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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61화 (61/302)

등선인 줄 알았더니 전생이었다 (61)

로라스의 말에 번천이 대꾸했다.

“나타족 마적일 겁니다. 어차피 끌고 다닐 거, 잘 살려 둬서 몸값을 받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오러후이는 청년의 말에 덩치가 공손히 대답하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우두머리는 저 청년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두덩에 멍을 만든 이도 저자라는 것을 말이다.

“이놈만 본보기로 죽여도 될 것 같은데. 다른 놈들은 오히려 좋아할지도 몰라. 자기는 쏙 빠지고 수하들만 희생시켜서 널 제압하려 했으니까.”

오러후이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니 과연 수하들이 슬쩍 자신을 보는 게 속으로 원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약육강식의 세계인 나타족에서 대장인 자신이 손쓸 새도 없이 혼절했으니, 놈들이 저리 봐도 할 말은 없다.

그때 덩치에게는 주군, 여자에게는 로라스라 불렸던 청년이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살려 두라는데. 난 가치 없는 놈은 살리지 않아. 마적 따위의 몸값이 얼마나 된다고.”

오러후이는 눈치가 빨랐다. 상대에게 자신을 살려 둬야 할 명분을 만들어 줬다.

“살려 주십시오! 뭐가 필요하십니까?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제가 이 지역에서 모르는 건 없다고 자부합니다.”

이중 질문이다.

뭐가 필요하다고 대답하면 새로 자리 잡으려는 세력일지 모르는 곳의 선봉일 것이고, 뭐가 알고 싶다고 하면 토벌대 세력일 것이다.

“네가 모든 걸 다 안다고?”

“물론입니다.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랐습니다. 모르는 건 없습니다.”

로라스는 물었다.

“이 지역에 있는 산적, 도적, 마적 그리고 도망쳐 온 놈들이 사는 마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은데. 전부 말이야.”

“길드도, 마을도, 그리고 산채도 많습니다. 모두 말입니까?”

“전부라고 했을 텐데?”

오러후이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는 정보를 늘어놓았다.

로라스는 렌이 작성한 명단을 꺼내 그와 대조했다.

‘똘똘한데.’

거짓은 없다. 몇 개는 약간의 오차가 있지만 대부분 정확했으며, 상인인 렌이 조사 못 한 곳까지 수두룩했다.

‘이거 완전 미친놈들의 지역 아닌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마을과 인원에 로라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쩐다지?’

원래 계획은 모조리 제압하는 것이다.

토벌이 아닌 ‘제압’이다.

애초에 락을 발전시킬 때 사람을 모으고, 생활 시설과 먹고 살 만한 일거리를 만들고, 그걸로 다시 사람을 모으는 그런 정석적인 방법을 따를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아버지도 대영주 소리 한번 들으셔야지. 할아버지만큼의 세력으로는 무리지만, 대영주급이면 가능하지.’

맞다.

로라스는 부친 에듀의 영지를 키워 공작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부친이 그런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계획을 세운 건…… 세운 건…….

‘효심의 발로지.’

로라스는 그리 결론 내렸다.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샜다.

여하간 로라스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락을 발전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기본 전략은 간단했다.

남의 것을 빼앗는다.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닌가. 물론 남들에게 손가락질당하거나 비난받을 생각도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빼앗겨도 뭐라 하지 못할 놈들의 것을 빼앗는다.

그 대상이 바로 이 지역의 나쁜 놈들이다.

애초에 촉천의 경지를 기다린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 다 때려잡으려면 강해져야 하니까.

단순하지만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예상보다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건 문제다.

일일이 다 토벌, 아니 제압하려면 1년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로라스는 그의 입장에서 이런 잡스러운 것들에게 그런 많은 시간을 투자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깜깜이놀이라도 해야 하나?’

깜깜이놀이란 철저히 점조직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아냐!’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시간이 더 걸리겠다. 역시 인형놀이가 제격인데. 빠르게 엮어야 돼.’

로라스는 자신을 조심스레 쳐다보고 있는 오러후이와 눈을 마주쳤다.

