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65)
로라스가 말했다.
“아시잖아요. 다른 분들은 몰라도 드리프 경은 락에서 봐 오신 게 있으실 테니.”
드리프의 표정이 굳어졌다.
로라스의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그래서 순간 오금이 저리기까지 했다.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신 거지?’
드리프는 이제 로라스를 어린애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냥 무탈하게, 다른 귀족가의 수두룩한 망나니들보다는 훨씬 훌륭한 정도가 아니었다.
빈틈없는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그 수준을 넘어섰다.
분명 락이 많이 변화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아직 달라진 건 많지 않은데, 눈은 벌써 훨씬 앞을 내다보고 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걸…….’
있긴 있다.
배우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정치 감각을 타고나고, 권력의 의미에 대해서 통달한 사람은 말이다.
어디 감각뿐이던가?
대마법사 헤르메스, 마스터 에르페유가 마법과 무의 재능만 믿고 락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실제로 마탑까지 유치한 행동가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해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드리프 경. 오늘 부탁드린 딱 그 선까지만 움직여 주세요.”
벌써부터 선을 긋는 방법까지 안다.
살짝 무섭기까지 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리 보이는 선을 긋는다면 자신을 신뢰한다는 뜻.
하긴 에듀의 가문과 자신, 그리고 동료들이 어디 보통 관계던가.
“명심하겠습니다, 소영주.”
드리프는 가슴에 손을 올리는 예까지 취하며 확실하게 존경을 표시했다.
신뢰받고 있을 때, 그것을 유지해야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드리프가 나가고 로라스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혼자 오버한 건가?’
목표가 정해졌으니 말과 행동도 거기에 맞춰야 한다.
‘아버님은 권력욕이 없으시지만…….’
로라스는 순간 망설임을 느꼈다. 하지만 매번 재정 적자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당분간 지켜보다가 하기 싫어하신다면…….’
목표를 줄이면 된다.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솔직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로라스는 안다. 드리프도 그렇지만 아버지도, 심지어는 어머니까지 요새 얼굴에 활기가 돈다는 사실을.
로라스는 에듀의 과거가 지금의 에듀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좀 자유로워져야 한단 말이지.’
그는 머리싸움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필요하면 하지만 단순한 방법을 선호한다.
전생……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세계 여행도 하고 싶은데.’
예전에 해 보지 못했던 것 다 할 것이다.
로라스의 삶. 그는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 * *
정신없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을 때 마침내 번천이 폐관 수련을 끝냈다.
“수고했다.”
“모두 주군 덕분입니다.”
오랜 시간 갇혀 지냈지만 번천의 혈색은 좋았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자신감을 가져도 될 만한 성취를 이뤄 냈다.
눈만 봐도 안다.
형형한 안광.
저것을 수습하여 다시 원래의 눈으로 돌아가면 그는 무림에서도 고수라 불릴 만한 수준이 될 것이다.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고수가 아닌 내 기준에서 말이다.
‘그게 몇 년이면 된다는 게 중요한 거지.’
재작년에 얻은 그의 깨달음은 크고도 커서 아직 수습하지 못했을 것이고. 여기서 한 번 더 발전하면 반박귀진의 경지까지 이뤄 낼 터.
“번천 님, 축하드려요.”
에르자일의 축하의 말에 번천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폐관 수련을 했다고 하지만 나와 에르자일은 종종 번천의 수련을 참관했다.
나는 혹시 모를 주화입마에 대비하기 위해 내력 상태를 점검해야 했고, 에르자일은.
“별말씀을. 저도 덕분에 공부를 많이 했으니 감사드려요.”
번천의 맨바닥에 박치기를 한다는 그 물마법 수련 과정의 경험 과정을 고스란히 전수받았다.
마법사 입장에서 말도 안 되는 번천의 수련법. 그것이 에르자일에게 무슨 영감을 준 듯했고.
“아닙니다. 제가 훨씬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에르자일 님 덕분에 제가 했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에르자일은 그것을 통해 번천의 물마법 수준을 높여 줬다.
사실 번천은 이미 포스 유저인 만큼 마법에 대해 특별히 집중하지 않았지만, 그가 과거에 해 왔던 그 노력들을 활용할 방법은 충분히 익힌 듯했다.
덕분에 번천은 물에 관련된 마법에 한정되지만 3클래스를 바라보는 마법사로도 성장했다.
“하나만. 지금은 두 개 다 동시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어설퍼. 일단 무공 수습부터.”
노파심에 한 말에 번천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언제든 인챈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합니다.”
“로라스, 넌 마법사면서……. 번천 님은 마법사로서도 가능성이 있단 말이야.”
에르자일이 슬쩍 탓하듯이 얘기하길래 그녀에게 말했다.
“포스가 더 뛰어나. 몇 년이 지나면 너도 쉽게 승부를 장담하지 못할걸.”
살짝 과장하긴 했다.
에르자일.
단 2년 만에 락에서 살육의 레이디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얻은 그녀다.
겉모습과 다른 그녀의 과감성은 옛날부터 알아봤지만 말이다.
‘그래도 같은 편까지 공포에 질릴 정도로 도륙을 내 버린 건……. 게다가 실험을 하겠다고 몇 마리 생포까지 해와 버렸으니.’
이곳에 오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 발전했을지 예측이 어렵지만, 현재까지는 자신의 숨겨진 본능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마물 가득한 락에서 아주 빠르게 성장 중이었다.
스스로도 이 정도면 성과를 이뤘다고 말할 정도니 말이다.
여하간 번천이 한 단계만 더 성장하면 에르자일도 승부를 쉽게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근거리에서 암살 형식이면 위험할 정도.
