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62)
“으음!”
“아직 아프냐?”
“아닙니다. 다만 방금 가슴이 따끔거려서.”
좋은 징조다. 아픔을 느끼는 것 자체가 거의 나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는 내내 번천의 치료에 신경 썼다.
나타족 애들하고 싸울 때, 큰 부상이 입기 전에 나았다 생각했는데 이놈이 무리하게 진력을 끌어들여 내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래도 빨리 눈치채서 다행이지 아니면 꽤나 시간을 잡아먹을 뻔했다.
“곧 영역에 도착합니다.”
오러후이의 말에 에르자일을 불렀다.
“에르자일.”
“응.”
에르자일이 준비한 후드를 건넸다.
“그렇게 쓰면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벗겨져.”
내가 후드를 쓰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에르자일이 후드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추까지 제대로 끼운 후 흐뭇하게 웃더니 자신도 후드를 썼다.
“저는 안 씁니까?”
“너는 얼굴이 좀 팔려야 한다니까. 그리고 잊지 마라. 지금부터는 내가 대장이다.”
“네, 알겠습니다.”
“이거 좀 불편하네.”
후드를 쓰니 머리가 갑갑하다. 그럼에도 굳이 쓴 건 웬만하면 내 얼굴을 놈들에게 보이기 싫어서다.
이미 오러후이 일당에게 보였지만 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 부대인 놈들. 그들 중 누구 하나 나에 대해서 발설할 경우 오러후이가 당했던 것을 모두에게 똑같이 해 준다고 엄포를 놨으니까.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몽골 같은 느낌이네.’
나타족의 본거지는 유역후 세계의 북방 민족 몽골족 같은 느낌이 났다.
원형의 둥근 천막. 수많은 말들, 작은 키에 홍조를 띤 얼굴들.
소와 양만 많이 보였다면 딱 북방의 유목민족과 다를 게 없었다.
“오러후이 무간. 오셨습니까.”
마을 입구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나타족 전사, 아니 마적 하나가 선두에 선 오러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놈의 눈에는 약탈을 끝내고 돌아오는 부대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대무간은?”
“계십니다. 다른 무간들도 있고요. 그런데 저기 뒤에 계신 분들은?”
“신경 쓰지 마라. 내 손님이다.”
“네.”
여덟 무간 중 하나라더니 오러후이의 목소리는 제법 위엄이 있었고, 그리 경계초소는 무사통과했다.
안으로 들어가며 점점 천막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천막과는 확연하게 큰 천막이 눈앞에 보였다.
그때 번천이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주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걱정이야. 들어가자고.”
번천의 불안함은 이해한다.
만에 하나 오러후이가 배신할까 봐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귀찮고 해결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오러후이와 우리 일행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왔는가! 오러후이!”
“어서 오게.”
안에 있던 사내들이 그를 반겼다.
이제부터는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다.
계획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나타족은 한 명의 대무간과 일곱의 무간들이 이끌어 간다. 그리고 대무간은 무간들 중에서 선출되는데 방법은 간단하다.
마적 떼에 뭐가 중하겠는가?
악육강식. 힘 있는 놈이 대무간이 된다.
물론 겉으로는 무간들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이가 선출되는데, 지지를 받으려면 싸워서 이겨야 하니 똑같은 말이다.
물론 메리트는 있다.
대무간에 도전하는 무간은, 대무간을 지지하는 무간을 먼저 이겨야 한다.
그래서 대무간의 선출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개개인 간의 상황, 개인의 무력, 정치 등 수없이 많은 물밑 작업이 일어난다.
오러후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무간이 아닙니다. 저희에게 새로운 무간이 생겼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오러후이에게 쏠렸다.
“누구?”
“밀려났다고?”
“거기에 너 말고 무간의 능력이 되는 자가 있던가?”
오러후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 발자국 비켜나며 번천을 가리켰다.
“우리 일족의 새로운 무간입니다.”
침묵이 천막 안을 휘돌았다.