심성이야 어떻든 맡긴 일은 잘할 것 같다.

“너 일단 좀 맞자.”

“네?”

“이야기할 게 있는데 그 전에 좀 맞아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무엇이든 제가 협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 그래서 맞아야 하는 거야. 번천.”

“네, 주군.”

“에르자일 데리고 잠시 주변 좀 둘러봐. 혹시 다른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뜬금없는 순찰 명령에 번천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힘차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주군.”

“나도 가야 해? 그냥 여기 있고 싶은데.”

에르자일이 한마디 했지만, 로라스는 간단하게 정리했다.

“번천 혼자 보내려고? 그러다가 이번처럼 또 쪽수에서 밀리면 곤란해져.”

“아! 가요, 번천 님.”

“네, 매지스터.”

번천이 에르자일과 함께 자리를 떠나자 오러후이를 비롯한 나타족의 마적들은 조심스레 로라스를 보았다.

덩치 큰 기사와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자리를 비워 이제 그 혼자 남았지만 그 누구도 덤벼들 생각을 못 했다.

떠나간 둘을 합친 것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사람이 누군지는 아까 전투에서 깨달은 바가 컸으니까.

“자! 일단 맞자.”

로라스가 일어나 자신에게 오는 걸 보며, 오러후이는 두려움과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왜 동료들을 다른 곳으로 보냈는지 말이다.

“궁금한 표정이네.”

“아닙니다!”

“아냐.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알려 줄까?”

오러후이는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도 아는 게 낫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었다.

“너를 아주 많이 팰 거야. 사정 봐주지 않을 거고, 그렇게 되면 내가 인간처럼 보이지 않을 거야. 그걸 보고 쟤들이 날 싫어할지도 모르잖아. 그래서야. 쟤들을 보낸 건.”

오러후이는 고개를 끄덕인 자신의 목뼈를 부러트리고 싶었다.

“그럼 맞자.”

잠시 후 그는 정말 스스로 목뼈를 부러트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 * *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돌아온 번천과 에르자일은 깜짝 놀랐다.

마적 떼가 군대처럼 열과 오를 맞춰 차렷 자세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저 사람들 왜 그래?”

에르자일의 물음에 로라스는 마적 떼에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대답했다.

“글쎄. 정신이라도 차렸나? 뭐 좀 먹자. 이게 뭐라고 좀 움직였더니 출출하네.”

“준비하겠습니다, 주군.”

번천은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고는 재빠르게 나섰고, 에르자일은 신기한 듯 마적 떼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뿐, 그 누구도 이쪽을 보는 이는 없었다.

“어떻게 한 거야?”

“나쁜 짓을 하면 되겠느냐? 개과천선해서 착하게 살라고 주의를 줬지. 너처럼.”

에르자일이 미소 지었고, 로라스는 손을 들었다.

“네, 주인님.”

손을 들자마자 무섭게 달려오는 오러후이.

“이제 볼일 다 봤으니 가라.”

“아닙니다. 주인의 곁에서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귀찮아. 그냥 가.”

“아닙니다!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제 삶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오러후이가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는 걸 보며 에르자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로라스가 뭔가를 한 것은 안다. 하지만 지금 오러후이의 표정을 보면 조금의 망설임도, 거짓도 없이 진심을 다하고 있다.

마법 중에서도 정신 조종을 하는 마법이 있지만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저렇게 진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주인은 무슨. 넌 내 옆에 있을 자격이 안 돼.”

로라스는 그리 말하며 스튜를 만들기 위해 물을 끓이고 있는 번천을 불렀다.

“번천!”

“네, 주군.”

“이리 와 봐.”

로라스는 다가온 번천을 보고, 손가락으로는 오러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관리할 놈이다.”

“네?”

“네가 부릴 놈이라고. 앞으로 뭐든 시킬 일 있으면 이놈을 시켜. 넌 수련에 집중하고.”

“네, 주군.”

“그리고 하나 더.”

로라스는 번천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됐다고 할 때까지 이놈 사람대접하지 마. 사람대접은 사람에게만 하는 거니까.”

