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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69화 (69/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69)

괴수와 청년 그리고 번천과 에르자일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것도 잠시.

“맞아?”

재차 묻는 에르자일의 말에 청년은 괴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괴수가 몸을 수그려 청년의 손에 머리를 갖다 대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흑. 가만히 있어.”

청년은 손으로 괴수의 머리를 토닥이듯이 두드렸다. 그러고는 에르자일에게 말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말했잖아. 청발, 청안, 그리고 괴수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조련 마스터들은 많지만 그런 외모가 아니고, 그런 외모는 있지만 조련 마스터는 아니거든.”

“으음. 이름을 그렇게도 아는군.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 할 시간이 없다. 내려가라, 인간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말할 시간이 없대도. 인간들은 내려가. 죽을지도 모른다.”

“혹시 마물들하고 싸우는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러다 죽어. 돌아가.”

프라일로 밝혀진 청년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하고는 번천에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 흑아에게 상처를 입힌 건 이해해 준다. 하지만 다음에는 용서치 않아!”

“흑아? 저 괴수 말인가? 살기 위해서 한 행동에 대해 뭐라 듣고 싶지는 않는데!”

뭔가 명령조에 번천이 발끈하자 프라일이 말했다.

“흑아는 내가 지키라는 곳을 지켰을 뿐 인간에게는 절대 먼저 덤비지 않아. 당신이 먼저 공격했다. 아냐?”

틀린 말은 아니다.

선수 필승. 두 마리의 괴수를 앞에 두고 기세까지 뺏길 수 없어 먼저 유리한 고지에 자리 잡고 싸웠다.

“당신은 강하다. 하지만 흑아가 여길 지키느라 그렇지, 숲속에서 싸우면 죽었어.”

번천이 다시 뭐라 하려는 순간 그의 소매를 잡는 사람이 있었다.

“저 사람과 싸워서는 안 돼요.”

에르자일이 번천에게 귓속말하듯 말하고는 그의 앞으로 나서며 프라일에게 말했다.

“바쁜 일이 있다고 하니 서로 할 일을 하죠.”

결국 내려가지 않는다는 말에 프라일은 에르자일을 잠깐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든가. 하지만 난 경고했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지는 그를 보며 번천이 물었다.

“어떤 사람입니까?”

“프라일 사일런스. 메타린 평야의 지배자.”

“메타린 평야…… 지배자요?”

번천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메타린 평야는 이 산맥과 함께 인간이 들어가서는 안 될 금지 구역. 그런 곳의 지배자라니, 무슨 뜻이냔 말이다.

“나도 책에서만 봤어요. 그런데 실제로 만날 줄이야.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줄게요. 일단은 내려가야 할 것 같아요.”

“신수의 추적은 포기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 사람이 나타난 걸 봤을 때, 아마도 신수의 주인은 그가 아닐까 싶어요. 게다가 경고도 마음에 걸리고.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니.”

번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신수에 대한 호기심만 있을 뿐, 자신에게 크게 의미는 없었다. 에르자일이 내려가자고 하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노멀존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았는가.

두 사람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라온 길을 되돌아가면 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분명 그리 생각했는데 말이다.

번천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에르자일은 그냥 산을 올랐겠지만 자신은 아니다.

이런 산에서 길을 잃는 게 얼마나 쉬운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올라오면서 눈과 손을 쉬지 않았었다.

특징을 파악하면 나뭇가지를 꺾거나 흠집을 남기면서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방향감각이 상실되기 시작했다.

번천과 에르자일 둘은 몰랐다.

하늘 산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아무래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지요?”

이틀째 되서야 에르자일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번천은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올랐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아니다.

에르자일도 이미 하늘 산맥에 두 번이나 올라온 경험자. 이 산맥에서 거리 감각을 상실케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 역시 유심히 주변을 살피며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

그들은 알아야 했다.