“무간을 빼앗겼다?”
“오러후이가?”
“의외인데. 거기에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단 말이지.”
침묵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이 한마디씩 해 가며 소란스러워질 때, 오러후이가 번천을 소개했다.
“번천 님입니다.”
번천이 앞으로 나섰다.
다시 한 번 침묵이 찾아오고 번천이 선언했다.
“나 무간 번천은 대무간 자리를 원한다!”
더 이상 소란은 없었다.
* * *
번천의 선언 후, 일일이 누가 화를 내고, 누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시답지 않은 대화가 오간 건 생략하자.
결국엔 나타족의 오랜 규칙대로 대무간 선출 대회가 결정된 것이 중요하니까.
갑자기 도전하는 무간으로 인해, 여섯의 무간이 기존의 대무간을 지지하여 번천이 여섯과 싸워 이기고 그다음 대무간에게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니까 말이다.
“우아아아아!”
여하간 좀 심각한 분위기가 될 줄 알았는데, 대무간 선출 대회를 발표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무슨 축제라도 벌이는 분위기다.
그래도 뿌리가 한 부족이니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마적 떼는 마적 떼인가 보다. 하긴 수많은 곳에서 몰려든 도망자, 범죄자 들이 섞였으니 한 부족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다.
나타족의 특성인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이들이 많으나 금발, 브론즈는 물론이고 나와 같은 흑발도 많이 섞여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좋은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이기도 하다.
무탈하게 이곳을 손에 넣는 건 문제없으나, 통제하는 데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우아아아아아!”
번천의 상대로 첫 무간인 자가 올라오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살펴본 결과 여섯의 무간은 제법 실력이 있었다. 하긴 그러니 마적 떼 사이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거지만.
‘그래 봤자 도적놈.’
일대일로 번천의 상대가 될 만한 자는 셋이고, 그나마도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문제는 차륜전으로 치를 결투다.
부상과 내상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번천은 그간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상태기도 했다.
물론 준비는 해 뒀다.
에르자일에게 부탁하여 신체 강화 마법을 걸어 뒀고, 이후에도 아무도 모르게 마법을 걸 생각이었다.
여기서 에르자일의 마법을 알아볼 수준이 되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여하간 대무간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을 듯 보인다.
대무간 선출을 위한 결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결투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번천을 상대로 제법 버티는 놈들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 백여 합 이전에 승부가 났다.
“헉헉헉.”
물론 번천의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긴 했다.
아마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을 테고, 자잘하게 난 상처들에서 나온 피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상처가 덧나고, 내상도 입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계속 지켜보는 건 눈빛이 살아 있어서다.
정말 많이 성장했다.
브렌드 경과 어울린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정돈된 움직임마저 흉내 내는 것을 보니 스스로도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어떠한 도움도 없이 대무간까지 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천은 내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보통 수련 중에 나타나는 무아지경. 그것이 실전에서 나온다면…….
단숨에 몇 개의 벽을 깰 기회였다.
* * *
사람의 싸움이라 할 수 없었다.
처절한 전투는 많이 봐 왔고, 많이 해 왔다.
하지만 이런 싸움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경험해 본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었다.
‘씨발! 이게 아닌데.’
대무간 카르하이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신은 포스 유저다. 그것을 외부로 표출해 낼 수 있는 실력도 있다.
반면 상대도 포스는 배웠으나 아직 안에서만 놀고 있었다.
경지의 차이가 확연한 것이다.
자신은 마스터의 경지는 어림없지만 거기로 가는 초입 부분에 들어갔고, 놈은 자신이 봤던 산을 넘지 못한 상황이다.
무조건 이겨야 했다. 그런데 놈의 목을 날릴 수가 없었다.
방심?
그런 거 없었다.
상대는 힘겹게, 부상을 입고 비틀거리고 있었으나 여섯 명의 무간을 이겼고, 끝내 자신에게도 도전할 기회가 돌아왔다.
한 수가 있으니 최대한 집중했다. 그런데 안 됐다.
