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72)
“영주님, 무리가 있을 겁니다.”
드리블이 그리 조언했지만 에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필요해.”
평상시 에듀라면 드리블의 조언을 받아들였을 터다. 하지만 지금 무엇이 더 중한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물자야 원래 그들에게 받은 마정석, 가죽들이 있지 않은가. 어차피 그들에게 식량과 철무기들을 공급해야 해. 게다가 우리 영지민은 그들과 친숙해. 분위기가 이러면 외부인들도 금방 적응할 터.”
“그렇긴 합니다만…….”
“만에 하나 일만에 가까운 괴이한 놈들이 우리 쪽으로 오면 락의 인원만으로 막아 낼 수 있나?”
에듀가 무리해서라도 오크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 있었다.
“오크들은 기본적으로 전사들. 힘을 합치면 위기를 넘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확실히 도움은 되겠지요.”
“그게 우선 아니겠는가?”
에듀는 그리 결정지으며 시그탑과 브렌드를 보았다.
“시그탑.”
“네, 영주님.”
“자네가 직접 천년나무 부족을 맞아들이게. 이렇게 떠밀리듯이 왔지만 락의 최강자인 자네가 나서서 맞아야,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거야.”
“알겠습니다.”
“브렌드.”
“네. 하명하십시오.”
“들었을 테니 뭘 해야 할지 알 거야. 모든 사내들을 집결시켜. 목책에 진흙을 발라 보수하고, 훈련시키게. 아픈 이들을 빼고 모두 나서야 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에듀는 다시 드리블을 보며 말했다.
“주변 영지에 급히 전령을 보내. 이 사태를 알리고 단단히 준비해야 할 거라 일러 줘. 락에 모여 폭우를 피해도 된다고 해도 되겠지.”
에듀의 빠른 명령에 세 명의 기사가 급히 밖으로 나갔다.
“로라스, 네 덕분에 미리 알았구나. 안 그랬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할 뻔했다.”
“아버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락은 수비에 적당한 지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대군을 막기에는 목책 또한 무용지물에 가깝습니다. 차라리 피하심이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가자는 말이냐?”
“아버님 말씀대로 폭우를 피하자는 겁니다. 집은 돌아와서 다시 손보면 됩니다.”
로라스의 말에 에듀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납득할 수 없구나. 귀족이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도망가는 법은 없다. 게다가 이 많은 인원이 어디로? 오크 난민들도 받은 상황이다. 갈 수도 없을뿐더러 갈 데도 없다.”
로라스는 생각했다.
‘예상대로네.’
이 세계는 땅에, 그리고 그 역사에 너무 집착한다.
귀족의 성, 미들네임이 자신의 출신 지역과 그 가문의 역사를 나타내긴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칠 때가 있다.
허울뿐인 명예에 목숨을 거는 기사들과 다를 게 조금도 없다.
물론 사회적으로 오래 구축되어 온 전통이라 이해도 되긴 하지만 미련한 건 변하지 않는다.
에듀의 말도 틀린 건 없다. 특히 오크들을 받아들인 이상 그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친분이 있는 락도 고민인데 다른 영지들은 오죽할까?
그래도 말을 꺼낸 이유는 하나다.
“그럼 에렌과 와디아에도 사람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것이다. 그리고 에렌으로 가는 임무는 네가 맡았으면 하는구나.”
“제가 말입니까?”
에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제일 적격자일 듯하구나. 원군을 데리고 오너라.”
“아버님, 저는 남아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로라스의 대답에 에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런 에듀의 표정을 보며 로라스는 그의 속내를 짐작했다.
‘그런 겁니까, 아버지.’
로라스의 의문은 에듀의 다음 말로 확인할 수 있었다.
“네가 가는 게 맞아. 에렌에서 원군을 끌어올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너뿐. 그런데 내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 않으냐. 갈 때 네 엄마도 함께 가거라.”
확실했다.
에듀는 로라스와 메어리를 피신시키려 하고 있었다.
‘하아!’
로라스는 속으로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이런 부분에서는…… 아버지란 말이지.’
로라스는 감정의 동요 때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누구보다 공정했던 당신께서도…….’
“그리하거라. 오늘이라도 당장 출발하는 게 낫겠구나.”
“아버지, 그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저입니다. 제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비 명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짐짓 화를 내 보이는 에듀를 보며 로라스는 단호히 대답했다.
“백 번, 천 번이라도 따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락에 더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
“아버지, 냉철해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만 생각하셔야 합니다. 전력이 조금이라도 아쉬운 이 상황에서 저를 보내시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닙니다.”
“만약 정말 몬스터들이 락으로 내려오면 너 하나 있고 없고로 승패가 결정될 전투는 아닐 것이다.”
“아뇨. 제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클 겁니다. 정말 놈들이 이곳으로 왔을 때 그걸 증명할 것입니다.”
에듀의 안면이 떨리기 시작했다.
싸우고 있는 것이리라.
영주로서의 자신과, 아비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말이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무림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자신의 실력을 숨겨라.
이 세계에서 로라스는 본능적으로 그리해 왔다. 누구도 자신의 진실한 힘을 알지 못했다.
에르자일과 번천도 7할 이상을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 생각했다.
로라스는 에듀의 지금 표정을, 고민을 보기 싫었다. 그런 이유로 커터를 앞에 내밀었다.
에듀는 뭔가 싶어 커터와 로라스를 번갈아 봤다.
로라스는 내력을 운용했다.
