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67)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걸까? 아니면 이곳에서 인간이란 존재를 처음 봐서일까?
괴물은 자신보다 훨씬 작은 두 사람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도 굳이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놈들이 그냥 돌아가는 게 그들에게는 최고의 상황일 터.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검은 괴물은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그쳤다.
‘이대로 돌아가려나 보다!’
‘그냥 가라!’
두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때 검은 괴물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같은 생김새의 놈이 한 마리 더 나타났다.
“젠장!”
번천은 참았던 말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추종술.
말 그대로 쫓아 나간다는 뜻으로, 사실 흔히 접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로라스 역시 특별히 그것을 배워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는 눈이 좋았다. 게다가 길 없는 산속이니 움직였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았으리라.
‘그런데 없잖아.’
추적은 쉽지 않았다.
움직였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았어야 하는데, 그것이 도통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나마 드문드문 드는 이질감이 아니었다면 추적을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쫓는 이가 정말 고수이거나, 산을 정말 잘 타는 사람이란 뜻이다.
일단 로라스는 전자에 더 비중을 두었다.
세상에 기인은 많다지만 조공으로 나무에 그런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권신 에르페유가 다른 마스터들보다 특별한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좋은 무기를 두고, 손가락을 그 정도로 단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였다.
신수가 아닌 사람의 흔적을 쫓는 이유는 말이다.
‘혹시 나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자신에게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남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이거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한데…….’
벌써 사흘째다.
번천과 에르자일의 조합이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의 거리가 너무 떨어지는 것도 경계해야 했다.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하늘 산맥이다.
그나마 에르자일이 건네준 작은 공같이 생긴 마법 도구가 서로의 위치를 찾게 해 주기 때문에, 다시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게다가 신호가 일정하게 이어지는 것을 보니 의외로 일행과 멀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틀만. 그때까지 못 찾으면 포기한다.’
궁금은 하나 일행의 안전이 우선이다. 선후가 뭔지는 잘 알고 있다.
다시 밤이 되었다.
산은 춥다.
게다가 겨울 아닌가.
두꺼운 망토를 둘렀다 하나 지금 이 산맥에서 망토 정도는 그냥 바람막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법을 사용해 불을 피우고, 운기조식을 하여 몸의 온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서늘함이 가득한 것이 다른 사람이라면 꼼짝없이 동사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터.
‘무모하긴 했지. 이 정도로 준비 없이 올랐으니.’
겨울 산맥에 오르는 거 자체가 미친 짓이고, 올랐다면 철저히 준비를 해야 했을 것이나 지금은 꼴랑 배낭 하나에 건량과 마른 옷가지 한 벌, 물 등이 조금 담겨 있을 뿐이다.
‘무리하지 말아야 할 텐데.’
겨울 산맥의 무서움은 번천도 알고 있을 테니 알아서 조절하겠지만 녀석은 에르자일에게 약하다.
어쩌면 죽은 여동생을 에르자일에게 투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그래서 무리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잡것들이 왜 이리 많아!’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옆에 세워 둔 커터를 잡았다.
노멀존이 아니라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마물들과 지나치게 조우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다.
겨울의 하늘 산맥은 인간에게만 혹독한 것이 아니라, 마물들에게도 혹독하다.
곰이 겨울잠을 자듯이 마물들도 동면에 들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겨울을 난다.
그런데 지금 시간에 움직이는 것들은 뭐란 말인가?
휴식을 방해한 탓에 짜증이 몰려왔고, 그 짜증은 그대로 커터에게 깃들었다.
끼이이. 끼이이!
괴성과 함께 어린애만 한 몸통에 조잡한 쇠붙이를 들고 다니는 놈들이 등장했다.
마물 중에서는 최약체로 손꼽히는 코르보르라 불리는 놈들이었다.
성인 남성이라면 한 마리 정도는 너끈히 감당할 수 있는 놈들이나, 하늘 산맥에서 놈들이 버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끼이이! 끼아! 끼이이!
사방을 가득 채우는 놈들의 괴음을 들으면 알 수 있듯이 놈들은 그 흔한 레지온보다 더 많은 개체 수를 자랑한다. 그리고 집단으로 움직인다.