결투의 과정 그리고 지금까지의 결과는 분명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한데 쓰러지지 않는다.
기가 막히게 치명상을 피하고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 한다.
부족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게 느꼈다.
여섯이나 상대한 도전자를 쓰러트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것 같다. 그건 곧 지도자로서 자신의 위엄을 갉아먹는다.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전신의 모든 포스를 모으고 검에 집중했다.
시간은 충분했다. 상대는 서 있는 게 용할 정도라, 상대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피하고 반격하는 것뿐. 모든 공격의 주도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다.
그런 상황 때문이었을까?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포스가 오늘은 옅은 푸른색을 띠기 시작했다.
대무간 카르하이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끝났다.’
이번엔 확신을 넘어선 확정이다. 무조건 벤다. 그리고 자신이 포스 유저로 나타족의 지도자라는 것을 모든 이의 앞에서 확고하게 보여 줄 터였다.
검로는 단 하나.
변초 따위는 없다.
막으면 막는 대로 검과 함께 잘라 버릴 것이고, 피하면 피하는 대로 뿌려진 포스에 살이 짓뭉개질 것이다. 어찌 됐든 놈이 죽는 건 변함이 없다.
카르하이는 검에 포스와 더불어 만족감까지 담아 그대로 휘둘렀다.
분명 그리했는데 말이다.
‘이게…….’
그 전에 먼저 자신의 가슴을 향해 찔러 오는 검이 있었다.
* * *
눈앞이 흐릿하다.
벌써 몇 번이나 막고 또 검을 내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기계적으로 움직인 그것들이 통했다.
살아 있다.
계속 살아 있었다.
원래는 주군이 도와줄 거라 생각했다. 무슨 수를 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다.
일곱. 그것도 자신보다 크게 모자람이 없는 상대다. 게다가 그중 하나는 분명 자신보다 더 강한 무인이다.
그런 싸움에 주군이 자신을 내보냈을 때는 분명 그만한 이유와 대책이 있을 거라고 번천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를 쓰러트리고, 둘과 셋을 쓰러트렸을 때도 여유가 있었다.
아직은 할 만했고 자신의 성취감에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넷을 상대하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시작했고, 마지막 무간을 상대했을 때는 정말이지 죽을 뻔했다.
그 와중에 주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에르자일이 걸어 준 신체 강화 마법.
정말 딱 그뿐이다. 그마저도 이제 다 떨어진 상황에서 대무간이란 놈을 상대했다.
이쯤 되니 이상하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주군이 혹시 자신이 여기서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럴 이유는 없지만, 아니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밖에는 설명되지 않았다.
상관없다.
그마저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정말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면…….
‘복수는 해 주시겠지.’
그것 하나는 확실할 것이다. 눈앞의 대무간과 자신의 원수까지.
그 덕분이었을까?
굳이 뭘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검이 절로 움직였다.
몸은 지쳤는데 보이는 건 왜 그리 잘 보이는지.
그냥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상대의 검을 막고 피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충분히 생각까지 할 수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몸 상태가 조금만 좋았다면 ‘어쩌면!’ 하는 희망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상태가 엉망이라 그냥 기계적으로 버티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끝이구나!’
어느 순간 상대의 검에 푸른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번천은 그게 무엇인지 잘 알았다.
포스. 그것도 마스터의 직전 단계까지 간 포스를 외형화시킬 수 있는 단계.
상대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그런 포스가 실린 검이 자신을 향할 것을 잘 알았지만,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래서 하늘 높이 들린 검을 보면서 생각이란 걸 충분히 할 수 있었고, 떠올렸다.
―검사 중에 자꾸 검을 휘두르는 자들이 있는데, 그럴 바에는 도를 써야지. 베기는 찌르기보다 절대 빠를 수가 없어. 게다가 정수리를 향해 날아오는 건 그야말로 나 죽여 주십시오 하는 거라니까.
일순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검로가 무지막지하게 길어 보였다.
그리고 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