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63)
‘미쳤나?’
상대가 자신보다 고수인 건 맞다. 하지만 저런 자세와 검로로 자신을 상대할 정도로 엄청 차이가 나는 건 아니다.
상대가 얼마나 자신을 하찮게 취급하고 있으면 저런…….
번천은 짜증이 났다.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다. 몸 앞으로 무게중심을 두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그냥 바닥에 엎어질 정도의 흔들림이다.
하지만 덕분에 번천이 취해야 할 움직임 중 하나를 줄일 수 있었다. 남은 건 검을 그대로 곧게 찌르는 것뿐이다.
이번 공격으로 자신은 죽겠지만, 쥐가 고양이를 무는 식으로 한 번쯤은 놈을 서늘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굳게 잡은 검을 그대로 쑥 내밀었다.
‘어…….’
자연스러움이 어색할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손에서 부르르 떨리는 감각이 전해져 온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상대의 눈을 보면서도 번천은 정확히 자신이 뭘 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투욱!
자신의 옆으로 상대의 검이 떨어졌을 때. 비로소 번천은 자신의 검이 상대의 가슴을 뚫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 * *
심장이 쫄깃쫄깃해진다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대체 언제 이런 긴장감을 느껴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몇 번이나, 아니 수십 번 몸이 움찔움찔했다.
하지만 참고 또 참았다.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가 아니다.
수십 년간 검을 갈고닦은 무인에게도 한 번도 오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실전에서 저런 무아지경을 맛보는 기회.
천년설삼이니 공청석유니 하는 그런 영약을 손에 넣는 것보다 훨씬 얻기 힘든 기회.
저번 던전에서 길을 잃고 영약을 얻었을 때 번천이 천운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가 보다.
물론 이번에는 생명의 위협이 있는 그런 기회였지만 말이다.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찰나라는 시간을 쪼개서 움직여야 할 정도로 정밀하게 계산해야 했다.
‘목숨만 붙어 있으면 돼!’
그리고 어떻게든 살리면 된다.
오늘 번천이 살아남아 몸을 회복한다면 지금보다 수배는 더 강해질 테니까.
사지 멀쩡하면 좋겠지만, 팔 하나 날아가도 어쩔 수 없다.
손에서 땀이 났다.
내 첫 번째 기사가 될 자. 내가 책임지기로 마음먹은 자.
그래서 참을 수 있었다.
“커헉!”
번천이 상대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을 때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번천은 대무간을 끝장냈다.
* * *
축제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보통 대무간 선출 결투에서는 부상은 입을지언정 누군가 죽는 건 흔히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실력이 고만고만한 것도 있지만, 어차피 이기면 절대적 영향력이 생기기 때문에 굳이 죽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간도 아닌 가장 큰 세력을 지닌 대무간을 죽였다. 지금이야 수긍해도 이후 그 수하들의 반발이 이어질 건 당연할 터.
분명 심각한 분위기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로라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번천에게 달려갔다.
“주군…….”
긴장이 풀려서일까?
번천은 로라스를 보며 그대로 혼절했고, 로라스는 번천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들고 천막으로 달렸다.
안으로 들어온 로라스는 번천을 살폈다.
다시 한 번 심하게 부상을 입고, 내상도 만만치 않았지만 근골과 오장육부에 큰 피해가 없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타족을 제압한 것보다 이번 전투에서 번천이 큰 깨달음을 여러 번 얻은 것이 훨씬 이득이다.
로라스는 자신의 내력으로 번천의 내상을 더 번지지 못하게 하고, 응급처치를 끝낸 후에야 나타족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대무간을 죽임으로써 이후 통제가 귀찮아질 것 같으나, 로라스는 금세 방법을 찾았다.
‘그걸 내가 왜 고민을 해.’
나타족이 분명 이쪽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이나, 앞으로의 계획에 필요한 디딤돌이 될 터.
게다가 자신에겐 쓸 만한 놈이 하나 있었다. 믿을 수는 없지만 눈치 빠르고 일 처리가 확실한 놈.
로라스가 밖으로 나가 보니 역시 그놈은 눈치 빠르게 천막 입구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오러후이.”
“네, 주인.”
“나타족을 네가 장악해라.”