마을 주변 산맥을 훤히 보는 락의 사람들도 노멀존을 벗어나는 것을 금기 사항으로 여기는지, 또 가끔 벗어난다 해도 철저한 준비를 하는지 말이다.

그나마 두 사람에게 다행인 게 있다면 아직 먹을 것이 남아 있고, 몸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몇 번 몬스터와 조우했지만 별다른 위기 없이, 마정석까지 챙길 정도로 말이다.

번천이 말했다.

“길을 잃은 것이 확실하면 그 자리에서 구조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올라온 건 주군이 아시고, 영지에서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보다 더 확실한 게 있어요.”

에르자일이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며 말했다.

“산맥에서 나침반은 사용할 수 없지만 이건 되니까요.”

“그게 뭡니까?”

“로라스에게 가는 마법 구슬요.”

에르자일이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건 이 구슬의 존재 때문이다.

“이제는 이 구슬이 이끄는 방향대로 가지요. 로라스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내려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다시 새로운 힘을 넣을 때였다.

사르르르르르르.

바람 소리와 비슷하나 바람 소리가 아님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소리. 마치 하나의 바람을 수십, 수백 가닥 나눠 몰아넣으면 나올 만한 그런 소리.

번천과 에르자일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지금 저 산 밑에서 올라오는 생전 처음 보는 저것들을 아느냐고.

둘 다 모른다고 눈빛으로 대답하는 순간.

샤르르르르르!

그것들은 그런 소리를 내면서 곧바로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동그랗고 흐느적거리는 그들의 머리통이 바람에 맞부딪쳐 물결치는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는커녕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번천이 두 손을 내밀어 에르자일을 덥석 안은 것도 그때였다.

“으악!”

번천은 깜짝 놀라는 에르자일에게 어떤 말도 없이, 그대로 어깨에 짊어지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괴이한 놈들의 숫자가 백이 넘어갔고, 갑주까지 걸치고 있었다.

이런 건 싸워 볼 필요도 없다. 일단 도망치는 게 우선이다.

번천은 순간 싸한 기분을 느꼈다.

괴이한 놈들은 자신들을 쫓아왔으나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느낌.

그 싸한 기분은 맞아떨어졌다.

샤르르르르르.

도망치고 있는 방향의 좌측에서 똑같은 놈들의 무리가 보였다.

“시부럴!”

번천은 용병이었다. 지금껏 거친 삶을 살아왔다. 락에 들어와서 로라스를 주군으로 삼은 후 모든 속어를 버리려 노력했고, 에르자일이 있을 때는 절대 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번천이 에르자일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자일 님, 제가 버티고 있을 때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번천 님?”

“이 번천, 목숨을 걸고 구멍을 낼 겁니다. 포위망이 두껍지는 않지만 기회는 있을 테니…… 꼭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주군께 면목이 섭니다.”

주군은 자신을 믿고 에르자일의 호위를 맡겼다.

번천은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복수를 하지 못함이 아쉽긴 하나 로라스의 수하로 몇 년간 사람답게, 또한 희망을 품고 살았음에 만족하기로 했다.

“꼭 살아 나가셔야 합니다!”

번천이 죽음을 각오하며 검을 들어 얼굴 옆에 세울 때였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에르자일이 들고 있던 지팡이가 울리며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번천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지팡이가 곧게 그것들을 가리키는 순간.

퍼어어엉! 퍼어어엉!

폭음과 함께 지면이 터져 나갔다.

샤르르르르.

그 폭발에 그것들도 휘말리기 시작했다.

번천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에르자일이 훌륭한 마법사라는 것을. 그것도 국가에서 전략무기 취급당하는 5클래스의 마법사라는 것을 말이다.

보통 마법사들은 자신의 주 속성이 있고, 특기가 있다. 또한 다수를 상대로 하는 마법과 개인을 상대로 하는 마법이 나뉜다.