‘지능이 있는 놈들인데…… 좀 이상하군.’
짜증이 남에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놈들은 집단이고, 이곳은 경사가 심하다. 포위 사냥하기에는 썩 좋은 장소가 아니다.
‘하긴 겨울에, 그리고 이 시간에 움직이는 것 자체가…….’
로라스는 기왕 이렇게 된 거 몸이나 좀 쓸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계속 걷기만 했더니, 안 쓰는 근육들도 좀 놀려 줄 필요가 있다.
마침내 코르보르들이 산 위에서 로라스 쪽을 향해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스으윽!
커터가 예리한 건지, 겨울이라 영양을 충분치 섭취하지 못한 탓에 놈들이 너무 작아서인지, 베는 손맛이 영 개운치 않다. 그래도 몸에 열을 좀 낼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커터를 휘두르는 순간 이상한 것이 있었다.
‘이놈들. 달려 내려오는 게 아니라 밀려 내려오는 건데.’
한마디로 자신을 사냥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쪽을 향해 도망치는 것이다.
주변을 지나치는 다른 놈들을 보면 더더욱 그랬다.
‘이 주변에 코르보르들을 밀어낼 만한 개체가 있나?’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놈들은 집단으로 움직이는 데다 지능까지 있다. 사냥을 나왔을 때보다, 스스로의 부족을 방어하는 데 더 유리하다.
그러니 하늘 산맥에서 버틸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코르보르들이 이 시기에, 그리고 이 시간에 집단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로라스는 그대로 앉아 방패에 몸을 기대어 다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몸을 푸는 건, 더 강한 놈이 나와도 늦지 않다.
주변은 코르보르 탓에 혼란스러운데 로라스는 그들의 퇴각을 느긋이 지켜봤다.
‘이거, 어떤 놈들인지 모르지만 귀찮아질 것 같은데…….’
코르보르는 모를 것이다. 자신들은 지금 몰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 한 놈은 아니라는 소리일 테고, 어떤 놈들일까?’
흔한 오우거나 트롤 등은 아닐 것이다.
놈들에게 그런 지능이 있다면 진작 코르보르를 다 잡아먹어 버렸을 테니까. 게다가 놈들은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응?’
마지막 대열에서 코르보르 한 마리가 자신에게 데굴데굴 굴러 왔다. 아마 위에서 넘어져 한참을 굴러온 것으로 보였다.
몸집이 다른 놈들에 비해 현저히 작다.
강아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직립보행 몬스터 코르보르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로라스를 보며 잔뜩 겁먹은 표정을 했다.
“얼른 가라. 못 쫓아가면 너 죽는다!”
로라스가 손을 훼훼 저으며 하는 말에 새끼 코르보르는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새끼의 눈빛이 떨렸다.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미 쫓아가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쫓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구르면서 다리라도 부러졌는지 왼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새끼는 산 위를 올려다보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고, 마지막으로 로라스를 쳐다봤다.
“뭘 그리 봐? 쫓아가래도.”
로라스의 말에 코르보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이 흡사.
‘점박이 곰 같네. 덩치도 조그만 게. 악어도 새끼 때는 귀엽다고 하더니만.’
마물인데도 새끼라는 생각 때문인지, 보기에 꽤나 귀여웠다.
“이리 와 봐.”
로라스가 손짓을 하며 하는 말에 놀랍게도 코르보르는 절뚝거리면서도 곧바로 그에게 다가왔다. 로라스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다리를 접질렸구나.”
로라스는 장작으로 쓰려고 준비한 나무를 놈의 다리에 갖다 대고 묶어 주기 시작했다.
끼이잉. 끼이이이.
꽤나 아팠는지 코르보르가 소리를 내었지만, 로라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듯, 약간의 미동만 할 뿐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됐다. 이제 가 봐. 여기 있으면 너 죽는다.”
로라스는 그리 말하며 산 위를 올려다봤다.
마물 따위에게 겁을 먹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신이 너무 강했다.
이미 촉천에 올랐고, 그것에 적응했으며, 기억은 완전히 개방된 상태 아닌가.
