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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70화 (70/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70)

처음에는 좋았다.

샤르르를 죽여서 오크들이 더 많이 보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샤르르의 숫자는 줄어든 게 아니었다. 오히려 줄어든 건 오크들이었고.

샤르르르르르르르르르!

곳곳에서 난전을 펼치느라 놈들의 대군이 주변을 포위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포위당한 오크들이 중앙으로, 중앙으로 몰리는 바람에 주변이 온통 오크들이었을 뿐이다.

산의 위아래 보이는 것은 놈들뿐.

이런 대규모 전투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포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래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활로를 뚫어야 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에르자일이나 번천, 그리고 오크들 중 그 누구도 그런 지식이 없었다.

어! 어! 어! 하는 사이 서로와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 뿐이다.

쿠오오오오오!

그 누구보다 용감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적들을 도륙해 냈던 오크들의 대장.

여전히 힘이 넘치는 듯 적들을 베어 넘기고 있으나, 괴수들은 여태 쓰러트린 것 이상의 숫자가 남아 있었다.

‘그거나 써 볼까?’

에르자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직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6클래스 마법. 불의 장벽.

평상시라면 마나 역류가 두려워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지만, 어차피 여기서 죽는 거라면.

‘한번 해 봐도 나쁘지 않잖아!’

죽음을 초월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상황에서도 에르자일은 지극하게 냉정해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지팡이를 들고 룬어를 외우는 데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

그녀의 지팡이에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하얀빛이 피어올랐다. 워낙 강력해서 주변의 오크들이 순간 실명했을 정도다.

에르자일의 빛은 전장에 퍼져 나갔다.

본디 빛이란 나아갈수록 그 강렬함이 약해지는 법이나, 그녀의 빛은 그러지 않았다.

강렬한 빛에 오크들은 물론이고 샤르르들도 무슨 일인지 시선을 돌릴 법했지만 감히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다 데리고 가야지!’

에르자일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 결정에 어떤 망설임도 없이 시전해 갔다.

빛은 마침내 전장을 감쌌다. 그 빛의 질량과 크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여 산 하나를 광산(光山)으로 만들 정도였다.

“타아안!”

그리고 준비했던 마법을 그대로 세상 밖으로 표출시켰다.

빛은 중앙에서 외부로 광폭하게 밀려 나가고, 그 테두리에 집중하였다.

퍼어어어엉!

집중된 빛은 스스로 열을 발하더니 마침내 불로 화했다.

끄르르륵!

에르자일의 몸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배고파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전신의 내부를 뭔가가 긁어내고, 쥐어짜는 소리다.

조금만 더 하면 그대로 마나 역류임을 직감했으나, 에르자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마지막 룬을 읊조렸다.

모이고 모여 발화한 것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앙!

단 한순간에 빛의 고리는 불의 고리로 바뀌었다. 이윽고 화마(火魔)로 변하여 모든 것을 태워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쿨럭쿨럭.

동시에 에르자일은 입에서 검붉은 피를 연신 토해 냈다. 하지만 시선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머물러 있었다.

‘아쉽네. 이게 될 줄 알았다면…….’

엄청난 마법을 시전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죽기 전 그냥 해 본 것뿐.

그런데 그것을 성공시켰다.

이론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6클래스 마법을 성공시킬 줄 알았다면 진작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볼걸, 살짝 아쉬움이 드는 그녀였다.

“에르자일 님.”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번천이 급히 다가왔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으음. 괜히 번천 님을 끌어들여 이 꼴을 만들어 냈네요.”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오자고 했잖아요. 많이 미안해요. 이건 진심이에요.”

뭔가 뚱딴지같은 소리였지만, 번천은 그녀가 가끔 묘하게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미안해하는 그 진심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걸로 됐지 않은가?

“제가 미련해서 이런 상황을 만든 겁니다. 그리고 우리 안 죽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활로를 뚫을 겁니다.”

번천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도 알았다. 에르자일이 목숨을 걸고 쓴 마법이다.

아마도 지극히 운 좋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을 것이다.

쿠오오오오오!

하지만 안에서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공멸의 마법을 모르고 적의 후방 혼란을 기회 삼아 달려드는 오크들.

후방의 혼란 때문일까?

오크들은 포위망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뒤에 엄청난 불길이 자리 잡은 걸 실제로 확인했다.

하지만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을 뿐, 아랑곳하지 않고 싸움을 계속했다.

‘아!’

그때 에르자일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오크들의 기본 속성은 불이라는 것. 그들은 천성적으로 불에 대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온전하게 불의 피해를 막는 건 아니나, 불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사실. 살아날 확률도 더 높다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처절한 혈전과 난전 속에 약간의 희망이 보였다. 자신은 그렇다 하더라도, 번천은 물마법도 익혔으니 잘하면 빠져나갈 길이 있을 거라 봤다.

“번천 님.”

에르자일이 그에게 검 대신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혼자라도 빠져나가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휘르르르르!

오크가 진격한 방향의 불의 장벽에서 소용돌이가 치더니 하늘 높이 용오름 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소리와 광경에 잠시 싸움이 느려질 정도였다.

‘불의 장벽이…….’

에르자일은 깜짝 놀랐다.

장벽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극히 적은 폭이지만 무너져 버린 것이다.

‘누가!’

자신의 마법을 디스펠로 되돌리거나 소멸시키려면 최소한 자신과 동급, 또는 그 이상의 마나를 가져야 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미련함을 탓했다.

이 장소에서 이런 위력을 발휘할 사람, 그리고 일부러 불의 장벽에 구멍을 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냔 말이다.

“로라스!”

에르자일은 구멍을 낸 장본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 * *

‘알고는 있었는데.’