놈이 두 눈을 빛냈다.
왜 아닐까?
똑똑한 놈이고, 그만큼 야망도 있는 놈이다.
“네 것으로 만들면 대무간의 자리도 넘겨주마.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습니다.”
“처리가 곤란한 놈도 있을 터. 이야기해라. 처리해 주마.”
교활한 표정을 짓는 놈에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정확히 수행하면 나타족은 네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인.”
“가라. 사태를 수습하고, 널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와라.”
오러후이가 급히 사라졌다.
“괜찮을까? 정신 제압이라도 해 둬야 하지 않을까?”
에르자일도 이제 사람 보는 눈이 생기는 것 같았다. 먼저 정신 제압이라는 단어부터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아냐. 괜찮아.”
마법보다 더 확실하게 금제를 걸었고, 여차하면 죽이고 다른 대리인을 찾으면 된다.
번천이 공식적으로 대무간이 된 이상 개입할 여지는 충분히 확보했으니까.
‘필요하면 경쟁시킬 놈 하나 구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번천의 회복이다.
옆에 붙어서 요양하게 도와도 시간이 꽤나 걸릴 테지만 기꺼이 그리할 가치가 있었다.
‘일어나라! 번천.’
그러면 번천은 알 것이다.
자신에게 새로운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말이다.
이틀 후.
예상대로 오러후이는 소란을 잘 진정시켰고, 나타족의 현황에 대해 보고했다.
전투가 가능한 사내들이 사백여 명에 식속들까지 이천에 가까운 숫자. 거점 세 개를 가진 확실한 대세력이었다.
충성심이 바닥이긴 하겠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고, 오러후이만 꽉 잡아 두면 된다. 혹시 모르니 대체제를 키우고 말이다.
번천이 사흘 만에 정신을 차렸다. 이후 열흘이 지나서야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됐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주군.”
“네가 해낸 거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대도. 어째 매일 같은 말이냐?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
번천에게 찾아온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대로 수습하기도 전에, 마치 오수(午睡: 낮잠)에 빠졌을 때 찾아온 꿈처럼,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쉬워하고 조급해하는 번천에게 주의를 주었다.
“절대 조급해하지 마라. 그럴 필요도 없다.”
그 깨달음은 사라진 게 아니다.
뭔가를 깨닫고 바로바로 강해지면 고수 아닌 자가 없을 터.
한 번에 모든 것을 수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정신이 그것을 닫은 것이다. 아마 감당할 만한 수준이 되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내가 네 팔 중 하나를 담보로 할 정도로, 아주 귀한 것을 얻은 상태다. 느긋하게. 아주 약간 위만 보고 그것에 오른 후 다시 위를 봐야 한다.”
“…….”
“네가 경험했던 경지.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 준비만 해 두는 거다.”
“네. 알겠습니다, 주군.”
“앞으로 네가 할 일이 많다. 부상은 회복됐으니 기력만 찾자.”
“네, 주군. 반드시 해낼 것입니다.”
번천이 의지를 보였고, 난 빙그레 웃었다.
그의 곁을 지키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중에서는 계획에서 번천의 역할도 있었다.
계획은 단순하다.
난 번천을 나타족뿐 아니라 이 무법지대의 지배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실력은 물론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 생각하면 번천만 한 사람이 없다.
“믿어. 하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다. 필요해서 시작했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네가 더 중하다. 번천.”
번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덩치는 산만 한 게 순둥순둥하기는…….’
고작 이런 말에 저런 표정을 짓다니 말이다.
그의 마음이 싫지는 않다. 하지만 더 호되게 굴려서, 독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 * *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들이기에…….”
킹드래곤 길드의 길드장 오리시암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킹드래곤 길드.
이름은 거창하지만 이 길드는 사실 산적 집단이다.
‘용이 누운 산’이라 이름 붙인 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멋, 허세, 자존심 이런 거에 목숨 거는 건들거리는 놈들의 두목다운 발상으로 만들어진 길드명일 뿐이다.
뭔가 좀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그의 바람은 여태 나름 잘 통해 왔다.
오리시암, 본인의 실력이 나쁘지 않은 탓도 있긴 하겠지만 무엇보다 용이 누운 산은 정말 커다란 산이었기 때문이다.
