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64)
‘이놈 봐라!’
넉살 좋게 넙죽 허리를 숙이는 게 웃기다 못해 당황스럽다.
“여기 우두머리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오리시암이라 했습니다.”
번천의 대답에 놈을 다시 쳐다봤다.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살짝 시선을 위로 던지며, 입꼬리를 귀에 걸듯이 웃는 산적 놈.
‘재미있는 녀석이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이리 알아서 기어 주니 뭘 하기가 좀 그랬다.
원래라면 쪽수 믿고 덤비는 우두머리를 비롯한 간부급으로 보이는 몇 놈 목을 따 주고, 똘똘한 놈을 찾아 적당히 관리자로 만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별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신기한 건 이놈이 허리를 숙인 대상이 번천이 아닌 나라는 것이다. 그건 알아봤다는 것이다.
‘눈만 좋은 놈인지, 아니면 육감이 타고났다든지…….’
그런 사람이 있다.
천성적으로 본능이 엄청나게 발달한 놈. 그리고 무공은 모르는데 눈이 좋은 놈들.
제법 무인 티가 나긴 하나, 결국 딱 산적들의 대가리 할 정도의 수준인데 날 알아봤다는 건 둘 중 하나거나, 아니면 둘 모두거나.
이놈이 싸워 보지도 않고 바로 굴복하는 걸 보면 후자 쪽이 가까울 것이다.
‘육감 뛰어난 놈이라. 나쁘지 않지.’
뭣보다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지겨웠는데, 이런 즐거운 상황을 안겨 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육감!”
“…….”
“육감!”
영문 모를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걸 깨달은 놈이 날 보며 대답했다.
“네, 대장님.”
“넌 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리고 이제 대장은 여기 이 사람이 될 것이고.”
난 번천을 보면서 말했다.
“어제 배운 거 시험해 보려고 했는데, 저 얼굴에는 좀 그렇다. 다음에 해야겠다.”
번천도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주군.”
* * *
넉 달이 걸렸다.
나타족과 서른일곱 개의 길드…… 아니, 산채와 잡다한 마적 놈들을 복종시키는 데 걸린 시간 말이다.
아직 도적들의 길드가 남아 있으나 그건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놈들은 점조직으로 움직입니다.
―몇몇 놈들은 알고 있으니 족쳐 보면 조금 더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놈들의 역사는 오래돼 놔서 대가리를 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육감과 오러후이가 지역의 모든 산채와 마적들의 위치를 제공했으나, 도적 길드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도적 길드가 워낙 은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으니 렌도 거짓을 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완전히 복종한 이상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느냐?
당연히 있다.
폭력 앞에 모든 진실은 튀어나온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 잡아내고자 하면 못 잡아낼 것도 아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고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건.
‘결국 하오문 같은 놈들 아닌가! 강자 앞에서 약하고, 약자 앞에서 무자비한!’
이 일대를 복종시켰으니 알아서 접근할 것이다.
나타족과 산채들이 그들의 주 고객인데 거래를 끊으면 굶어 죽을 테니까.
밥그릇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 중 하나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오러후이나 육감이나 걱정을 많이 했다.
내가 밥그릇을 빼앗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밥그릇을 차 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들의 밥그릇에 손을 댄 건, 내 밥그릇을 챙기기 위함이니까.
아직은 별 효용이 없지만 락이 발전하고, 락을 중심으로 주변이 발전해 나가기 시작한다면 이들은 반드시 도움이 된다.
어차피 놈들을 내가 원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니 딱이다.
육감과 오러후이에게 딱 한 가지만 주문했다.
‘저항하지 않는 자는 목숨을 빼앗지 말 것. 재물을 전부 취하지 말고 7할만 취할 것.’
이리 주문한 건 이유가 있다.
―뭐든 퇴로를 열어 주고 쫓아야 하는 법. 사람을 덜 죽이고, 전부 빼앗길 줄 알았는데 조금 남겨 주면 그걸 좋아라 하더라니까.
녹림, 아니 그냥 천하 산적의 두목. 총채주 육가의 명언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제 것 뺏기고도 살았으니 다 괜찮다는 둥, 액땜을 했다는 둥, 어떻게든 자기 위로를 하게 만들어 주는 거야.
책 한 줄 읽을 줄 몰랐던 그 무식한 놈이, 산적질만큼은 경지에 이르렀었다.
―세상일 어찌 될 줄 알고. 빼앗긴 놈이 목숨 걸고 덤벼들면 우리도 손핸데. 조금 남겨 주는 걸로 그것을 피하는 거지. 사람이 뒈지지 않으면 관에서도 안 와. 자기들도 목숨이 아까운데,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게 고발을 무시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니까.
육가가 녹림총채주로 있을 때가 녹림의 최전성기였을 것이다. 놈이 죽고 새로 총채주 된 놈이 욕심부리다 탈탈 털렸지만 말이다.
물론 거기에 천황성도 한 발……은 중요한 게 아니고. 여하간 그리 정리를 했다.
시작이 좋다.
‘이제 번천만 잘하면 되는데.’
오러후이와 육감이 서로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어 놨으니 번천이 통제하기 쉬울 터. 하지만 이 순둥이가 산전수전 다 겪은 놈들을 잘 요리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다.
“괜찮아. 찍어 누를 정도의 무력을 가지면 되니까.”
“네?”
“잘하자고. 이번엔 네가 폐관해야겠구나. 기회다, 번천.”
“네. 저도 그 생각 때문에 벌써부터 두근거립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래. 가야지. 집으로.”
마무리했으니 돌아갈 때다.
* * *
영지로 돌아왔다.
토벌전이 끝난 영지는 한적했다.
평상시와 다를 게 없지만 아주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용병들이 종종 눈에 띈다는 것이다.