“뭐, 엄청 뛰어나시니까.”
비교했다고 뭐라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상대가 번천이라 그런지 그냥 넘어가는 듯했다.
“이제 번천 님도 나왔으니 우리 다시 가는 거야?”
“가? 어디를?”
“근래 나가지도 않고 영지에만 있었잖아. 시간 없다고 상대도 안 해 줬으면서.”
“계속 바빠. 심심하면 병사들 훈련하는 거 구경하든지. 항마력 올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고.”
“인형처럼 딱딱 맞추는 거 구경해서 뭐하게.”
근래 브렌드 경과 함께 병사들과 자경단원들에게 제식훈련을 시키는 중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근사할 거라 생각했는데, 에르자일의 흥미는 끌지 못한 것 같다.
통일성은 부대의 가장 중요한 훈련 요소 중 하나지만, 개개인의 성취로 싸우는 마법사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 테고.
“어디 가 보고 싶은 데가 생겼어?”
그녀의 시선이 창밖으로 쏠렸다.
창밖으로 대한 산이 보였다.
분명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 선명함이 바로 코앞에 있는 듯했다.
“하늘 산맥?”
“좀 더 나를 몰아붙이고 싶어. 그런데 겁이 조금 나네.”
에르자일이 점점 자신을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저런 말을 아예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과감하고 살육의 레이디라 불리는 그녀가 저런 말을 하는 게 의외는 아니다.
두려움은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야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더 안전해지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땀을 흘린다.
인간의 본능 중 살고 싶다는 욕구만큼 강한 것도 많지 않으니 말이다.
‘하늘 산맥이라…….’
내게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 같았다.
* * *
차아아아아앙!
검음과 함께 번천은 집요하게 에듀를 따라붙었다.
‘으음!’
에듀는 생각보다 저돌적으로 들어오는 번천의 검에 침음성을 삼켰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호기심이었다.
번천의 인성과 실력이 기본은 되었음을 알았고, 로라스가 돌아온 뒤 착 달라붙어 함께 움직이는 것도 알았다.
자신의 앞에서 로라스를 주군이라 부르는 것도 알았다.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웃기기도 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번천의 인성과 실력이 괜찮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그냥 두고만 보았다.
로라스에게도 심복이라는 게 생겨서 나쁠 건 없으니까.
번천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건 그가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온 이후였다.
폐관 수련.
로라스가 새로 도입한 개념의 그 훈련은 지독하다.
외부와 단절하고 검만 수련한다. 보통 독심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번천은 그런 생활을 2년 가까이 했다.
그래서였다.
나온 이후 눈에 일렁거리는 그 기운을 보고, 호기심에 가볍게 대련을 하자고 한 것은.
에듀의 명령도, 부탁도 아닌 제안을 번천은 극구 사양했다.
그의 입장에서 주군의 부친인 에듀와 검을 맞대어 본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던 일.
하지만 에듀의 고집에 결국 번천은 검을 잡았다.
그리고 결과가 이러했다.
까다롭다.
지도 대련 같은 방법으로는 그를 제압하기 불가능했다.
제압하려면 힘을 써야 하고, 그 과정에서 피를 봐야 할지도 몰랐다.
에듀는 그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근골도 나름 괜찮은 편이고, 열정도 있고 마법까지 익힌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번천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껄렁껄렁한 용병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변화했다는 건…….
‘로라스가 그를 끼고 산 이유가 이런 발전 가능성을 보아서였던 건가? 아니면 로라스가 이리 만든 것인가!’
제법 쓸 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믿기는 일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영지에 기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카아아아앙!
에듀는 더 이상 휘말리기 전에 검에 포스를 뿌리며 그를 물러나게 했다.
“영주님!”
그리고 번천이 놀라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의 대련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군. 다음에는 대련을 하더라도 제대로 준비하고 하지.”
“…….”
“그리고 번천.”
“네, 영주님. 말씀하십시오.”
“몇 년 동안 봐 왔네만,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고 그러면서도 맡은 일에 게으름이 없더군. 게다가 부지런히 수련하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라면 기사 서임을 받게 할 수 있을 것 같군. 아직은 영지의 기사일 뿐이지만, 나중에는 정식으로 서임을 받게 해 줄 수도 있다.”
에듀는 그리 말하면서도 번천이 당연히 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귀족들이 기사가 되는 방법은 많지만, 평민이 기사가 되는 건 절대 쉽지 않다.
게다가 기사란 제국의 신분제도에서 평민을 벗어날 발판인 것이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날을 잡아서……. 뭐라 했나?”
“아직은 아닙니다, 영주님. 나중에 제 자격이 되고…….”
“내가 자격이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번천이 말끝을 흐리며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에듀는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혹시 공식적으로 범죄 기록 같은 게 남아 있나? 그래서 그런 건가?”
“아닙니다! 제가 거칠게는 살았어도 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 제안은 자네에게 절대 나쁜 일이 아닐 텐데 말이야.”
에듀의 말에 번천은 뭔가 마음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절 기사로 만들어 줄 분은 꼭 주군…… 아니 소영주님이었으면 합니다.”
“……!”
“물론 그게…… 영주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서 소영주님이 영주님이 되기를 기다리겠다는 게 아니라 소영주님은 반드시 이 조그만, 아니 락이 조그맣다는 게 아니라, 큰 공을 세우셔서…….”
횡설수설하는 번천을 보며 에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이야 어찌하든 그의 마음을 확실히 안 것이다.
‘좋은 기사를 두겠구나, 로라스.’
에듀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라스의 재능이 락에만 한정되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기사 서임을 줄 수 있는 신분까지 상승할 거라는 확신.
에듀는 번천의 거절에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