번천은 순간 섬뜩함을 느낀 탓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고, 그런 그를 보며 로라스는 다시 말했다.

“잊지 마. 이놈, 사람을 해하고 득을 취하는 놈이다. 무슨 뜻인지 알 거라 생각한다.”

번천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오러후이를 보며 뭔가 안쓰러운 마음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놈 마적이었다. 아까 싸움에서도 로라스와 에르자일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이놈들 손에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도 자각했다.

“네, 알겠습니다.”

“배고프다. 먹는 것만 네가 직접 해. 요리는 네가 정말 잘하니까.”

“네.”

번천이 돌아가고, 에르자일이 조심히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뭘?”

“알잖아. 어떻게 한 거야? 마법이라도 쓴 거야?”

로라스가 슬쩍 오러후이를 봤고, 그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로라스는 다시 에르자일을 보며 말했다.

“마법은 무슨. 그냥 네가 사람을 개구리로 만들듯 나도 그런 방법을 쓴 것뿐이야. 네가 알아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만 잊어. 좋은 거고, 필요한 거면 네게 알려 줬을 거야.”

에르자일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 * *

세 사람과 말 다섯 필이었던 규모가 어느새 열 배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일행은 메타린 평야 외곽을 돌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나타족의 본거지였다.

“때가 딱 맞습니다. 이번에 모든 가문들이 모여 대표자를 선출하는 날입니다.”

오러후이의 말에 번천은 고개를 돌려 대열 후미, 수레에 올라 낮잠을 자고 있는 로라스를 슬쩍 쳐다보았다.

“주군께서는 대체 뭘 하시려는 건지…….”

솔직히 불안한 게 그의 마음이었다.

로라스의 무위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뛰어난 마법사인 에르자일도 있다.

하지만 그 두 사람만으로 나타족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 목적지가 그들의 본거지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러후이가 저리 들뜬 표정으로 입을 나불대고 있는 이유는 말이다.

‘본거지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복수할 생각이겠지.’

번천은 그리 불안해하면서도 별말 하지 않았다.

주군의 선택이다.

최악의 상황에 내 목숨을 버려 주군을 구하면 그뿐.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라. 주군이 어떤 분인데…….’

주군은 여태 무슨 말을 내뱉더라도 반드시 지켰고, 어떠한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지킨다. 그뿐이다!’

번천이 그렇게 비장 어린 다짐을 하는 사이 로라스는 수레에서 눈을 떴다.

‘이런 건 역시 체질이 아니야.’

어울리지 않게 낮잠도 좀 자고 늘어지게 시간을 보내려 했으나 좀이 쑤실 뿐이다. 가뜩이나 지금처럼 할 일을 하고 있는 중에는 더더욱 그랬다.

‘나타족만 손에 넣는다면 이후는 일사천리겠지?’

일이 잘못되리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이건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에르자일까지 있으니까.

‘일단 이쪽 지역을 손에 넣는다. 공식적으로 영지를 늘리는 건 그 이후.’

로라스는 어느 순간 자신이 악당이 된 느낌이 들었다.

‘무법지대에서 혼자 법을 지키는 게 더 멍청한 짓이지.’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선선을 지키는 건, 선을 지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 때나 해당된다.

오러후이에게 원초적 공포를 심어 준 이유도 그 때문이고, 놈을 인형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도 그놈이 악독한 놈이기 때문이다.

‘번천이 잘하려나 모르겠네.’

번천은 행동이 거칠어서 그렇지 심성은 착하다. 그에게 못 할 짓을 시키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여기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 지역이다.

물론 오러후이는 자신을 배신하지 못한다.

배신하기 전에 영혼의 뼈까지 각인시킨 공포가 상기될 것이다. 그런 놈은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번천이다.

믿을 만하면서 능동적으로 손에 넣은 기반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

처음에는 부족하겠지만 적응할 것이다. 부족한 게 있으면 자신이 채워 주면 되는 문제니까.

‘부족한 건 부족한 대로 나중에 채워 나가는 식으로.’

로라스는 다른 모든 생각을 떨쳐 버리고 하나의 목적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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