커터의 날에 푸른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사실 효율적으로 내력을 운용함에 있어 이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효율이 아니라 자신의 전력을 보여 줘야 하는 상황.
푸른 빛이 커터를 점점 뒤덮기 시작했고, 에듀의 표정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열기처럼 느껴지는 아지랑이가 아닌 빛을 뿜어냈다. 그것도 창날의 전부에서 말이다.
“로라스, 너…….”
예측은 했다.
자신보다 더 재능이 있는 아이. 시그탑과 대련이 가능하고,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정도로 완성되어 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작 스물이다.
“언제부터였더냐?”
그런데 시그탑의 수준과 같은 포스를 뽑아내고 있었다.
마스터 시그탑 말이다.
“제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은 없을 겁니다.”
에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에렌으로 원군을 요청하는 전령이 출발했다. 물론 로라스는 아니었다.
* * *
락은 정신없이 바빴다.
목책에 흙을 바르는 작업은 엄청나게 손이 가는 일이다.
산이 가까워 흙을 조달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락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하니 진척이 보이기 시작했다.
병사들과 기존의 자경단원들은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기를 각오했다. 그리고 마을을 중심으로 목책은 물론이고 함정을 파기 시작했다.
전쟁 준비는 해도 해도 부족했으나 모두가 열정적으로 그 일에 달려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 떠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내던져 버리고 인사 없이 도망치듯 가는 사람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새로 락에 들어왔던 사람들이었다.
기존 영지민들은 투쟁의 의지에 물을 끼얹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목숨 소중한 것은 본인 스스로들이 알았다. 자신들은 모든 생활 기반이 락에 있기에 지키려고 하는 것뿐.
그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들도 그 상황이라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락은 원래 그런 땅이었다.
보통 의지로는 버틸 수 없는, 그리고 서로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땅.
“모두 기록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다시 돌아왔을 때, 여태 제공했던 혜택을 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소영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로라스의 말에 드리블은 잠시 망설였다.
“논란이 많을 겁니다.”
“목숨 걸고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영지민과 도망친 영지민을 같은 취급 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가장 기본적인 겁니다.”
명예에 목숨 거는 귀족과는 달라야 했다.
실리를 추구해야 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 했다.
차별?
차별이 아니다.
권리에는 의무가 동반되고, 의무 없이 권리만을 챙기는 사람에게 불이득을 주는 건 차별이 아니다.
그게 차별이라면 기꺼이 차별해 줄 생각이었다.
로라스는 영지민들에게 그 생각을 강조했다.
에듀와 상의 끝에 이번 전투가 끝난 후, 모든 이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는 것을 발표했다.
‘뭐든 이득이 따라야지.’
의무 없이 권리만을 챙기려는 것도 문제지만, 권리 없이 의무만을 요구하는 것도 문제다. 그리고 수많은 영주들이 영지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그래도 되는 세상이다.
락은 그나마 에듀가 영주이니 영지민들에게 이득의 분배를 챙겨 줬지만 로라스는 그것을 정확히 명시했다.
영주가 알아서 챙겨 주는 게 아니라, 목숨 건 대가는 반드시 있을 거라는 약속.
후에 락의 재정이 그것을 뒷받침해 줄지, 못할지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는 게 우선.
어찌 됐든 그 발표에 영지민들의 사기가 오른 게 중요한 것이다.
오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목책을 넓히는 과정에서 소와 말의 도움 없이 나무를 베어 오는 건 그들의 몫이었다.
거력을 타고났는지라 셋이면 커다란 나무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는 신기를 보여 줬다.
에듀는 천년나무 부족과 정식으로 동맹을 맺었다.
양쪽에서 우려의 소리가 조금씩은 있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원래 하늘 산맥과 인간 세상의 정보 교류가 있었고, 특히 오크들이 수집한 마정석이나 가죽들을 락에서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대신 팔아 주고 있는 상황이다.
혈맹 수준까지는 아니나 10년 이상을 충분히 서로 신뢰하는 관계라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 전쟁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을 때,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베론 남작님, 어서 오십시오!”
“에듀 남작님, 저희를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야말로 이리 와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락과 비슷한 처지의 영지인 스톤 영지의 남작인 베론이 수백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락에 온 것이다.
기사는 단 한 명에 고작 열여섯 명의 병사뿐인 전력이지만, 새로운 원군은 심리적으로 아군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게다가 사람 손 하나가 더 아쉬운 판국이 아닌가.
스톤의 영지민들도 목책을 늘리고 함정을 파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
“다른 분들은 오지 않으셨습니까?”
베론의 물음에 에듀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제각기 준비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아. 그 몬스터들이 어디로 올지 모르니 하나로 뭉치는 것이 좋을 텐데…….”
베론이 한숨을 쉬며 하는 말에 에듀가 말했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반신반의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주변 영지 중에서 하늘 산맥으로 토벌 가는 건 락이 유일한데, 남작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서…….”
“무슨 방법이 있겠지요.”
에듀는 그리 말했지만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알린 소식에 전쟁 준비까지 하는 영지는 극소수일 것이다.
아무 대책 없이 락이 잘못된 정보를 알려 왔겠지, 사실이어도 막연하게 우리 쪽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할 공산이 컸다.
오히려 이렇게 락으로 모든 영지민들을 피난시킨 베론이 특이한 케이스이리라.
“망신을 당해도 좋으니 잘못 봤고, 그냥 이대로 물러났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에듀의 이어지는 말에 베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 대군이 존재한다는 게 확실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에듀는 베론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것들은 분명 하늘 산맥 아래까지 내려올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