에르자일은 불이 주 속성이고, 그중에서 공격 마법에 특화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다수, 개인 다 능수능란했으나 특히 광역 마법은 더 신경을 써서 수련해 왔다.

그녀의 스승은 헤르메스였고, 헤르메스는 그의 주인인 베스타인 공작을 따라 백전 이상의 전쟁을 치렀던 전장의 마법사.

그녀의 제자인 에르자일이 그녀와 닮은 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대형 마물을 상대로 할 때는 그 압도적인 힘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 같은 상황. 게다가 거리가 있고, 곁을 지켜 주는 호위무사가 있을 때 그녀의 능력은 100% 개화된다.

까만 밤하늘에 붉은 빛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로라스에게 배운 심법이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는 과정 하나를 생략하게 만들어 줬다. 그 덕분에 원래 빠른 그녀의 시전 속도는 그야말로 사기적으로 변했다.

마나가 부족하지도 않았다.

깨달음이 부족하여 5클래스가 되지 못했을 뿐이지, 에렌에 있을 때도 마나력만큼은 충분했다.

에르자일은 왜 전략무기로 구분되는 마법사인지 여지없이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번천은 처음에는 입을 벌린 채 지켜보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시전한 불꽃 샤워를 뚫고 올라온 기괴한 것들을 베었다.

그 숫자가 엄청난 게 문제일 뿐이지, 이렇게 한두 마리가 올라오는 건 번천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순식간에 정리되고 있을 때쯤이었다.

꾸오오오오오오오!

산 너머에서 커다란 괴성이 들린다.

번천은 그런 함성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예전 용병으로 전쟁에 참여했을 때, 다른 용병대에 오크전사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오크가 냈던 괴성이었다.

‘오크는 그래도 말이 통하니…….’

번천은 새로운 적이 아니라는 것에 안심했다.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나, 브렌드에게 락과 산맥 오크 부족이 교류가 있다는 말은 분명 들었다.

최소한 괴이한 것들처럼 다짜고짜 공격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을 때.

“번천 님, 이번에는 정말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요.”

에르자일도 번천이 보는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거기에는 수많은 괴이한 것들과 한 집단의 오크들이 싸우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 * *

쿠오오오오오오!

신기한 일이었다.

같은 오크의 함성이었는데, 처음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들려온다.

분명 포위당하고 중앙으로 점점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마법은 노래로 시작되었다더니.’

에르자일은 전방으로 뛰쳐나가며 그야말로 적을 도륙하고 있는 대장 오크를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처음에 들었을 때와 달리 지금 영향을 받는 건, 아마 저 대장 오크와 한편이라는 인식 때문일 터.

‘연구해 볼 가치가 있어.’

이 상황에서도 마법에 대해 생각하는 에르자일.

‘살 수 있다면 말이지.’

그와 동시에 현실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정말 많은 놈들을 폭사시켰다 생각했음에도 여전히 그 숫자는 많았다.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처음 오크의 고함 소리가 들렸을 때만 해도 빨리 이 자리를 피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피한다고 피한 것이 오크와 샤르르 소리를 내는 괴물의 전장 한복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찌할 줄 몰라 할 때 번천이 과감하게 움직여 샤르르의 목을 날려 오크를 구했다는 것이다.

―적이 아니면 아군인 전장에서 구경꾼 노릇이나 하려다가는 양쪽에서 공격당합니다.

번천은 그리 말하며 오크 편에 서서 목숨을 걸고 샤르르의 머리를 날리기 시작했고, 그 의미를 빠르게 깨달은 에르자일 역시 광역 마법을 날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등장, 그리고 엄청난 활약에 주변 오크들은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그들을 아군으로 받아들였다.

대체 뭔지도 모른 놈들보다는 그래도 보거나 들은 적이 있던 인간들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부터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전이 펼쳐졌다.

전후좌우 싸우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대체 전장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에 점점 많은 숫자의 오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긴 것인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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