로라스는 빠르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늘 산맥에 관해서 들었다.

그중에서도 공간 왜곡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니, 아는 길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친숙해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것을 망각했다.

‘느슨해진 모양이다.’

계속되는 성취감에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했다.

무슨 일이든 정성을 다하는 것.

인생의 지표로 삼기로 하지 않았는가!

로라스의 눈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내력을 소모하나 더 이상 왜곡된 공간이 줄어들었다.

발을 내디뎌야 할 곳에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도를 올리기 올렸다.

자신마저 현혹되었으니 번천과 에르자일도 비슷한 상황일 터.

구슬은 강렬한 빛을 발하며 그들이 가까이 있는 것을 알렸고, 로라스의 귀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저것들은!’

산을 오르니 로라스의 눈에 수많은 문어 대가리들이 들어왔고, 그 중앙에 번천과 에르자일이 보였다.

‘오크?’

또 그들과 함께 문어 대가리들에 대항하는 오크가 들어왔다.

인지하는 순간 로라스는 신법을 전개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산 두 개를 넘어야 있는 전장.

어찌 된 상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달려서 그들의 곁으로 가야 했다.

그야말로 귀신이라 할 정도의 속도로 로라스는 산을 넘었고, 또 하나의 산의 넘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젠장!’

산 정상에 이르기 전에 중간에 절벽이 가로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절벽의 폭이 너무 넓어 경공으로 넘기에도 불가능했다. 고민은 필요 없다.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산을 우회해서 올라간다.

전투의 규모로 보아 충분치는 않으나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리라.

결국 그리 산을 넘고, 산 중턱에서 벌어지는 전장을 보며 다시 오르려 할 때였다.

빛의 형성, 확산 그리고 폭발.

하늘 산맥 공간의 일그러짐을 꿰뚫기 위해 안력을 키우던 로라스가 고개를 돌려야 할 정도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불의 장벽?’

로라스는 빛의 고리를 보며 그것이 생각났고, 그 순간 곧바로 불길이 치솟았다.

‘에르자일!’

로라스는 이 마법이 어떤 것인지 안다. 에르자일이 흥미로워하던 그 마법. 아직은 경지가 되지 않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 마법이었다.

로라스는 커터를 굳게 잡았다.

개천지보를 십 할 끌어 올리며 커터를 전방으로 내밀었다.

“후우우!”

커터에 내력을 담는 순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푸른 빛이 어렸다.

뚫을 생각이었다.

천왕검 제삼초. 개지대해(開之大海).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천왕검의 초식을 펼쳤다.

들고 있는 건 창이나 로라스의 경지에서 손에 든 무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내력을 응집하여 그것을 원하는 방향으로 풀 수 있는 수단일 뿐.

짙푸른 빛은 시뻘건 빛에 부딪치기 시작했고, 금세 서로 얽혀 들었다.

“하아아!”

로라스의 입에서 기합이 터지자 그것은 회전하더니 하늘로 치솟았다.

원래라면 개지대해의 힘으로 전방을 쓸어야 정상이나, 안쪽의 상황을 정확히 모르니 혹시나 하여 하늘로 그 힘을 돌린 것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쓴 초식이나 로라스는 무리를 느끼지 못했다.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그것을 허공으로 날려 버릴 뿐이었다.

‘문어 대가리들!’

뚫린 구멍으로 문어 대가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는 것이 보였다.

‘피아 구분이 확실해서 좋네.’

로라스는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문어 대가리들을 향해 나아갔다.

들고 있던 검과 창 등이 일제히 로라스를 향했다. 그리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퇴로가 열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로라스는 단숨에 그들을 돌파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오히려 몸을 뒤로 빼냈다.

‘이놈들 수백을 쳐 죽이는 것보다 번천과 에르자일을 살리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였다. 뒤로 빠진 것은 말이다.

로라스는 전쟁, 즉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 어떤 것인지 안다. 왜 모르겠는가?

중원 통일을 위해 수많은 전장에 섰던 사람이 바로 유역후다.

문어 대가리의 숫자는 많았고, 오크들의 숫자는 적다.

집단과 집단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숫자. 그것을 좀 균등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퇴로가 열림으로써 문어 대가리들의 진형은 후방부터 무너지게 될 터.

학살은 놈들의 진형이 충분히 흐트러진 이후부터다.

과연 로라스가 만든 구멍을 통해 쉴 새 없이 문어 대가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와중에 넘어져 밟히고, 밀려 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놈들이 있었음에도 정말 물밀듯이 몰려 나왔다.

불에 대한 공포가 심한 걸까?

나온 놈들은 로라스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그렇게 퇴로로 나오는 놈들의 기세가 줄어들었을 때, 안쪽에서 괴음이 들렸다.

생각대로 놈들의 진형이 붕괴되고 있을 거란 예측이 가능했다. 그래서 오크들이 힘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로라스가 진입한 건 그때였다.

아직 나오는 놈들이 있으나, 커터를 한 번이라도 막아 내는 놈은 없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와 전장을 확인했다.

‘엉망이군.’

로라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전투를 하고 있었던가.

진형을 무너트렸는데 오크들의 진형도 그리 썩 좋아 보이지 않았고, 지금도 곳곳에서 전투를 하지만 응집력이 없다. 그나마 이쪽으로 힘이 쏠리긴 했는데, 중앙에 몰려 있는 꼴이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지휘관이 없군!’

로라스는 그리 단정했다.

군의 중간급 지휘관 한 명만 있어도 이런 전투는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쿠오오오오!

소리만 냅다 지르는, 다른 오크들에 비해 두 배의 덩치를 지닌 저놈이 대장인 듯 보였다.

“멍청아!”

로라스는 그를 보며 냅다 그리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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