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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66화 (66/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66)

하늘 산맥에 올라가기로 결정하였다.

에듀는 쉽게 허락을 하지 않았다.

계속 설득하던 끝에 에듀는 차라리 토벌대를 다시 꾸리는 게 어떠냐고 말했지만 로라스가 거절했다.

토벌대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리되면 얽매이는 것이 많다. 대원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건 물론이고 그들의 등정 목적인 돈에도 신경 써야 한다.

이번 등정의 목적은 에르자일 때문이다.

그녀는 여러 번이나 등정하자고 부탁을 해 왔다. 실전 감각을 키우는 게 아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여하간 시그탑이나 드리프와 동행하라는 것까지 거부하고는 간신히 허락을 받아 등정에 올랐다.

산에 오르는 와중에 번천이 얼마 전 에듀에게 제안받은 일을 털어놓았다.

“그냥 받아들이지 그랬어.”

로라스의 말에 번천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전 꼭 주군에게 기사 서임을 받을 겁니다. 주군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주군의 첫 번째 기사일 거라고.”

“음, 그건 말이지.”

로라스는 잠시 고민했다.

분명 그리 생각은 하는데, 여기서 그렇게 확정하면 에렌에서 고된 수련을 하고 있는 테라에게 좀 미안한 감이 드는 것이다.

“그건 네가 나중에 테라와 잘 이야기해 봐야지.”

“그 꼬맹이와 저를 비교하시는 겁니까?”

번천이 섭섭하단 듯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로라스는 살짝 난처해하며 말했다.

“비교가 아니라 너희 둘이 해결해야지. 게다가 다시 돌아올 때는, 너도 꼬맹이라 말할 수는 없을걸.”

번천이 끈기로 성장하는 사내라면, 테라는 독기로 성장하는 사내다.

테라의 언행이 종종 치기 어리지만 그건 정말 어려서 그런 것이고. 게다가 번천보다 무공에 재능이 있는 건 사실이니, 차이를 안다면 그 격차를 반드시 좁힐 것이다.

‘영광과 정의의 빛 기사단이란 것도 만들었는데. 쉽게 양보할 리가.’

불현듯 그 꼬맹이 집단이 생각났다.

‘다른 녀석들이야 테라만큼 열성적으로 달려들지는 않겠지만. 아니, 그게 오히려 다행인가?’

잠시 확인해 볼까 생각하다가 귀찮아질 것 같아 포기하려 할 때 번천이 말했다.

“그 꼬맹이와 경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그리 말씀하시니 실력으로 쟁취하겠습니다.”

“그보다 아쉽지는 않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기회가 있을 때 잡았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기사 서임을 받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섭섭해지려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사라지면 어쩌려고. 원래 좋은 기회란 건 왔을 때 잡고 보는 거다.”

“어디 가실 분처럼 그러십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여하간 내가 좀 더 열심히 해야겠네. 원망 안 들으려면.”

로라스는 실쭉 웃어 보이고는 생각했다.

‘모르지. 또 어떻게 될지는…….’

그때 용감하게 앞장서 걷고 있던 에르자일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거 무슨 흔적인지 알아?”

에르자일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거기에는 나무가 서 있고, 몸통에는 사선으로 길게 늘어진 네 개의 줄이 그어져 있었다.

번천이 다가가 살피며 말했다.

“맹수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데다 가느다랗고. 소형 몬스터라고 하면…… 이런 흔적을 남길 만한 발톱을 지닌 놈이 있던가.”

“둘 다 아니다.”

번천과 에르자일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로라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야. 사람의 손톱.”

번천과 에르자일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네?”

“말이 돼?”

에르자일이 말했다.

“사람의 손끝은 연약한 부분이야. 신체 강화 마법을 걸어도 나무를 이리 긁을 수는 없어.”

“주군, 아무래도 사람은 무리입니다. 포스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면 납득이라도 하겠지만 그런 흔적도 없습니다.”

번천도 한마디 하자 로라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모르고 못한다 하여 남들도 못한다 생각하지 마. 세상에 기인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에 기인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삼대마법사네, 칠대기사네 하는 것처럼 저쪽 세계에서도 무슨 삼협이네, 거시기 칠마네, 뭐시기 구괴네 한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뜬금없이 나타난 이에게 죽을 수 있는 게 현실이다.

멀리서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날 봐. 나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그나마도 에렌이나 우리 영지에서나 알지, 다른 곳에서는 날 모르잖아. 그런데 내가 어찌 못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허명에 안심하고 방심하고, 그런 이유로 게으름을 피우다가 어디서 나타난 용병에게, 이름 모를 병사에게, 하다못해 어느 술집에서 술 나르는 애송이에게도 죽는 거다. 명심해라, 번천.”

번천은 긴장했는지 자세를 꼿꼿이 하며 말했다.

“네, 주군.”

로라스는 에르자일을 보며 물었다.

“에르자일, 이제 여기에 왜 올라왔는지 이야기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확실치가 않아서……. 창피하니까.”

“그러니까 뭐가?”

에르자일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저번에 본 것 같았거든. 트룹퍼스토스를.”

“트룹……퍼 뭐?”

복잡한 이름에 로라스가 확인하듯이 묻는 말에, 에르자일이 아닌 번천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트룹퍼스토스 말입니까, 에르자일 님?”

“네. 분명 본 것 같거든요.”

“그게 뭔데?”

번천이 로라스를 보며 말했다.

“트룹퍼스토스. 신수를 말하는 겁니다, 주군.”

“신수?”

“네. 저도 들은 건데 크기가 요만한데 생김새는 사자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번천은 양쪽 가슴 중앙에 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원숭이처럼 나무도 타고, 그 속도가 워낙 빨라 눈으로 좇아가는 것도 버겁다고 합니다.”