상단의 호송 일도 있고, 편의 시설 몇 개가 자리 잡으면서 몇몇은 여기서 슬슬 마물 사냥이나 한다며 남은 자도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돌아오니 좋다.
번천은 저택 지하로 폐관 수련에 들어갔고, 난 나대로 아무 생각 없이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봄이 되어 렌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나눠 받겠다는 거지?”
두 개의 마나석 중 한 개는 처리했으나, 한 개는 주인을 찾기 힘들다고 했다. 아니, 원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쉽게 팔 수가 없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네.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으나, 비밀 유지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권력도 함께 가지고 있어서 말입니다.”
“으음.”
“그렇다고 가격을 깎아서 팔 수는 없지 않습니까. 좀 나눠 받더라도 비밀 유지하면서 제값을 받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낸 소리를, 렌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석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 비밀 유지가 굳이 필요한가 싶어서. 좋은 물건 좋은 값을 받고 팔면 그만 아닌가?”
“특급 마나석에 오델리움입니다. 그리고 락은 작은 영지가 아닙니까?”
렌의 반문에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깨달았다.
불필요한 걱정이지만, 원론적으로 그의 말이 맞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그런 보물을 힘없는 자가 가지면 재앙의 근원이 된다.
“예전 마나석은 그 원래 주인이 헤르메스 님이었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아버님의 마나석은 어찌 처리했는가?”
“굳이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조용히 처리해 달라고는 하셨습니다.”
아버지도 그것을 염두에 두신 모양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 너에게 맡긴 일이니 네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네, 알겠습니다.”
렌이 돌아가고 나서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가진 것을 걱정해야 하지만!’
10년 내로 이런 걱정은 끝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 * *
락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일단 마탑이 완성되었다.
초급 마법사들이 입주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사람들이 딸려 입주했다.
토벌대에 마법사가 구성되어 있다는 소문이 용병계에 알려진 후 사람들이 더욱 몰렸다.
덕분에 더 많은 몬스터들을 잡고, 여러 지역을 평정할 수 있었다.
노멀존이 늘어난다는 건 환영할 일이다.
그게 일정 크기가 되면 드디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수십여 가구에 불과했던 락의 주민들이 이백여 가구 이상으로 늘었다는 점이다.
―락이 위험하긴 하지만 사람대접해 준다더라.
―일한 만큼 보상은 확실히 챙겨 준다더라.
렌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문을 흘린 게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락의 기존 주민들은 새로운 이주민들을 환영했다.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언행?
락은 그런 게 없다.
사람 손이 중요한 곳이었고, 서로의 목숨을 지켜 주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이주민들은 사람대접을 해 주는 것만으로 행복해했다.
많이 벌면 많이, 적게 벌면 적게라는 아버지의 세금 정책도 환영을 받았다.
사람이 몰려드니 다양한 직업들이 생기고, 상인들도 늘어났다.
그런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성에 차지는 않는다.
하지만 터전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알기에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나 그래도 락에 들어와야 할 이유를 조금씩 늘려 주고는 싶다.
“소영주.”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련님, 공자님이라 불리던 로라스의 호칭은 소영주로 통일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락의 이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이가 누구인지 말이다.
“드리블 경,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로라스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드리블을 보며 묻자 그는 대답했다.
“요새는 매일이 좋고 즐겁습니다. 손이 몇 개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쁘긴 하지만 말입니다.”
“바쁜 게 즐거워 보이십니다.”
“옛날처럼 하루 종일 돈 걱정했던 것보다야 이쪽이 천 배 만 배 즐겁지요.”
“저번에 렌에게 들어 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돈이 빠져나간다고 하던데요.”
드리블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들이부을 물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제 제 소관이 아니라서 더더욱 즐겁습니다.”
락의 재정 관리는 지난달부터 렌에게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는 황금 상단과의 관계를 싹 정리하고, 자신만의 상단을 꾸렸다. 그리고 락의 재정 담당관을 겸했다.
그도 락의 성공에 확신을 가졌고, 거기에 자신이 뽑을 만한 이득이 얼마나 될지 계산을 끝낸 것이다.
락이 발전할수록 그의 상단도 이득이 극대화될 터.
덕분에 드리블은 많은 업무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로라스가 물었다.
“그리 바쁘신 분이 이유 없이 절 찾지는 않으셨을 텐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얼마 전 영지 개발 투자 제안이 들어왔는데 말입니다.”
드리블이 뭐라 계속 말하려 할 때, 로라스는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정색하며 말했다.
“드리블 경, 그걸 왜 제게 말씀하십니까? 아버님과 상의하셔야죠.”
이건 중요한 문제다.
락의 영주는 부친인 에듀다.
자신이 후계자이긴 하지만 부친이 어디 간 것도 아니고, 영지 내에 있는데 이걸 자신과 상의하면 안 된다.
“물론 상의드렸습니다. 한데 소영주와 상의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듣지 않겠습니다. 아버지도 분명 무슨 말씀이 있으셨을 터. 그대로 진행하세요.”
드리블은 당황해했다.
“소영주, 하지만…….”
“그만. 아버님의 뜻대로 하세요.”
로라스가 다시 단호하게 말하자 드리블은 약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로라스는 그런 그를 부르며 말했다.
“드리블 경. 락은 더 커질 것이고 이제 아버지께서 판단하고 결정하셔야 합니다. 앞으로도 제게 말씀하지 마시고, 아버님께도 그리 생각하셔야 한다고 드리블 경이 계속 이야기해 주세요.”
“소영주, 그건…….”
“안 하려고 하시는 거 압니다. 아직 우리 영지가 작아서 상관은 없지만…….”
로라스는 드리블을 직시하며 말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락에도 태양은 하나지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걸 경계해야 합니다.”
드리블은 번개를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