목책 사이에는 구덩이가 없다. 시간이 부족했다.

물론 그에 따른 대비책이 있었다.

샤르르르르르르.

잘 달려오던 한 무리의 적군들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푸른 불덩이가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강렬한 폭발과 함께 적들을 소멸시켰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적을 미끄러지게 하고, 에르자일이 그곳에 불덩이를 날리고 있었다.

적의 균형을 무너트릴 마법사들의 숫자가 적긴 했으나, 어차피 불덩이를 날릴 수 있는 사람은 에르자일밖에 없었다.

뭔가 엄청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비효율적인 전투였다.

에르자일의 주변에 쌓인 수북한 마정석들.

파이어볼의 마법은 은근 마나가 많이 소비된다. 에르자일의 마나가 원체 풍부하고, 내공을 익혀 소비를 줄이고는 있으나 저리 연신 마법을 시전하는 건 사실 불가능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그녀 곁에 있는 마정석들이다.

마정석 공급처 중 하나인 락이기에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미리 그려 둔 마나 증폭진에 마정석을 올려, 쉴 새 없이 마나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마정석의 효율을 극히 떨어지게 하는 방법이고, 한 해 농사나 다름없던 토벌로 인해 수거한 마정석을 대부분 사용하게 만들 터.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살아야 했기에 에듀는 과감하게 그런 결정을 내렸고.

‘인명 피해만 적기를!’

에듀는 다른 것 말고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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