‘마물 따위가!’
겁이 나기보다는 다시 짜증이 몰려들었다.
끼이이이! 끼이잉!
옆에서 울고 있는 코르보르를 다시 보니 짜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내가 이런 걸 좋아했나?’
개 한 마리 키운 적이 없었는데, 아니 그 전에 사람은 물론이고 미물도 감히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놈은 좀 달랐다.
자신의 다리를 찰싹 안으며 애처로운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자신을 보호자처럼 여기는 모양이다.
‘하긴 새끼니 사람을 본 적이 없을지도.’
귀여워 보여도 마물이다.
달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이게 묘한 게 자신에게 달라붙는 녀석이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여기 가만히 있어.”
결국 쫓아 버리기보다는 불 한편에 있게 했다.
‘말을 안 듣다가 죽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로라스는 커터를 움켜잡았다.
마물 따위가 제법 정리된 살기를 가지고 있었다.
“안 오냐?”
그리고 눈치까지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접근해 왔을 때는 언제고 이제 나무숲 뒤로 숨어서 자신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본능으로 안 것일까?
하지만 로라스는 이미 귀찮은 걸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상태.
“안 오면 내가 간다.”
그리고 먼저 몸을 날렸다.
* * *
크아아아앙!
다리 여섯 개 달린 괴수가 고통 어린 소리를 질렀다.
“질기구나!”
괴성에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번천도 크게 소리를 질렀다.
크아아아앙!
괴수의 거대 발톱이 그대로 번천을 스쳤으나, 이미 번천은 검을 회수해 그것을 막아 냈다.
까아아아앙!
엄청난 금속음과 같이 번천은 거대한 압력을 느꼈으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격의 타이밍을 잡은 듯 다시 검을 내질렀다.
손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분명 찔렀으나 놈의 가죽은 상상 이상으로 질겼다. 베여야 했고, 구멍이 나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그 탓에 귀가 찢어진다고 느껴질 정도의 괴음을 들어야 했다.
콰아아아앙!
그때 번천의 옆에서 커다란 불길이 솟아오르다 사라졌다. 3미터도 안 되는 거리.
에르자일의 마법이었고, 그건 의도된 마법이었다.
크르르르!
계속하여 번천을 협공하려던 다른 한 마리의 괴수는 불길에 다시 몸을 빼내야 했다.
‘생각이란 걸 해라들.’
괴수들은 연이어 마법에 막히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에르자일 대신 자신에게만 달려들고 있었다.
계획이 맞아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사실 미끼는 자신이 아니라 에르자일이었다.
놈들이 에르자일을 노릴 때 자신이 괴수의 항문을 노릴 생각이었다.
지저분하나 어쩌겠는가?
대체 얼마나 질긴지 알 수 없는 놈들의 가죽은 칼도 통하지 않고, 마법이 통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나마 에르자일의 마법이니 극한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일 터.
‘이게 낫지!’
하지만 번천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에르자일이 스스로 미끼가 되는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르자일이 그 수밖에 없다고 하니 따랐을 뿐.
카아앙! 카아앙!
놈들의 발톱과 검이 부딪칠수록 공포보다 전의가 오르고 있었다.
‘벨 수 있다! 잘라 낼 수 있다!’
괴수의 발톱을 허투루 대했다가 한 방에 절명할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계속 붙고 있었다.
처음에 괴수의 그 압도적인 모습에 겁을 먹은 게 창피할 정도였다.
그러지 않기 위해 수련을 해 왔던 것 아닌가?
폐관 수련은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으나, 자신은 열정을 다해 그것을 수행해 냈다.
그 결과 주군께 인정받았다.
에르자일의 호위를 자신에게 부탁한 것 자체가 인정 아니겠느냔 말이다.
괴수들도 자신의 약점을 아는 듯 항문은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 엉덩이가 거의 바닥에 닿도록 낮춘 자세였다.
하지만 또 그 탓에 전면부를 자주 노출하고 있었다.
아주 나쁜 상황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침내 번천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괴수를 쓰러트릴 수 있는 약점 하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