“그런 게 있어?”

“네. 이제 이야기 속에서나 거론되지만, 옛날에는 신수를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역사에도 있습니다.”

에르자일이 보충 설명했다.

“실제로도 있어. 남방 오란 왕국에 조련 마스터라 불리는 사람이 있는데, 신수를 직접 데리고 다녀. 트룹퍼스토스는 아니고 베나론이라는 새 종류야.”

“신수가 여러 종류란 말이야?”

“딱 네 종류야. 지상의 트룹퍼스토스, 하늘의 베나론, 바다의 파세이아, 지하의 폴린.”

에르자일이 네 개의 손가락을 펴며 하는 말에 로라스는 생각했다.

‘중원의 사방신수 같은 거로군.’

그때 에르자일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흔적 혹시 신수의 자국이 아닐까?”

로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오므려 나무에 갖다 대며 말했다.

“사람이라니까. 정확하게.”

“하지만…….”

에르자일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못 봤고 못한다고, 남들도 그러지 못할 거란 생각 하지 말란 로라스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로라스의 시선이 어느새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신수의 흔적이라면 이거겠지.”

에르자일과 번천의 시선이 로라스가 쳐다보는 곳으로 향했다.

있었다.

바닥에 사자의 발자국 생김새이나 그 크기가 무척이나 작은 그런 흔적이 말이다.

* * *

“허억! 허어억!”

입에서 단내가 난다는 뜻이 뭔지 몰랐다.

체력이 떨어지면 호흡이 가빠지면 가빠지지, 무슨 냄새가 난단 말인가.

분명 그리 생각했는데 말이다.

“허어억! 흐어어억!”

대체 숨을 뱉는 건지, 속이 쥐어짜이는 건지 괴이한 소리를 내고 보니 알 것 같았다. 단내가 무엇인지 말이다.

“에르자일 님, 조금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뒤에서 따르던 번천의 말에 에르자일은 잠시 멈칫하더니 일그러진 표정을 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을 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쉰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필요할 때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쉴게요.”

에르자일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번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에르자일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계속 발목을 잡는 꼴이니…….’

그건 고집이 아니었다. 미안함이었다.

로라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홀로 움직인다고 했다.

아직도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는 그 흔적을 추적한다고 했다. 번천은 당연히 그와 함께 움직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신수의 발자국을 찾았다 하여 그것을 추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로라스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그 흔적을 발견조차 못 했을 터.

추적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 로라스는 번천을 자신에게 붙여 준 것이다.

처음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로라스는 에렌에서부터 마법사도 어느 정도의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닦달했었다.

그래서 귀중한 시간을 빼내 무인들처럼 몸을 만드는 훈련을 했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마법사인 자신에게는 힘들 정도의 훈련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왜 그리 체력을 강요하는지 깨달았다.

산을 걷는다는 것.

그건 평지를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보통 산도 아니고 하늘 산맥이다. 토벌전에 같이 참여할 때마다 못난 꼴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도했고, 은근 자부심도 들었다.

자신이 보통 마법사와는 다르다는 그런 자부심.

하지만 하늘 산맥 안에서도 또 다른 산이 존재함을 알았다. 사람은 이족보행을 하는 존재이나,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다.

두 손도 같이 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나마도 번천이 계속 끌어 주지 않았다면 몇 번이나 포기할 뻔했다.

그래서 번천에게 미안한 것이다. 자신의 호기심, 욕심 때문에 이리 와 놓고서 짐만 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차라리 그냥 부탁을 할걸.’

에르자일은 미련한 여자가 아니었다.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알았고,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안다.

짐만 될 상황이라면 자신은 나서지 않고 따로 부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나아가는 건 무리라는 걸 알지만, 로라스마저 없는 지금 상황에서 차마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더 준비했어야 하는데 의욕만 앞섰어!’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에르자일은 결정했다.

번천이 경고했던 상황을 만들지 말자고. 어차피 날도 저물어 가고 있으니 여기서 야영을 하고 내일 내려가자고 말이다.

“번천 님!”

에르자일이 그렇게 번천을 불렀을 때였다.

그르르르릉.

하나의 음성이나 사방에서 들리는 듯한 이질감 가득한 괴성.

“에르자일 님!”

번천이 에르자일을 부르며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세웠다.

그리고 검을 뻗어 한 곳을 겨눴다.

소리는 사방에서 들리지만 번천은 괴성을 내는 존재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에르자일도 멍하니 있지는 않았다.

락에서 2년.

짧다면 짧은 시간이나 락에서 2년을 버텼다는 것.

벌써 두 번의 토벌대와 다섯 번의 정찰에 참여했다는 건 더 이상 어리숙한 초짜라 부를 수 없다.

곧바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으며, 그 끝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란 네이미!”

불길은 깃발처럼 나풀거리며 번천이 검을 겨눈 쪽으로 향했다.

크아아아아앙!

이윽고 괴성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소만 한 덩치에 전신이 마치 검은 비단을 두른 듯이 은은한 흑빛을 뿜어내었다. 기다란 위쪽 하얀 송곳니가 턱 아래까지 내려와 흑과 백의 조화가 기묘하기까지 한 존재.

네 다리를 쓰면 맹수라 생각했을 것이나 놈은 여섯 개의 발을 가졌다.

하지만 여섯 개의 발을 어찌 쓸지는 쉽게 짐작이 되었다.

네 개의 뒷다리로 산비탈에서 몸을 지지하고, 송곳니만큼이나 위협적으로 보이는 앞발의 발톱으로 공격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번천과 에르자일은 눈동자를 돌려 서로를 보았으나 둘 다 처음 보는 놈이다.

번천은 검을 끌어당겼고, 에르자일의 지팡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더 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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