오가는 상인들도 많았고, 통행세라는 명목으로 돈을 알아서 바치니 세력을 키우는 것도 용이했다.
오리시암도 제법 머리가 굴러가는지라, 물건은 뺏어도 사람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 방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수많은 길드 중에서, 정확히는 산적 집단 중에서도 손꼽히는 규모가 되었다.
매일매일이 나름 행복하다 생각한 그에게 근심거리가 생긴 건 최근이다.
절대적 폭력(Absolute Violence) 길드.
한 달 전부터 들리기 시작한 길드의 이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에게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킹드래곤 길드장이 할 말은 아니나, 그런 유치찬란한 이름의 길드도 있구나라고 생각했고, 또 이 바닥에 새로운 조직이 들어왔구나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부터였다.
매일같이 그들의 이름이 들린 건 말이다.
오늘은 어디가 망했네, 오늘은 어디가 박살 났네, 오늘은 어디까지 영역을 확장했네 하는 그런 말들.
점점 그 길드의 이름이 의미 있어지기 시작했고, 바로 어제 자신의 이웃 길드인 서 있는 사자 길드가 박살 났다는 정보는 그를 근심케 했다.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이곳에 모인 놈들은 대부분 흉포하다. 그리고 그만큼 한가락 하는 놈들이다.
제 밥그릇을 곱게 넘겨줄 리 없었을 터.
분명 혈투가 벌어졌을 것이고, 제대로 깨졌을 것이다.
오리시암이 제일 이상하게 생각한 건, 그들의 확장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매일 하나씩, 아니 가끔은 두 개의 조직까지 흡수할 수 있을까?
오리시암은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했다.
“두목!”
그때 한 중년인이 거처로 뛰어들면서 소리치자, 오리시암은 표정이 굳었다.
길드장이라 부르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수하에 대한 게 아니었다. 평상시 길드장이라 부르던 그를 두목이라 불렀을 때는 아주 다급할 때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애들 집합시켜!”
무슨 이유인지 묻지도 않고 오리시암은 그렇게 소리쳤다.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듯했다.
뭔 일인지 이야기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뛰쳐나가는 것을 보면 놈들이 올라오는 것이다.
산적들 중 손꼽히는 세력답게 킹드래곤의 모든 조직원들이 모이니 그 숫자가 무려 여든이나 되었다.
하지만 오리시암은 여전히 불안했다.
눈에 보이는 쪽수에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박살 났던 조직 중 최소 두 개는 자신들보다 더 인원수가 많았다.
그들의 우두머리 역시 자신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고 말이다.
오리시암은 자신의 애병인 철퇴의 손잡이를 꼭 쥐었다.
20년 가까이 자신과 함께하면서 수없이 많은 적들을 박살 내 온 애병을 쥐고 있자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가라……앉기는 쥐뿔.
손이 떨리면서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내가 이리 쫄 필요가 있나?’
분명 엄청나다는 소문을 가진 놈들이었으나, 싸워도 보기 전에 이리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이러면 수하들의 사기에도 지장이 생긴다.
지금도 보라!
자신의 눈치를 보며 벌써부터 몸을 떨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어떤 놈이든 내 드래곤 펀치로 박살 내면 그뿐!’
용이 누운 산의 지배자. 킹드래곤이란 길드의 장. 자칭 드래곤펀치라 불리는 철퇴의 주인.
드래곤성애자 오리시암이 그리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산채, 아니 길드 본거지의 입구에 적들이 보였다.
숫자는 고작 셋. 그나마도 둘은 여자와 아직 핏기도 가시지 않아 보이는 애송이였다.
킹드래곤 조직원들의 얼굴에 희망이 어렸고, 몇몇 이들은 괜한 걱정을 했다며 미소까지 지었다.
물론 셋으로 자신들의 본거지에 온 그들의 용기는 가상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앞으로 쭉 걸어오는 깡다구는 자신들이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게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 생각되었을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오리시암이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에게 달려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리를 넙죽 구부리며 거의 바닥에 절이라도 할 듯한 자세를 보며 조직원들은 뭔가 싶었다.
“용이 누운 산의 킹드래곤 길드 총원 여든두 명. 전원 새로운 길드장님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그 뭔가는 혼란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